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5)
빵을 주랴, 자유를 주랴?
“여러분이 나를 찾는 것은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6:24-35).
16세기 스페인의 세빌랴 라는 도시에 예수가 나타나셨다. 종교 재판과 마녀 사냥이 판치던 그 곳, 철저한 가난을 부르짖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아, 국왕과 성직계의 미움을 받던 개혁가가 날마다 광장에서 불타 죽던 도시에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그곳 추기경은 당장 예수를 체포하여 지하 감방에 가두고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따진다. 도스또옙스키의 《카라마죠프가의 아들들》에 나오는 유명한 ‘대심문관’ 장면이다.
세빌랴의 추기경이 예수를 설득하는 교리는 이것이다. “자유와 지상의 빵과는 어떠한 인간에게나 양립할 수 없소. 자기네들끼리 그것을 공평하게 분배할 수는 도저히 없기 때문에. 또 그들은 너무도 무력하고 너무도 사악할 뿐만 아니라 한푼의 가치도 없는 반역자들이기 때문에 절대로 자유를 누릴 수 없소.”
“빵을 주랴? 자유를 주랴?”
“먼저 먹을 것을 주시오, 그리고 나서 착한 행동을 요구하시오! 자유가 밥 먹여 주지 않습디다.” 그래서 지난 40년간 이 땅에는 빵의 이름으로, 경제개발과 공업화, 수출경쟁과 개방시대와 국제 경쟁력의 이름으로 온갖 독재가 판을 치고 자유가 유린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요한복음의 말씀 역시 빵과 자유의 논리를 토대로 한다. 빵의 기적에 놀라 몰려온 군중을 상대로 예수께서 꾸준히 설득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 길입니까?”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분(=예언자)을 여러분이 믿는 것, 이것이 곧 하느님의 일이다.”
과연 하느님께서 파견하시는 사람, 예언자란 누구인가? 예언자란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다. 꿈을 꾼 이는 파라오였지만 일곱 해의 대흉년이 온다는 징조로 풀이한 이는 예언자 요셉이었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잔치 때 벽에 글씨를 쓴 것은 난데없이 나타난 손가락이었지만 그 뜻을 풀어 준 이는 예언자 다니엘이었다.
자본이 위협하는 세상에서도 교회는 빵과 자유는 양립할 수 있다고 가르쳐야 한다. 빵은 강자와 부자가 독차지하고 가난한 노동자는 그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주워 먹어야 한다는 식으로 교회가 행동해서는 안 된다. 거짓으로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정권에게 그것은 허위라고 소리쳐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둔 채 남북대화를 하는 일은 위선이라는 사실을 종교인은 지적해야 한다.
그런데… 그 엄혹한 시절, 저 파업 노동자들, 대학생들은 왜 걸핏하면 명동으로 모였던가? 무엇을 기대하고 명동으로 올라갔던가? “예언자”를 보러 왔었다. 하지만 요즘 그 언덕에서 그네들은 “비단옷 입은 사람”이 부려먹는 제관만 보는 것 같다. 하느님과 맘몬 사이에 끼어 난처해하는 제관의 말이 서러운 사람들 귀에는 이렇게 들릴지도 모른다.
“여기는 왕의 성소요 왕실 성전이다. 여기는 힘있고 돈 있고 변변한 선남선녀들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성소이지 너희들이 몸을 피하라고 세워진 치외법권 지역이 아니다. 당장 여기를 나가거라!”(아모스 7:12-13 참조).
무슨 소리를 들으려 서울의 신도들은 수년 간 돈을 모아 ‘평화’의 방송과 신문을 만들었던가? ‘진리를 빛으로 하여, 정의를 목표로 하여, 사랑을 원동력으로 하여 참 언론을 펴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쩌다 지금은 ‘평화’의 소리가 당국의 발표 위에서, 학생과 노동자에 대한 이념적 증오를 깔고 내는 쇳소리처럼 들릴까? 아아, 빵과 자유가 양립하느냐 못하느냐가 예수와 대심문관을 구별하는 잣대이거늘….
성염/전 교황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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