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3)
부자는 누가 부자야?
“어린 친구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란 참으로 어렵구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마가복음 10:17-30).
젊은이는 슬픔에 잠겨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풀이 죽어 떠나갔다.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겉으로는 전보다 더 경건해지고 신심이 돈독해지고 기도를 더 많이 하고자 힘쓰며 정직하고 의롭고 곧은 사람으로 처신하고자 애썼다. 성전에 가고 헌금을 많이 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사도 많이 하여 참으로 경건한 인물로 흠모 받았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기분은 떨치지 못하였다. 만사가 전과 다르고 다 허전하였다. 자기가 왜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는지, 왜 지금도 이처럼 마음이 무거운지 알 길이 없었다. 몇 달 뒤 드디어 예수께서 혼자 계시는 틈을 타서 다시 한 번 찾아갔다. “주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저는 비겁한 사람입니다. 제 재산이 그대로 있습니다만 이미 제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 양도 증서가 있습니다. ‘나의 전 재산을 빈민들에게 기증함.’ 받아 주십시오….”
<Christ And The Rich Young Ruler - Heinrich Hofmann , Wikimedia Commons>
성서학자 마르띠니 추기경이 상상해 본 오늘 복음의 뒷 이야기이다(마르띠니, 《마태오복음》 60-75면 참조). 역시 해피엔드가 좋다.
우리는 세상 물정을 알기에 저 청년처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우리 질문은 그저 “선하신 선생님, 저처럼 선한 사람이 세상에서 삼박자 축복도 받고 죽어서 영원한 생명도 물려받으려면(꿩 먹고 알 먹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에서 그친다. 성서와 교리서와 교회 사회 문서에 나오는 뻔할 뻔자 대답을 듣는다는 것도 잘 안다.
요즘 부부들이 결혼 전에 작성한 각서에 따라 선을 긋고 산다는데, 우리도 세례 후 몇 해만 지나면 어느새 적당히 선을 긋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좋아요 주님, 주일미사 다니지요. 교무금과 헌금도 하지요. 시간 여유 나면 신심회 활동도 하지요. 다만 그 이상은 간섭하지 맙시다. 세무 공무원들 충분히 이해가 가고 남습니다. 재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백화점 고객 명단, 그 정도는 써야 사람 대접받습니다. 주님은 세상 물정을 모르셔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잘라 말씀하셨지만, 하느님 계시고 돈이 있으니 세상에 안 되는 일없더군요. 우리 서로 마음에 부담을 주지 마십시다. 이 점은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글쎄요, 부자가 천당 가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씀 같은데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유복한 중산층에 불과하지요. 땅과 상가와 주식이 좀 있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제가 부자는 무슨 부잡니까? 주님의 것을 관리하는, 마음이 가난한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대가 정말 마음으로는 가난한 청지기인지 인색한 부자인지 알고 싶은가? 그러면 주님의 입에서 “네가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라!”라는 말씀을 듣는다고 상상해 보시라! “주님, 저도 줄만큼 주고 나눌 만큼 나누었습니다! 그 이상 어쩌자는 것입니까?”라고 당당히 대꾸하게 되리라.
같은 말을 강론 시간에 본당 신부의 입에서 듣는다고 하자. “듣자듣자 하니 별 미친 소리 다 듣겠네!”라는 욕지기가 우리 목구멍까지 올라오리라. 같은 말을 시민운동가의 구호에서 듣는다고 하자! 당장 “저 빨갱이 새끼들 때려죽여라!”는 고함이 우리 입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오리라.
성염/전 교황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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