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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다윗 이야기

엇갈리는 운명

by 한종호 2015. 8. 2.

다윗 이야기(5)

 

엇갈리는 운명

– 야훼의 영이 사울에게서 다윗에게 옮겨가다

 

1.

 

사무엘이 사울의 후임자를 찾아 이새의 집에 갔을 때 그의 맘에 든 사람은 맏아들 엘리압이었다. 그는 엘리압을 보고 맘속으로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시려는 사람이 정말 야훼 앞에 나와 섰구나.”라고 생각했단다(사무엘상 17:6). 하지만 그는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야훼는 중심[심장]을 본다.”(7절)라는 야훼의 말을 듣고 꼬리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하느님은 겉모습이 아닌 중심을 보신다.’는 생각이 여기서 비롯됐다. 그러고 나서 야훼는 다윗을 보고 “바로 이 사람이다. 어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라!”라고 사무엘에게 알려줬다(12절). 적임자를 찾아낸 기쁨이 읽는 사람에게도 느껴질 정도다. 야훼가 당신 맘에 드는 자를 드디어 찾아낸 거다.

 

다윗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고 중심/심장을 보는 야훼의 마음이 든 사람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이걸로 게임은 끝난 게 아닌가 말이다. 배우가 무대 위에서 아무리 연기 잘 해도 연극은 결국 감독에게 달려 있듯이 역사라는 무대의 등장인물이 아무리 잘난 체해도 결국은 극은 감독인 하느님이 이끌어간다. 누군가가 외모는 안 보고 심장/연기력만 보는 감독의 눈에 들었다면 이미 게임을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다윗이 심장을 보는 야훼의 마음에 들었다는 얘긴 그에게 야훼의 영이 머물러 있었다는 얘기(16:13)와 함께 다윗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궁금한 점은, 그가 야훼의 마음에 들었고 야훼의 영이 그에게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나 하는 점이다. 사무엘은 다윗이 야훼의 마음에 들었단 사실을 알았지만 야훼의 영이 그에게 머물고 있단 사실은 몰랐을 거다. 그게 눈에 보이지는 않으니까.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설화자뿐이다. 그럼 다윗은 알았을까? 자기에게 야훼의 영이 머물고 있음을 그는 인식했을까? 인식했다면 어떻게 인식했을지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나? 뭔지 모르는 어떤 기운이 자기를 감싸고 있다고 느꼈을까?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기라도 했을까? 야훼의 영이 사람에게 머문다는 것이 사람에겐 어떤 경험이었으며 어떤 의미를 가질까? 여러분은 안 궁금한가?

 

아쉽게도 다윗 이야기는 우리가 궁금해 하는 이런 점들에 대해선 답을 주지 않는다. 그 정도는 당시 사람들이 다 알았기 때문일까? 정말 그랬을까? 어쨌든 설화자는 야훼의 영이 다윗에게 머물렀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어떻게 경험되는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예컨대 야훼의 영이 다윗에게 머물렀기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거나, 재앙이 될 사건이 복이 됐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윗 이야기를 읽으면서 ‘왜?’라는 질문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왜 모든 일이 다윗에게 유리하게 전개될까? 야훼가 일어나는 모든 일의 궁극적 주관자라면 모든 일이 다윗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것은 그가 야훼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겠다. 야훼는 왜 다윗을 이토록 ‘총애’했을까? 다윗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그토록 애지중지했는가 말이다. 그에게 그럴만한 장점이 있었나? 있다면 그게 뭘까?

 

2.

 

사무엘은 야훼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하느님은 거짓말도 안 하시거니와 뜻을 바꾸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뜻을 바꾸지 않으십니다.”(15:29)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히 여기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데서 야훼는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이 후회된다. 그가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15:11)라고 말한다. 이는 앞의 말과 모순된다. 앞에선 하느님은 ‘뜻을 바꾸지 않는다.’고 했는데 뒤에선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니 말이다. 전자는 사무엘이 하느님에 대해서 한 말이고 후자는 하느님 자신이 한 말이므로 만일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마땅히 후자를 골라야 할 게다. 게다가 후자는 몰락하는 사울에 대한 말이고 전자는 상승하는 다윗에 대한 말이 아닌가. 하지만 다윗 이야기 전체에서 사무엘이 차지하는 막대한 비중을 감안하면 그의 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게 야훼의 말과 모순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혹시 사무엘에 야훼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한 게 아닐까? 야훼는 사무엘의 입을 빌려서 다윗에 대한 ‘무조건적’(unconditional) 사랑을 천명한 게 아닐까?

