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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다윗 이야기

여는 글 - 다윗 이야기의 처음과 끝, 미갈

by 한종호 2015. 7. 5.

다윗 이야기(1)

 

여는 글 - 다윗 이야기의 처음과 끝, 미갈

 

 

편집자 주/지난번에 실린 첫 회 “사무엘, 양다리 걸치다”는 다윗 이야기의 두 번째 글이었습니다. 이번 첫 글을 읽어보시면 앞으로 ‘다윗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1.

 

그녀를 박복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팔자가 드세다고 해야 할까. 사울의 둘째 딸이자 다윗의 두 번째 아내였던 미갈 말이다. 다윗에 대한 얘기를 왜 느닷없이 미갈에 관한 에피소드로 시작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겠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녀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다윗 이야기의 성격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서 미갈이 처음 등장하는 때는 사울의 자녀들을 소개하는 사무엘상 14장 49절이다(이하 책 이름이 지칭되지 않으면 모두 <사무엘상>의 인용이다). “사울에게는 요나단과 리스위와 말기수아라는 아들이 있었다. 딸도 둘이 있었는데 큰 딸의 이름은 메랍이고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다.” 여긴 그녀 가족관계와 이름 정도가 소개됐지만 독자들은 사울에게 미갈이란 딸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얘기가 전개되면서 그녀는 자존감이 세고 지혜로우면서 용기까지 갖춘 뛰어난 인물임이 밝혀진다. 그녀는 왕인 아버지의 뜻을 어겨가면서 남편 다윗의 생명을 구해줬고 유다의 왕이 되어 인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던 다윗을 비난해 마지않았던 주관이 강한 사람이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무대에 등장한 데는 사무엘상 18장 20절이다.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였다. 누군가가 이것을 사울에게 알리니 사울은 잘 된 일이라고 여기고…” 성서에서 ‘사랑’이란 뜻을 가진 동사 ‘아하브’는 이삭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사용됐다. 이삭은 리브가와 음식을 ‘사랑했다’(창세기 24:67; 27:4, 9, 14). 이삭이란 남자가 리브가란 아내를 사랑했다는 건 있음직한 얘기, 아니 당연한 얘기다. 옛날이라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했다는 게 대단한 일이겠나.

 

하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여자인 미갈이 남자인 다윗을 사랑했다니 말이다. 옛날엔 이런 일이 흔치 않았다. 그녀는 사랑을 겉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아버지 사울도 이 사실을 알았다니 말이다(18:20). 여기서도 그녀가 자존감 강하고 활달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뭘 보고 다윗을 사랑했는지, 그에 대해서 얼마나 알았는지 우린 모른다. 다윗이 사울의 신하였으니 이래저래 그를 볼 기회가 있었을 테고 그러다 사랑이 싹텄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땐 이미 다윗이 사울의 질투와 미움을 받는 처지였으니 이를 어쩌란 말이냐. 사울이 창을 던져 그를 죽이려 한 적도 있었다(18:6-11). 하느님이 보낸 악한 영에 짓눌려서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그랬다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사랑하는 게 가능했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그녀는 모든 걸 바쳐서 ‘죽도록’ 사랑했다고 봐야 할 게다. 안 그런가? 그럼 다윗은 어땠을까? 다윗도 그녀를 사랑했을까? ‘죽도록’까진 아니더라도 미갈을 사랑하긴 했을까? 차차 드러나지만 다윗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냥 그녀가 필요했을 뿐이다. 두 사람은 결혼한 후 얼마동안 헤어져 있다가 다시 합쳤는데 그 와중에도 다윗이 미갈을 사랑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녀가 정치적으로 필요했을 따름이다. 다윗에 대한 편견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그 여부는 텍스트를 차차 읽어가면서 확인해보자.

 

2.

 

본래는 미갈이 아니라 언니 메랍이 다윗의 아내가 될 뻔했다. 사울이 다윗에게 블레셋과 싸워 이기면 메랍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말이다. 그는 왕의 사위 자리를 미끼로 골칫거리 다윗을 블레셋 사람 손을 빌려 죽이려 했다. 하지만 사울은 메랍을 다윗 아닌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의 아내로 줬단다(18:19). 자기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거다. 다윗이 메랍의 남편 되는 걸 원했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사울의 약속 파괴에 대한 다윗의 반응도 전해지지 않는다.

