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이야기(7)
광야에서의 다윗(1)
1.
구약성서를 읽다 보면 누구나 읽기 싫은 대목이 있다. 레위기가 전하는 제사의 구체적인 방법과 제사장이 갖춰야 할 조건들이 대표적이다. 마음 단단히 먹고 구약성서를 통독하려던 사람도 거기에 이르면 지겨워서 중단하려는 유혹이 빠진다. 정녕 레위기는 구약성서라는 바다에 우뚝 솟은 암초 같은 책이다.
그에 못지않은 암초가 지명(地名, place name)이다. 구약성서의 대부분의 지명들은 익숙하지 않고 발음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그런 지명들이 등장하는 대목은 세심히 읽지 않고 대충 지나가기 일쑤다. 안 그런가? 구약성서 독자들 중 익숙지 않은 지명을 만나면 그게 어딘지 확인하려겠다고 지도를 찾아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열 명에 한 명도 안 될 거다.
그런데 지명이 중요한 경우가 종종 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거기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좌우간 이 때문에 지명에 주목한 학자들이 있어왔는데 고고학자들이 대표적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사무엘상 18장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골리앗의 고향은 ‘가드’(Gath, 현재 지명은 텔 에스-사피 Tel es-Safi)다(“블레셋 진에서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는 장수가 싸움을 걸려고 나섰다.”[사무엘상 18:4]). 이 ‘가드’란 곳은 훗날 다윗에 사울에게 쫓길 때 몸을 의탁한 곳이기도 하다. 다윗은 가드의 왕 아기스에게 도망쳐서 그의 봉신(封臣) 또는 용병(傭兵) 노릇을 했다.(“다윗이 혼자서 생각하였다. ‘이제 이러다가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을 것이다. 살아나는 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망명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사울이 다시 나를 찾으려고 이스라엘의 온 땅을 뒤지다가 포기할 것이며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일어나서 자기를 따르는 부하 육백 명을 거느리고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넘어갔다. 그리하여 다윗은 가드에 있는 아기스에게로 가서 거처를 정하였다.”[사무엘상 27:1-3]).
보다시피 가드는 블레셋의 도시다. 블레셋 사람이 누군지, 언제 어떻게 가나안에 자리 잡았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펠레셋’(Peleset)이란 이름으로 그들이 등장하는 자료는 기원전 12-11세기 이집트 문서이다. 람세스 3세(Rameses III, 기원전 1182-1151) 시대 문서에 의하면 펠레셋 집단과 그 외의 다른 집단이 육로와 해로로 이집트에 쳐들어왔는데 이집트 군이 그들을 물리쳤다고 한다. 또한 람세스 4세(기원전 1151-1145) 시대 문서는 이들이 패배한 후 이집트 요새에 정착했다고 전한다(Israel Finkelstein & Neil Asher Silverman, David and Solomon: In Search of the Bible’s Sacred Kings and the Roots of the Western Tradition [New York: Free Press, 2006], 189-190). 학자들은 이집트와 가나안 남부 해안지역에 정착한 호전적인 이민자들인 ‘펠레셋’이 ‘블레셋인’과 동일한 집단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니까 블레셋은 기원전 12세기 즈음에 어딘가로부터 이집트와 가나안으로 들어와 무력으로 정착한 해양족속들 중 하나라는 거다.
이들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여러 개의 도시국가를 세웠는데 가자(Gaza), 아쉬클론(Ashkelon), 가드(Gath), 아쉬돗(Ashdod), 에크론(Ekron) 등 다섯 도시가 대표적이다. 가드는 이 가운데 유다에 가장 인접한 곳에 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쳤을 때 가드를 택한 이유가 여기 있을 게다. 동향사람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아기스가 받아들인 게 이상한데 이에 대해선 아래서 얘기하겠다.