 

왜 야훼는 다윗이 그토록 마음에 들었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른다. 야훼가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야훼의 맘속에 들어가 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왜?’에 대한 답이 아니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에 대한 답이다. 그것도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 있을 따름이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사울은 백성의 선택을 받아 왕이 된 데 반해 다윗은 야훼의 선택을 받아 왕이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울 역시 야훼의 선택을 받아서 왕이 됐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온 한 사람을 너에게 보낼 것이니 너[사무엘]는 그[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그가 나의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나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내가 보았고 나의 백성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를 내가 들었다.’ 사무엘이 사울을 보았을 때에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젊은이가 내가 너에게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나의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사무엘상 9:16-17).

 

“사무엘이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야훼께서 뽑으신 이 사람을 보아라. 온 백성 가운데 이만한 인물이 없다.’ 그러자 온 백성이 환호성을 지르며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사무엘상 10:24).

 

사울은 ‘외모’가 왕으로 선택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다윗은 야훼가 ‘마음/심장’을 보고 택했다고 흔히 생각한다. 하지만 다윗 역시 외모에 대한 언급이 있고(사무엘상 16:12) 사울의 ‘심장’이 야훼 마음에 안 들었다는 얘기도 없으니 사울의 외모와 다윗의 마음을 대조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 사울은 죄를 지은 악인이지만 다윗은 죄 없는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터무니없긴 마찬가지다. 사울이 무죄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다윗 역시 간음과 살인의 죄를 저질렀으니 말이다. 따라서 야훼가 사람을 도덕적 기준에 따라서 사람을 선택한다고 볼 수도 없다. 헤렘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사울을 선택한 걸 야훼가 후회했다면 간음과 살인의 죄를 지은 다윗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후회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야훼는 다윗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았다. 사울에 대해선 두 번이나 후회했는데 말이다(사무엘상 15:11, 35). 야훼의 영이 사울을 떠났고 대신 야훼가 보낸 ‘악한 영’이 그를 괴롭혔지만(사무엘상 16:14) 야훼의 영이 다윗을 버리고 떠나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야훼의 ‘헤쎄드’가 영원히 그의 집안에 머물 것이라고 했다.

 

“내가 사울에게서 나의 총애[헤쎄드]를 거두어 나의 앞에서 물러가게 하였지만 너의 자손에게서는 총애를 거두지 아니하겠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이어 갈 것이며 네 왕위가 영원히 튼튼하게 서 있을 것이다.”(사무엘하 7:15-16).

 

3.

 

사울과 다윗 사이의 갈등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사울의 ‘질투’다. 사울은 다윗에 대한 질투에 사로잡혀 그를 죽이려 한다. 사울이 다윗을 질투한 이유는 야훼가 자기를 버리고 다윗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울이 왕이 되고 싶어서 됐나? 아니다. 그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왕으로 추대하려 했을 때 그가 짐짝 속에 숨어 있었던 것도 그래서다(사무엘상 10:22). 물론 정작 왕이 되어 보니 권력의 맛을 알게 됐을 수도 있지만 텍스트는 그렇게 추측할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사울의 비극은 야훼가 그를 선택할 걸 ‘후회’하면서 시작됐다(사무엘상 15:11). 야훼는 사울이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고 했지만 야훼 역시 사울에게서 등을 돌렸다. 누가 먼저 등을 돌렸는지는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좌우간 야훼는 사무엘을 통해 전한(또는 전했다고 말하는) 자신의 지시를 사울이 어겼기 때문에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는 얘기인데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희생제사를 드린 것과 헤렘의 법을 어긴 게 그거다. 이게 사울을 버릴 만한 일이고 ‘야훼의 영’이 그를 떠날만한 일일까? 그것은 전적으로 야훼에게 달린 일이지만 쉽게 납득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안 그런가?