 

사울은 한 번 약속을 어겼으면서도 같은 약속을 또 했다. 이번엔 구체적인 내용을 덧붙여서 말이다.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는지 알고 그걸 이용해서 그를 죽이려 했던 거다. 다윗이 미갈을 사랑하는지 여부는 사울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 주제에 공주가 사랑한다면 감지덕지해야 했을까? 그는 신하들에게 왕의 사위 되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다윗을 회유하라고 시켰지만 다윗의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인데 어떻게 내가 임금님의 사위가 되겠소?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로 보입니까?”(18:23)라는 자못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는 거다. 이 말의 진의는 의심을 받을만하다. 그는 결코 ‘가난하고 천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베들레헴의 유력한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다. 그의 집안이 사울 집안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다윗은 이렇게 짐짓 겸손한 태도를 보였을까? 그의 겸손은 진심이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사울이 아니었다. 자기 딸의 사랑의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울은 결혼선물로 블레셋 사람들 양피 1백 개를 가져오라고 제안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엽기적인 결혼선물이 아닌가 싶다. 사울은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다 죽으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윗이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제안을 받고 다윗의 전투본능이 치솟았나 보다.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 양피를 무려 2백 개나 갖고 왔단다. 그가 양피를 가득 담은 보따리를 사울 앞에 내놓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신하들이 그걸 하나하나 셌을까? 웃을 수도 없고 안 웃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어쨌든 다윗과 미갈은 그렇게 결혼했다. 사울은 분노로 속이 까맣게 탔겠지만.

 

사울의 정신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사위가 된 다윗을 공개적으로 죽이겠다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19:1). 하지만 다윗에겐 절친 요나단이 있었다. 사울의 맏아들 요나단은 왕위보다 다윗을 더 사랑했단다. 그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마다 나타나 그를 구해주곤 했다. 그의 손길이 못 미칠 때도 있긴 했다. 사울이 수금 타던 다윗에게 갑자기 창을 던져 죽이려 했던 때처럼 말이다. 다윗은 가까스로 이를 피해 목숨을 건졌지만 사울은 분이 안 풀렸던지 그날 밤 부하들을 다윗의 집으로 보내서 그를 죽이라고 했다. 다윗의 생명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됐는데 이때 미갈이 나서서 그를 구해준다. 다윗을 사랑한 것 말고는 존재감이 전혀 없던 그녀가 기지를 발휘해 남편을 구해준 거다. 그렇게 되면 자기는 홀로 남게 될지 몰랐을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자객을 보낼 걸 미갈이 어떻게 알았을까? 왕궁에 첩자를 심어놨을까? 좌우간 그녀는 사울의 계획을 미리 알고 그날 밤 다윗을 탈출시켰다. 그러고는 침대에 테라빔을 갖다 뉘어놓고 머리에 염소 털로 짠 망을 뒤집어씌우고 옷을 입혀놓아서 다윗인 것처럼 꾸몄단다. 그게 들통 나서 사울은 딸 미갈에게 호통 쳤지만 미갈은 전혀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가 그러지 않았으면 남편이 아버지 손에 죽었을 거라고 말했단다. 요즘도 보기 드물게 당당한 여장부 아닌가. 이런 여자를 왜 다윗은 사랑하지 않았나 싶다. 그가 싫어하는 타입이었을까?

 

이렇게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된다. 사울은 그를 죽이려 끈질기게 쫓았지만 그가 블레셋 지역에 몸을 숨기자 더 이상 쫓지 못하고 포기하고 만다. 블레셋 땅에는 사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다윗과 블레셋, 또한 블레셋과 사울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점인데 이에 대해선 나중에 상세히 얘기하겠다. 이렇게 해서 다윗과 미갈은 ‘이산가족’이 됐다. 사울은 딸이 청상과부 신세가 된 게 불쌍했던지 그녀를 갈림 사람 라이스의 아들 발디의 아내로 준다(25:44). 아버지에 맞서서 남편의 목숨을 구했던 미갈은 타의로 못 보던 남자의 아내가 된 거다. 그녀의 팔자가 참으로 기구하다고 말한 게 이 때문이다.