아기스는 처음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다윗에 그 앞에서 미친 척한 얘기는 앞에서 잠깐 했다(사무엘상 21:10-15). 나중엔 그를 받아줘서 시글락이란 고을을 맡겼지만 말이다(사무엘상 27:2-6). 블레셋과 사울이 전투를 벌일 때 다윗을 전장에 내보내지 않고 돌려보낸 사람도 아기스였다(사무엘상 29:6-11).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다윗은 그 덕분에 ‘동족’을 죽여야 하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듯 다윗이 아기스와 얽힌 얘기들이 역사적 사실인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거기에 눈에 띠는 모순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은 여기서 다른 결론을 도출한다. 고대 도시 에크론으로 확인된 텔 미크네(Tel Miqne)를 1996년에 발굴한 결과 거기서 기원전 7세기 후반의 것으로 여겨지는 비문을 발견했는데 그에 따르면 당시 에크론 왕은 이카우수(Ikausu)였단다. 그는 앗시리아 왕 에살하돈(Esarhaddon)과 아수르바니팔(Ahurnamipal) 시대의 기록에도 등장하는 가나안 도시국가의 왕으로 아시라아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이카우수라는 이름이 언어학적으로 아기스(Achish)와 비슷하기 때문에 둘을 동인인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문제는 그가 가드가 아니라 에크론의 왕이고 다윗 시대인 기원전 10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7세기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둘을 동일인물로 보지 않으면 될 걸 왜 꼭 그래야 하나?’라며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이 있을 게다. 그럴 수 있다. 옳은 추정일 수 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사람 이름이 그 정도로 유사하면 동인인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들이 현재 ‘텔 에스-사피’인 가드를 발굴한 결과 그곳은 기원전 9세기 말에 대대적으로 파괴됐고 이후로는 재건되지 않고 소규모 마을로 남았다고 한다. 다윗 이야기의 저자는 오랫동안 큰 도시였던 에크론 왕 아기스(=이카우수)를 블레셋의 대표적인 왕으로 여겨서 그를 가드의 왕으로 착각(?)해서 다윗과 엮었다는 거다.
고고학에 조예가 깊지 않은 필자는 이 논리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판단할 수 없지만 좌우간 이런 논증을 통해서 다윗 이야기의 기록 시기를 기원전 7세기로 보는 고고학자들이 있다는 점만 지적해 둔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다윗 이야기에 등장하는 지명들은 대부분이 기원전 7세기에 의미를 갖는 지명들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고고학자들은 유적이나 유물을 연구해서 성서 얘기가 어느 때 상황에 맞는지, 그게 기록된 때가 언젠지 밝혀내려 애쓴다. 과거에는 연대 측정도구가 시원치 않아서 연대 추정이 무척 부정확했지만 요즘은 그게 매우 발달해서 연대측정이 상당히 정확하다고 한다. 물론 고고학적 성과를 맹신하는 것은 성서기록 그대로를 역사적 사실로 맹신하는 것 못지않게 일방적인 태도가 되겠다. 물론 고고학 비전문가의 견해이긴 하지만 말이다.
2.
지명이 나오면 골치 아프다고 해놓고 지명에 대한 얘기를 길게 했다.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도망친 다음에 다양한 지명들이 등장해서 그랬다. 재미는 없겠지만 지명과 관한 얘기를 하나만 더 해보자.