 

야훼의 영은 사울이 행한 두 번의 실수 때문에 가차 없이 그를 버렸지만 일단 다윗에게 옮겨간 이후론 그를 떠나지 않고 그에게 머물렀다. 여기서도 다윗에 대한 야훼의 거의 무조건적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사울은 희생제사를 주관했다고 버림받았지만 다윗은 아히멜렉 제사장을 속이고 금지된 떡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지 않았다. 사울은 헤렘의 법을 어겼다고 버림받았지만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하고도 끄떡없었다. 사울은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지 못했지만 다윗의 회개는 받아들여졌다. 사울의 경우엔 죄를 지은 당사자인 사울이 죗값을 치렀는데 다윗의 경우엔 아무 죄도 없는 아기가 다윗 대신 죽임을 당했다. 다윗에게는 매사에 섭리가 작용했지만 사울에게는 야속한 운명이 장난질을 쳤다. 사울은 아무리 잘 해보려 해도 일이 꼬이기만 했는데 다윗은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일이 술술 풀렸다.

 

왜 그랬을까? 왜 둘의 운명은 이토록 판이하게 달랐을까? 도덕과 윤리의 수준이 달랐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윗의 신앙이 사울의 그것보다 더 순수하고 신실했다고도 볼 수 없다. 아무리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양하다 해도 다윗의 신앙이 사울의 그것보다 더 순수하고 신실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사울의 실패와 다윗의 성공의 원인은 그들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에 대한 야훼의 호불호에 달려 있었던 거다. ‘야훼의 영’이 머물렀거나 떠난 것도 그들이 뭘 잘했거나 잘못 했기 때문이 아니다. 다윗이 야훼의 마음에 든 것도 그럴만한 미덕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건 은혜를 베풀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사람은 긍휼히 여길 전권을 갖고 있는 야훼에게 달린 문제였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사울이 실패할 운명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도 야훼의 선택으로 왕이 됐다. 야훼가 애초부터 그를 실패하게 하려고 왕좌에 앉혔을 리 없다. 그 역시 야훼의 신뢰와 기대를 받고 왕이 됐던 거다. 그의 운명이 달라진 건 다윗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가 갑작스레 내리막길로 치달았던 것은 다윗 때문이다. 그에게 대단한 허물이 있거나 그가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다. 모든 게 다윗 때문이었다. 다윗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던 거다. 야훼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다윗이란 인물이 나타났다는 게 사울에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었던 것이다.




<David playing the harp before Saul - Rembrandt, Wikimedia Commons>


 

4.

 

사울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보자. 그게 다윗과도 관련이 있으니 말이다. 사울은 자기 운명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결국은 자기가 실패할 걸 그는 알았을까? 텍스트에 의하면 그는 알고 있었다. 사무엘이 오해의 여지없이 확실히 선언했으니 말이다.

 

“임금님[사울]이 야훼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야훼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사무엘상 15:23).

 

“나는 함께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임금님[사울]께서 야훼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야훼께서도 이미 임금님을 버리셔서 임금님이 더 이상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있을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15:26).

 

“야훼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이 옷자락처럼 찢어서 임금님[사울]에게서 빼앗아 임금님보다 더 나은 다른 사람에게 주셨습니다.”(15:28).

 

궁금한 건 자기가 버림받았음을 알게 된 게 이후 사울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 하는 점이다. 사람은 자기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기에 불안하면서도 기대를 갖고 살아간다. 안 그런가? 그런데 사울은 자기 생의 결말을 미리 알았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 것이며 그게 그의 나머지 생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

 

구약성서에는 그리스 비극의 ‘운명’이라고 부를만한 게 없다. 거기서는 사람은 물론이고 신조차 비극적 운명을 거역하지 못한다. 운명은 신들의 의지도 초월한다. 하지만 구약성서에는 야훼의 의지를 초월하는 운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자연을 섭리하며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야훼라는 인격신이다. 야훼의 의지는 비극적이지도 않고 미리 정해져 있지도 않다. 운명과는 다르단 얘기다. 야훼가 인격신이란 말은 사람이든 자연이든 역사든 그것들과 소통하고 상호작용하는 신이란 뜻이고 그건 곧 야훼의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스 비극에서 이해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운명 앞에서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그걸 받아들여야 할 사람의 주관적인 태도다. 사람은 자기 운명을 이해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결국은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체념하며 받아들이느냐 울분을 터뜨리며 받아들이느냐 정도다. 그런데 구약성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은 야훼를 이해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의 의지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자연을 섭리하고 역사를 주관하는 야훼의 의지와 계획을 감히 사람이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거다.