 

3.

 

그 후 세월이 흘렀고 세상도 많이 달라졌다. 사울이 죽고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다. 다윗도 우여곡절 끝에 유다 왕이 됐다. 미갈의 오라비 이스보셋은 허수아비에 가까운 허약한 왕이었고 실권은 사울의 군사령관이던 아브넬이 쥐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에선지 사울의 후궁 리스바를 범했다(사무엘하 3:7, 이하 책 이름이 지칭되지 않으면 모두 <사무엘하>의 인용이다). 그것은 왕위 찬탈의 의지를 드러낸 행위였으니 아무리 허약한 왕이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이스보셋은 아브넬에게 항의했단다. 그가 항의에 그친 건 그의 왕권이 그만큼 허약했기 때문이다. 안 그랬다면 아브넬을 죽였을 터이다. 왕의 항의를 듣고 아브넬은 적반하장 격으로 화를 냈는데 왕은 그가 두려워서 한 마디도 못했단다. 이스보셋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워낙 무능해서….

 

왕의 항의가 기분 나빴던지 아니면 자기 위치를 더 공고히 하고 싶었던지 아브넬은 다윗과 협상에 나섰다. 그는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서 “이 나라가 누구의 것입니까? 그러니 임금님이 저와 언약만 세우시면 내가 임금님의 편이 되어서 온 이스라엘이 임금님에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3:12)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이스라엘의 실권은 아브넬 손에 있었다는 얘기다. 다윗은 이 제안을 어떻게 여겼을까? 그는 뜻밖의 역제안을 한다. 과거 자기 아내였다가 사울에 의해 발디의 아내로 살아온 미갈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제안한 거다. “좋소! 내가 그대와 언약을 세우겠소. 그런데 나는 그대에게 한 가지만 요구하겠소. 그대는 나를 만나러 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 얼굴을 볼 생각을 하지 마시오”(3:13). 매사 불여튼튼이라고 그는 이스보셋에게도 같은 전갈을 보냈다. “나의 아내 미갈을 돌려주시오. 미갈은 내가 블레셋 사람의 포피 백 개를 바치고 얻은 아내요”(3:14). 앞에선 2백 개였는데 여기선 1백 개가 됐다. 어느 게 맞는 말이야?

 

그는 왜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미갈을 보내라고 했을까? 다윗은 원하는 여자는 모두 차지했다. 남의 아내였던 밧세바까지 차지하지 않았나. 그녀의 남편을 죽여 가면서까지 말이다. 이런 그가 남의 여자가 된 미갈을 왜 불러들였을까? 미갈은 다윗을 (한때) 사랑했지만 다윗은 미갈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럼 왜? 그건 다윗이 미갈과 처음 결혼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전에 왕이 되기 위해 왕의 사위라는 지위가 필요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서는 사울의 사위 지위를 되찾는 게 필요하다고 봤던 거다. 이스보셋은 누이 미갈을 불러들인다. 그녀의 남편 발디(3장 15절의 ‘발디엘’은 ‘발디’의 변형이다. 성서엔 이런 예가 드물지 않다)는 울면서 바후림까지 따라왔는데 이를 보다 못해 아브넬이 그를 돌려보냈다고 한다(3:16). 다윗 이야기에서 가장 안타까운 장면이라 할 만하다. 미갈과 결혼해서 알콩달콩 살다가 정치상황이 변했다고 아내와 강제로 헤어지게 되니까 헤어지기 싫어서 먼 길을 울면서 따라왔다는 발디가 측은하기 짝이 없다. 이를 생각하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른 후 나단에게 비판받은 후 다윗이 뉘우치며 썼다는 시편 51편이 달리 읽힐 정도다. 이렇게 미갈은 다윗에게 돌아왔다. 그 후로 그들은 사랑을 회복했을까? 미갈에게 다윗은 전처럼 사랑스러웠을까? 과연 그랬을까?

