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3)
“넌 도대체 어디 있었단 말이냐?”
* 하나님 내지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것을 구하는 자들은 잘못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다면,
나는 제대로 된 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야말로 제대로 된 기도이며 힘 있는 기도입니다.
이 땅의, 소위 성공(?)한 성직자들이 세상의 도마 위에 올라 난도질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지 하나님의 뜻 외에 다른 것’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영계(靈界)를 향하지 않고 물질계를 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잘 못 구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의 표현대로 ‘영적 치매(癡呆)’라고나 할까요!
“물질계에 더 많이 깨어 있을수록 영계에 더 많이 잠들어 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에게 잠들어 있을 때, 다른 깨어 있음이 거룩한 은총의 문을 닫아버린다”(젤라루딘 루미).
성직의 대물림뿐 아니라 교회[재산]의 대물림도 감행하는 철면피! 오, 혈연(血緣)은 쇠심줄보다 더 질기고 질긴 모양입니다.
석가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자기 아버지가 있는 카필라 성으로 돌아와 밥을 빌어먹는 거지 행각을 했지요. 아버지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 슈도다나)이 아들 석가를 찾아가 걸식을 못하게 막으며 “석가족에는 거지란 없다. 왜 밥을 빌어 집안 망신을 시키고 다니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석가는 “나는 석가족이 아닙니다”라고 대꾸했습니다. 이는 곧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은 석가는 혈연에도 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는 또 어떻습니까. 그는 가나의 혼인잔치 자리에서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 속인의 눈으로 보면 불효자의 언사가 아닐 수 없지요.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혈연’에 매이지 않고 하늘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예수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태복음 12: 50).
하여간 예수나 석가는 ‘제대로 구하는 것’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늘 아버지(신성 혹은 불성)와 하나가 된 그분들은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었지요. 모든 것을 다 가지신 하늘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는데 무엇을 더 구하겠습니까. 그분들은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아’, ‘제대로 구한’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와 하나 됨을 구하는 것, 이것 외엔 구할 만한 게 없습니다. 이것 외에 더 힘 있는 기도는 없습니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변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에는 변화라는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생겨나고 자라고 늙어 죽어 사라지는 변화 속에 있습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이 생멸(生滅)의 ‘변화’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 속에 ‘변화의 낙인’을 찍어두었기 때문이지요. 산스크리트어에서도 ‘세상’을 일컫는 단어 ‘jagat'는 ’변화하는 것‘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변하는 것들의 세상에
모든 것은 신(神)으로 덮여 있도다.
그러니 인간들이여
내버림의 지혜를 가져
어느 누구의 재물도 탐내지 말지어다”(이샤 우파니샤드).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변화를 피하고 싶어 더러는 만리장성을 쌓고, 더러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철옹성을 짓고, 또 더러는 신의 이름을 빌어 사원의 탑을 크고 높게 수축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쇠락과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득한 옛날 이 땅별에서 크나큰 위세를 떨치던 공룡도 사라졌고, 또 다른 공룡 인간의 시대도 뉘엿뉘엿 저물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덩치 큰 힘이 센 공룡들도 ‘변화의 낙인’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 밝은 우리의 길잡이는 “그러므로 우리도 스스로 하나가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여의여야 하고, 확고부동해야 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일갈합니다. 하나님만이 변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불멸의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은 모두 무(無)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건만,
우리는 그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님은 안에 계시건만,
우리는 밖에 있다.
하나님은 집에 계시건만,
우리는 외출 중이다.
작년에 세상을 뜨신 제 노모께서 93세의 나이셨던 몇해 전입니다. 설날 아침 세배를 받으신 노모가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죽어야 할 텐데!”
아, 어머니 정신이 아직도 말짱하시구나. 돌아가야 할 때를 또렷이 기억하고 계시니.
인도의 고전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유디슈트라는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일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남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는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돌아갈 곳을 아는 사람입니다. 뒷모습이 추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도 자기 돌아갈 곳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늘 집[하나님] 바깥에 있고, 그의 마음은 항상 ‘외출’(外出) 중이지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간극(間隙)이 생기는 것은 나의 무지 때문입니다. 이 간극을 없애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바로 내 안에 계심을 자각하면 됩니다. 가장 귀중한 보물을 바로 내 안에 감춰두신 창조의 신비!
“넌 도대체 어디 있었단 말이냐?”
“내가 아버지 집에 있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열두 살 소년 시절에, 예수는 벌써 이런 문답을 자기 부모와 나누었다고 합니다.
하늘의 뜻을 헤아릴 나이라는 ‘知天命’을 훌쩍 뛰어넘어, 나는 겨우 이제야, 그분 집에 머물러 살고 있는 걸 사무치게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그걸 깨닫는 은총을 주셨으니 고맙고 고마울 뿐!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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