 

그래서 사울은 야훼의 영이 자길 떠난 걸 알았지만 그걸 운명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무엘의 말을 안 믿은 건 아니다. ‘무슨 소리야? 야훼가 나를 버렸다고? 그럴 리 있나…. 내가 무슨 대단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렇게 생각하진 않았다는 얘기다. 우리는 사울에게서 두 가지 모습을 다 본다.

 

사울은 자기가 야훼의 버림을 받고 다윗이 대신 왕위에 오를 것을 알았다.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한 적도 있다. 굴속에 숨어있던 다윗이 뒤를 보러 그리로 들어온 사울을 죽이지 않고 옷자락만 자르고 살려준 후에 그걸 생색내듯 말하자 사울이 이렇게 말했다. “나도 분명히 안다. 너는 틀림없이 왕이 될 것이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서 굳게 설 것이다.”(사무엘상 24:20). 하지만 사울은 왕위를 다윗에게 순순히 넘겨주지는 않았다. 그것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고 믿지 않았으니까. 그는 야훼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을까? 야훼가 자신을 선택할 걸 ‘후회’했듯이 다윗을 선택할 것도 ‘후회’할 걸 기대했을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확실한 사실은 그를 포함해서 누구도 그리스 비극의 ‘운명’ 같은 걸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

 

독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또 다른 사실은 텍스트가 사울과 다윗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거다. 야훼가 사람을 선택하고 버리는 기준도 도덕과는 별 상관없다. 사울이 버려진 것이나 다윗이 선택된 것이 그렇다. 다윗의 도덕성은 얘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살펴보겠다.

 

구약성서가 그리스 비극과 다른 점은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거다. 인생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매순간 사람이 내리는 결단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신앙과 불신앙의 결단에는 반드시 결과가 뒤따른다. 야훼의 섭리도 사람이 내리는 결단의 의미와 중요성을 희석하지 못한다. 구약성서에는 불변하는 것은 없다. 사람도 변하고 역사도 변하고 자연도 변하며 심지어 야훼도 변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하니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정된 철칙이란 것도 없다. 구약성서에는 거스를 수 없고 미리 결정된 ‘운명’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울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 중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을 가장 닮았다. 물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과 딱 일치하진 않지만 야훼에게 버림받은 게 그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야훼의 ‘후회’ 때문이란 점에서 그는 비극의 주인공을 닮았다. 그래서 실패의 책임을 사울에게만 묻는 건 정당하지 않아 보인다. 자기가 버림받았음을 알았지만 사울이 여전히 다윗을 죽이려 했던 건 버림받은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게 변경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일 거다. 그런 점에서 그의 생각은 지극히 구약성서적이다. 결과적으로 야훼의 결정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5.

 

다윗은 어땠나? 야훼가 왜 다윗을 선택했는지, 그에게 무슨 미덕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른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야훼의 선택은 다윗의 미덕과는 무관하다. 그저 다윗이 야훼의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다윗은 야훼의 후회를 정당화하기 위한 존재처럼 보인다. 야훼가 사울을 선택한 건 일종의 ‘실수’였고 그래서 그걸 ‘후회’했는데 그 실수를 만회하게 하는 자가 바로 다윗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니 그의 행위는 옳아야 했고 야훼의 맘에 들어야 했다. 다윗의 행위는 옳기 때문에 옳았던 게 아니라 다윗이 했기에 옳았다는 얘기다. 이 대목에서 분노하거나 고개를 가로저을 독자가 있겠지만 텍스트에는 이렇게 생각할만한 근거가 있다. 유일한 예외는 밧세바와의 불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다.

 

야훼가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다윗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그의 생을 어떻게 바꿨는지가 궁금하다. 다윗은 젊은 나이에 자기가 왕으로 선택됐음을 알았다. 사무엘이 직접 자기에게 와서 기름을 부었으니 그걸 몰랐을 리 없다. 이는 사울도 똑같다. 야훼가 자길 선택한 걸 사울도 알았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사울은 야훼가 자길 버렸다는 사실을 그런 결정이 내려진 다음에 알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선례 덕분에 그 전에 알았을 거란 점이다. 다윗은 자신에 대한 선택이 사울의 경우처럼 번복될 수 있음을 알았을 것이고 그걸 활용했다. 물론 야훼의 결정이 번복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다윗은 야훼의 선택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알았다. 야훼의 영이 그에게 머물러 있었지만 그는 영에 사로잡히거나 짓눌리지 않았다. 그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미친 척 한 일이 이 점을 보여준다(사무엘상 21:10-15).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가드 왕 아기스에게 몸을 의탁하러 갔을 때 그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경계하자 그는 아기스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미친 척했다.