 

4.

 

미갈 얘기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때는 야훼의 궤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다(6:1-23). 몇 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 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자 다윗은 “모시로 만든 에봇만 걸치고 야훼 앞에서 온 힘을 다해 춤을 추었다”(6:14). “다윗과 온 이스라엘 가문은 환호성을 올리고 나팔 소리가 우렁찬 가운데”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다. 이때 미갈은 창밖으로 그 광경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왕이 야훼 앞에서 춤추는 걸 보고 마음속으로 그를 업신여겼단다. 그녀가 다윗에게 핀잔을 준 얘기를 설화자는 이렇게 전한다.

 

다윗이 자기의 집안 식구들에게 복을 빌어 주려고 궁전으로 돌아가니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맞으러 나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윗이 미갈에게 대답하였다. “그렇소. 내가 야훼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야훼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야훼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야훼를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야훼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야훼를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욱더 존경할 것이오.” 이런 일 때문에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6:20-23).

 

우선 설화자가 그녀는 ‘사울의 딸’이라고 부르는 게 눈에 띤다. 둘째 아내이긴 하지만 그녀는 다윗의 아내가 된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설화자는 굳이 그녀를 ‘사울의 딸’이라고 부르니 이게 웬일인가? 그녀에게는 왕비 자격이 없다는 건가? 그게 아니면 왜 그녀를 그렇게 불렀을까? 하지만 자기를 뭐라고 부르든 그녀는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을 아버지 손에서 건져낸 그녀가 아니던가. 다윗을 빼돌렸을 때 그녀는 목숨을 걸었다. 이런 그녀였기에 다윗이 한 엉뚱한 행위를 그냥 넘기지 못했던 모양이다.

 

정작 자기를 불러들이고는 모른 척해서 화가 났을까? 다윗이 자긴 안 찾고 다른 왕비들과 후궁들만 찾아서 질투가 폭발했을까? 아니면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들 앞에서 하체를 드러내고 경박하게 춤을 춰서 창피했을까? 그가 자길 찾아주지 않았기에 그게 더 화를 돋웠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나는 그녀의 말에서 그 어떤 잘못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녀가 못할 말을 했나? 다윗의 행위는 왕이 아니라도 핀잔 들을 만한 창피한 짓 아닌가? 하지만 다윗은 이를 묘하게 받아친다. 자기는 야훼를 찬양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기뻐 뛰며 춤을 출 뿐 아니라 그 이상도 하겠다고 말이다.

미갈이 다윗에게 핀잔을 준 건 그가 춤을 췄기 때문이 아니라 ‘하체를 드러내고’ 춤을 췄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는 춤추는 걸 비난하지 않는다. 비난은커녕 권장한다. 시편은 기뻐 뛰며 소구 치며 춤추며 야훼를 찬양하라고 말한다. “춤을 추면서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소구 치며 춤을 추면서 노래하여라”(시편 149:3). “소구 치며 춤추면서 야훼를 찬양하고 현금을 뜯고 피리 불면서 야훼를 찬양하여라”(시편 150:4).

 

‘사울의 딸’ 미갈은 그 일 때문에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단다. 설화자는 이 일 때문에 야훼가 그녀의 태를 닫아서 자식을 못 낳았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다윗이 그녀를 찾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불임이었을까? 그게 아니라 다윗이 그녀를 찾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던 게 아닐까? 그 일 이전에도 그랬겠지만 말이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다윗은 살아 있는 사울의 후손은 다 죽이려 했고 앞으로도 그와 관련된 아이가 태어나는 걸 적극적으로 막았다. 이것도 그런 경우다. 미갈이 사울의 딸이니 만일 그녀와 다윗 사이에 아들이 태어난다면 그는 사울의 외손자가 되어 왕위 계승 질서를 흩트릴 테니 말이다. 다윗은 그걸 막으려 했던 거다. 참으로 똑똑하고도 주도면밀하지 않은가.

 

5.

