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 하는 안으로의 여행'(5)
가장 내밀한 곳에 계신 하나님
* 까막눈을 어떻게 뜰 것인가
나는 하나님만큼 내 “가까이” 있는 것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보다도 더 내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분이라는 말이다. ‘안’이란 말보다 그분이 가까이 계신 것을 어떻게 더 잘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제 ‘안’에 있는 분을 몰라보는 이가 있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제 ‘안’에 있는 분을 몰라 사람들은 방황한다. 사실 모든 고등종교의 가르침의 고갱이는 제 ‘안’에 있는 그분을 알라!는 것이다.
티베트어로 불자(佛子)를 뜻하는 <낭파 nangpa>는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즉 마음의 본성 바깥이 아닌 <안>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란 뜻이란 말이다.
우리는 바깥세상 돌아가는 일엔 대단히 민감하다. 바깥세상 일에 민감한 사람이 동시에 자기 존재의 ‘내부 사정’을 잘 알 수는 없는 법. 대개 그런 사람은 자기 내부 사정엔 까막눈이다. 이 까막눈을 어떻게 뜰 것인가.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다. 바깥세상[外界]를 향한 창을 닫고 안(內界)으로 향한 창을 여는 것뿐. 예수의 가르침을 빌면, 골방[내계]으로 들어가 외계로 향한 문을 닫고서, 은밀하게 계시는 분[아버지]께 기도하는 것뿐(마태복음 6:6).
*가장 내밀한 곳에 계신 하나님
만물 안에서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여러분이 만물 안에서 하나님을 붙잡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의 탄생을 알리는 표지,
하나님이 몸소 여러분 안에서
아들로 태어나셨음을 알리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해 지는 광경의 아름다움이나 산의 아름다움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아!’ 하고 감탄하는 이는 벌써 신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우파니샤드의 현자는 말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은 곧 하나님의 자기표현에 다름 아니니까 말이다. 하나님은 본래 형상이 없는 분이지만, 만물 속에 현현하심으로써 자기를 드러내신다.
그러나 사물의 겉모습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은 사물 안에 계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만물 속에 자기를 감추신다. 그래서 우리의 길잡이는 만물의 ‘안’에서 하나님을 붙잡으라고 권고한다.
동학의 해월 최시형 선생도 “천지만물 중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존재가 없다”(天地萬物莫非侍天主也)고 했다. 표현은 좀 다르지만 같은 통찰이 아닐까.
이런 통찰력으로 만물의 ‘안’에서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도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가장 내밀한 곳에 계시듯이 사람의 가장 내밀한 곳에 계시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길잡이는 우리가 ‘만물 안에서 하나님을 붙잡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몸소 우리 안에 아들로 탄생하신 표지가 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아들로 탄생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으랴.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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