 

“그들에게 잡혀 있는 동안 그[다윗]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여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글자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였다. 그러자 아기스가 신하들에게 소리쳤다. ‘아니, 미친 녀석이 아니냐? 왜 저런 자를 나에게 끌어 왔느냐? 나에게 미치광이가 부족해서 저런 자까지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왕궁에 저런 자까지 들어와 있어야 하느냐?’”(13-15절).

 

그의 미친 척이 얼마나 진짜 같았으면 아기스가 감쪽같이 속았을까. 그는 멀쩡한 정신으로 미친 척했다. 이것도 ‘야훼의 영’ 덕이었을까? 그렇다고 할 수도,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앞으로 더 살펴보겠지만 다윗에게는 당시의 시대적 관습과 신학을 뛰어넘어 거침없는 자유롭게 행동한 면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야훼를 닮았다. 그래서 야훼가 그를 그토록 좋아했나?

 

반면 사울은 영에 사로잡혀 있었다. 영의 포로가 되어 있었던 거다. 그는 영에 사로잡혀서 다윗을 죽이려 했다. 다윗에 대한 그의 태도가 조변석개(朝變夕改)한 것도 그의 영혼이 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광기를 자유롭게 지배했던 다윗은 확연히 대조된다. 사울은 영의 지배를 받았고 거기 사로잡혀 있었던 데 반해 다윗은 그걸 활용하고 지배했던 거다. ‘지배’했다는 말이 지나치다면 ‘활용’이란 말로 바꿔도 좋겠다.

 

물론 이런 행동은 영이 그에게 머물렀기에 가능했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게다. 이런 다윗과 야훼가 사랑에 빠진 것도 이해할만하다. 안 그런가? 야훼는 스스로 자유로운 신이었으니 이렇게 자유를 누리고 활용할 줄 아는 다윗이 얼마나 사랑스러웠겠는가. 영을 두려워하고 속박으로 느낀 사울에게는 영의 존재가 비극적 ‘운명’이었지만, 서퍼(surfer)가 능수능란하게 파도를 타듯 야훼의 영의 물결에 올라타 활용할 줄 알았던 다윗에게는 그게 ‘섭리’가 아니었을까? 둘 사이의 승부는 자기에게 머물러 있는 야훼의 영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었던 게 아닐까?

 

마지막으로 비극적인 생을 살았던 사울을 위해 한 마디 말하고 싶다. 그가 야훼의 버림을 받은 원인이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은 여러 번 반복해서 얘기했다. 하지만 왜 그가 버림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말을 아껴왔다. 왜 그는 야훼에게 버림받았을까? 혹시 야훼를 왕으로 섬기지 않고 다른 족속들처럼 왕을 세워 달라고 졸랐던 백성에 대한 심판으로 야훼가 그를 버린 게 아닐까?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을 달라고 소리 높여 외쳤을 때 야훼는 “그들[이스라엘 백성]이 너[사무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야훼]를 버려서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사무엘상 8:7)라면서 백성들 말을 들어주라고 했다. 야훼가 백성들의 주장에 동의해서 들어준 게 아니다. 내키진 않았지만 허용했던 거다. 그러나 야훼는 그들 선택이 잘못됐음을 어떤 식으로든 알려주고 싶었을 게다. 그래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야훼는 사울을 실패하게 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얼마나 뼈저린지 알려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되면 사울은 야훼를 제쳐두고 왕을 달라고 했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희생양이 된다. 다윗은 이런 야훼의 ‘후회’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흠 없는 훌륭한 왕이어야 했다. 적지 않은 그의 흠결이 부각되지 않고 슬며시 덮인 이유가 여기 있다는 거다. 어떤가? 그럴듯하지 않나?

 

물론 이건 추측에 불과하다. 어차피 텍스트가 답을 주지 않으니 추측할 수밖에 없다. 질문은 있는데 답이 없으니 답답하긴 하고, 그러니 어떻게든 추측하는 수밖에 없다. 명색이 다윗 이야기를 꼼꼼히 읽겠다고 다짐한 독자이니 이 정도 해석의 자유는 누릴 자격이 있다고 본다. 안 그런가?

다음 장에선 다윗이 사울의 수하에 있으면서 둘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을 살펴보겠다.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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