 

서두에서부터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어 미갈 얘기를 길게 한 이유는 이 에피소드가 다윗 이야기의 전체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윗은 입체적인 인물이다. 단순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특징이 있지만 그게 그를 다 설명하진 못한다. 다양한 모습들이 얽히고설켜서 한 사람의 성격을 이룬다. 다윗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서 진솔하고 진지한 신앙인의 모습을 본다. 예컨대 사무엘 테리언(Samuel Terrien)은 “다윗의 순수한 신앙은 현시대가 간과하는 유려함이 돋보인다.”고 말했다(Samuel Terrien, The Elusive Presence: Toward a New Biblical Theology [New York: Harper & Row 1979], 282). 존 멕켄지에게 그는 ‘왕이 되기 위해 온갖 나쁜 짓을 다 한 악당’이다. 그는 다윗을 “피에 굶주린 섹스광 부랑자”로 묘사했다(John McKenzie, The Old Testament without Illusion [Chicago: Thomas More Press, 1979], 236). 누군 맞고 누군 틀리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에겐 이 모든 면이 다 있으니 말이다.

 

다윗은 진지하고 솔직하다. 그는 솔직하게 자기 욕망을 표현하고 그를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한 사람이다. 그는 하느님을 믿었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시대의 아들이었으므로 그 시대 사람들이 믿는 식으로 하느님을 믿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좋은 신앙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나쁜 신앙 또는 불신앙은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었다. 결과가 좋으면 잘 믿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는 말이다. 다윗은 결과적으로 왕이 됐으므로 좋은 신앙인으로 인정받은 경우다.

 

다윗은 자기 신앙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다. 놀랄 일 아닌가. 신앙의 모범으로 알려진 그가 자기 신앙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다니 말이다. 그는 신앙이 없어 보이는 행동을 자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앙의 화신으로 보이는 것은 설화자 덕분이다. 설화자가 그를 그렇게 그리기 때문이다. ‘참회하는 다윗’이란 인상도 그렇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썼다고 믿어져왔다. 표제가 그렇게 말하니까. 이 시는 대표적인 참회시다. 이걸 읽고 눈물 흘리며 참회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덕분에 그는 참회할 줄 아는 신앙인의 모델로 인정받고 있다. 이 말이 틀리진 않았지만 그게 다윗의 전부는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진실성이라곤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욕망 덩어리도 아니었다. 그는 그 시대에 ‘왕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는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그걸 움켜줬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생애를 전하는 <사무엘서>는 그를 매우 우호적으로 그린다. 오죽하면 헤럴드 불름(Harold Bloom)이 야훼를 ‘다윗과 사랑에 빠진 신’이라고 불렀겠는가(“Yahweh is the God who fell in love with David,” Harold Bloom and David Rosenberg, The Book of J [Grove Weidenfeld, 1990], 242). <사무엘서>가 그의 흠결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 경우도 있긴 하다. 밧세바와의 불륜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그 얘길 읽어보면 그 사건 후에 썼다는 시편 51편 참회시의 감동이 반감될 정도다. <사무엘서>가 전체적으론 다윗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우호적이지만 말이다. 월터 브뤼그만은 다윗 이야기의 목적을 ‘정당화’(legitimation), ‘변명’(apology), ‘찬양’(glorification), 그리고 ‘정치선전’(propaganda)으로 정리한다(Walter Brueggemann, David’s Truth in Israel’s Imagination and Memory [Philadelphia: Fortress, 1985], 20). 이 점을 감안하지 않고 다윗 이야기를 읽는다면 우린 다윗에 대한 현대판 ‘신화’를 만드는 게 될 것이다. 다윗에 대한 ‘신화’는 이미 충분히 많다. 우선 구약성서가 그렇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공히 그는 신화적 인물에 가깝다. 무엇보다 구세주가 다윗의 후손이 아니던가! 그래서 우리는 다윗 이야기를 읽으면서, 특별히 설화자가 그에 대해서 평가를 내리는 대목을 읽으면서 ‘왜?’라는 질문을 반드시 해야 한다. 왜 그렇게 적었을까? 왜 그렇게 평가할까? 그 근거는 뭘까? 이런 질문들 말이다.

 

동시에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몇 가지 있다. 첫째로 다윗 이야기는 한 언더독이 왕이 된 얘기다. 출신배경만 보면 다윗은 결코 밑바닥 사람이 아니다. 이새는 베들레헴의 유력자였고 다윗은 그런 이새의 막내아들이다. 하지만 그는 나락까지 떨어졌던 사람이다. 사울 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광야에서 무뢰배로 살았던 적도 있고 원수 블레셋의 용병으로 연명했던 적도 있었다. 누가 이런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을 품었을까? 그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가까스로 연명했던 사람들이 아니었겠나. 그가 왕위에 오르기까진 그런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를 품고 그를 응원했을 개연성이 크다. 그가 왕이 된 이후론 달라진 그의 행태에 실망해서 등을 돌렸을 수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다윗과 주변 인물들의 사회적인 배경을 감안하고 다윗 이야기를 읽으려 한다.

 

둘째로 우리가 갖고 있는 다윗 이야기의 궁극적인 목적이 뭔지 따져가면서 읽어야 한다. 현재 우리 앞에 있는 다윗 이야기의 목적은 ‘역사적 다윗’(historical David)을 전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보기엔 ‘신화적’ 요소가 너무 많이 섞여 있다. 그럼 다윗 이야기는 그를 신화로 치장해서 이상적인 왕으로 그리는 게 목적일까? 정말 그럴까? 그런 점이 분명히 있지만 그게 전부인가 말이다. 그걸 넘어서는 신학적 진실(theological truth)을 전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 이 얘기가 다윗이란 인물의 이상화 또는 신화화에 그친다면, 곧 시대에 필요한 신학적 진실을, 나아가서 시대를 초월하는 신학적 진실을 담고 있지 않다면 그게 과연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을까? 거기엔 분명 지역과 시대를 초월해서 누구에게나 의미가 있는 신앙적, 신학적인 진실이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이 얘기와 씨름하고 있는 거다. 안 그런가? 우리가 다윗 이야기를 읽는 궁극적인 목적은 이 신학적 진실을 찾아내는 데 있다.

 

다윗 이야기는 <여호수아서>에서 시작해서 <열왕기하>에서 끝나는 ‘신명기 역사서’(Deuteronomistic History, 줄여서 Dtr. 또는 DtrH.)의 일부다. 신명기 역사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부터 유다가 바빌론에 멸망했을 때까지 역사를 <신명기>에 전해지는 야훼의 계명이란 관점에서 서술한 책이다. 그 기간에 많은 왕들이 왔다갔지만 가장 중요한 왕이 다윗임을 두말하면 잔소리다. 모든 유다 왕들은 다윗을 기준으로 평가를 받았다. 다윗의 길을 따랐는지 따르지 않았는지로 평가됐던 거다. 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는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이렇듯 중요한 인물이다 보니 역사적 다윗에 많은 요소들이 덧붙여져서 신화적 인물이 만들어졌던 거다. 그래서 지금은 다윗이 누군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파악하기가 어려워졌다. 과거에 유행했다가 잠시 뜸했지만 지금 다시 활발하게 진행되는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 연구라는 게 있다. 예수에 대한 신화적 진술을 모두 거둬내고 기원후 1세기 로마제국 치하의 팔레스타인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예수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연구하는 게 역사적 예수 연구다. 이 책은 다윗 이야기의 신학적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서 역사적 다윗이 누군지를 염두에 두고 그의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역사적 예수를 찾는 일도 어려운데 역사적 다윗 연구는 오죽하겠는가. 그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보다 훨씬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야 한다. 게다가 구약성서 밖에는 그에 대한 자료가 거의 전무하다. ‘텔 단 석비’(Tel Dan Stele)와 ‘메샤 석비’(Mesha Stele), 그리고 ‘쇼생크 부조’(Shoshenq Relief) 등에 ‘다윗’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만 너무 단편적이어서 그것만 갖곤 다윗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게 없다. 다윗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구약성서, 그 중에 <사무엘서>와 <시편>, 그리고 <역대기서>가 전부다. 그나마 <시편>과 <역대기서>는 <사무엘서>보다 역사적 다윗에게서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의외로 <역대기서>가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다. 그 책은 다윗에게 불리한 얘기는 가급적 전하지 않는 게 특징이다. 예컨대 다윗이 사울을 섬긴 일, 그가 광야로 도망친 일, 나발을 죽이고 아비가일을 아내로 삼은 일, 블레셋에 몸을 의탁한 일, 밧세바와의 불륜사건과 우리야를 죽인 일, 암논의 죽음과 압살롬의 반역사건, 아도니야와 솔로몬의 갈등 등을 이 책은 전하지 않는다. 그럼 대체 다윗에 대해 뭘 전하나 싶은 정도다. 사정이 이러니 역사적 다윗을 알기 위해서는 <사무엘서>에 집중해야 한다.

 

이 책은 본격적인 학문적 연구서가 아니다. 내용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형식이 그렇다는 말이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서 전체적인 그림을 만들어가듯 다윗이 누군지를 찾아가려 한다. 다윗 이야기가 전하려는 신학적 진실을 규명하는 일은 그 다음 일이다. 다윗이 누군지를 규명하고 그의 이야기가 전하려는 신학적 진실을 밝혀내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거다.

 

이 책을 쓰기 위해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다. 다윗 얘기는 열왕기상 2장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열왕기서>도 일부 읽어야 한다. 성서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은 성서인데 이걸 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나를 포함해서 성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다. 성서에 ‘관한’ 책은 열심히 읽는데 성서 ‘그 자체’는 별로 안 읽는다는 얘기다. 대부분의 질문에 대한 답은 성서에 있다. 가끔 그게 쉽게 눈에 띠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성서를 꼼꼼히 읽어야 한다. 이른바 ‘close reading’이란 것 말이다. 나는 성서를 읽으면서 다윗이 누군지 알게 됐고 그 얘기가 전하는 신학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었다. 거기서 얻은 정보를 정리하고 틀을 갖출 수 있게 해준 책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 몇 권만 들어보겠다.

 

Robert Alter,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 (Basic Books, 1981)

Joel Baden, The Historical David: The Real Life of an Invented Hero (New York:

HarperOne, 2013)

Randall Bailey, David in Love and War: The Pursuit of Power in 2 Samuel 10-

12 (Sheffield: JSOT, 1990)

Adele Berlin, Poetics and Interpretation of Biblical Narrative (Winnona Lake:

Eisenbrauns, 1994)

Walter Brueggemann, David’s Truth in Israel’s Imagination and Memory

(Philadelphia: Fortress, 1985)

David Gunn, The Story of King David: Genre and Interpretation (Sheffield:

JSOT, 1978)

Baruch Halperin, David’s Secret Demons: Messiah, Murderer, Traitor, King

(Grand Rapids: Eerdmans, 2001)

Gwilym Jones, The Nathan Narratives (Sheffield: JSOT, 1990)

Jonathan Kirsch, King David: The Real Life of the Man Who Ruled Israel (New

York: Ballantine Books, 2000)

Sol Liptzin, Biblical Themes in World Literature (New Jersey: KTAV Publishing

House, 1985)

Steven L. McKenzie, King David: A Biograph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Tryggve N. D. Mettinger, King and Messiah: The Civil and Sacral Legitimation

of the Israelite Kings (Lund: Gleerup, 1976)

Leonhard Rost, The Succession to the Throne of David: Historic Texts and

Interpreters in Biblical Scholarship. tran. David Gunn (Sheffield:

Almond Press, 1982)

Martin J. Steussy, David (Columbia: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1999)

Phyllis Trible, Texts of Terror (Philadelphia: Fortress, 1984)

 

이 밖에도 참고한 자료들이 많이 있지만 꼭 필요할 때만 본문 중에 밝히겠다. 이 책에서 인용된 성서는 <새번역>인데 ‘주’를 ‘야훼’로,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바꾸었다. 유대인도 아닌데 굳이 ‘야훼’라는 이름을 피할 이유가 없고, 개신교 밖에서는 모두 ‘하나님’이 아닌 ‘하느님’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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