다윗은 전쟁에 나가면 백전백승이었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특히 그랬다. 이 점은 그가 왕 되기 전과 후가 다르지 않다. 그가 전쟁에 나가서 패한 적이 있었나? 한 번도 없었다. 다윗은 전쟁기계 같았다. 그런데 다윗의 전쟁 얘기를 잘 읽어보면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로, 다윗의 전쟁 이야기에는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전쟁했는지가 구체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사무엘상 18장 6절 이하를 보자. 다윗이 사울에게 장군으로 임명된 후 벌인 첫 전쟁이 블레셋과의 전쟁이었다. 거기서 승리하자 여인들이 소구와 꽹과리를 들고 나와서 문제의 노래,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는 노래를 불렀다는 바로 그 전쟁 말이다. 설화자는 이 전쟁을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고 군인들과 함께 돌아올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소구와 꽹과리를 들고 나와서 노래하고 춤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사울 왕을 환영하였다.”(사무엘상 18:6)고 모호하게 보고한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언제 어디서 전쟁을 했는지는 일언반구 말하지 않는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 양피 2백 개를 가져와서 미갈과 결혼하게 된 전쟁도 마찬가지다. 설화자는 그저 “[다윗은] 왕의 사위가 되려고 자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블레셋 남자 이백 명을 쳐 죽이고 그들의 포피를 가져다가 요구한 수대로 왕에게 바쳤다.”(사무엘상 18:27)라고만 전한다. 언제 어디서 전투가 벌어졌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거다. 둘 사이의 전쟁을 요약해서 전하는 사무엘상 18장 30절도 예외가 아니다. “그 무렵에 블레셋 지휘관들이 군대를 이끌고 침입해 와서 싸움을 걸곤 하였는데 그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장군들보다 더 큰 전과를 올렸기 때문에 다윗은 아주 큰 명성을 얻었다.” ‘그 무렵’이 언제인지, 전투가 어디서 벌어졌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는 여기에도 없다. 과연 전쟁을 하긴 했던 걸까? 전쟁을 했고 승리했다면 그 성과를 알리기 위해서라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싶었을 텐데 왜 이렇게 모호하게 서술했을까? 조얼 베이든(Joel Baden)은 이 점에 주목해서 다윗과 블레셋의 전쟁 얘기는 모두 픽션이라고 주장한다(Joel Baden, The Historical David: The Real Life of an Invented Hero, 50-61). 그렇다고 그게 전부 픽션이란 주장을 지나쳐 보이지만 다윗의 전쟁 이야기에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또 이상한 점은, 다윗이 블레셋과 싸워서 백전백승했다는데 이스라엘 영토의 크기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윗 시대로부터 3백 년쯤 지난 히스기야 왕 때에도 유다와 블레셋은 여전히 같은 곳을 두고 전쟁을 벌였다. 이 얘길 자세히 하면 지루해지므로 더 얘기하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다윗의 승리가 무척 과장되게 서술돼있다는 거다. 블레셋에 대한 다윗의 승리는 영토를 넓히는 전투가 아니라 기존 영토를 지키려는 수비전투였다. 물론 그것도 이스라엘에게는 작은 승리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울과 다윗 시대 가나안은 도시국가 체제였다. 훗날 다윗에 의해 유다도 이스라엘과 하나가 됐지만 그 전까진 유다와 이스라엘은 별개의 단위였다. 지리적으론 유다가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의 완충지대였다. 사울은 모압, 암몬, 블레셋, 아말렉 등과 전쟁을 벌였지만 어떤 족속도 완전히 제압하진 못했다. 그들은 적대하며 공존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위협적인 족속이 블레셋이었는데 그들은 전차를 이용해서 전쟁을 했으므로 산악지대에 자리 잡고 있던 이스라엘이 유리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대해선 천혜의 지대에 있었던 거다. 둘 사이의 전쟁에서 한 편이 완전히 승리하거나 패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했다. 그건 역사적 사실이다. 따라서 다윗이 블레셋과 벌인 전쟁 이야기를 픽션으로 보는 견해는 옳지 않다. 그 배후에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물론 다윗을 높이고 사울을 낮추려는 의도에서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말이다.
3.
사울이 자길 죽이려 한다는 걸 알게 되자 다윗은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윗과 요나단도 헤어져야 했다. 이들이 헤어지는 애틋한 장면이 사무엘상 20장 마지막 부분에 전해진다. “다윗이 그 숨어 있던 바위 곁에서 일어나 얼굴을 땅에 대면서 세 번 큰 절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끌어안고 함께 울었는데 다윗이 더 서럽게 울었다. 그러자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잘 가게. 우리가 서로 야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잊지 않도록 하세. 야훼께서 나와 자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나의 자손과 자네의 자손 사이에서도 길이길이 그 증인이 되실 걸세.’”(41-42절).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지는 건 시대를 초월해서 참으로 안타깝다.
이로써 사울 궁전 안에서 제한적으로 벌어졌던 둘의 갈등은 세상에 공개됐다. 사무엘상 21장에서 31장, 곧 다윗이 도망쳤던 때부터 사울이 죽었던 때까지 둘은 쫓고 쫓기는 사이가 된 거다. 다윗은 급기야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으로 쫓겨 갔다.
사울에게서 도망친 후 다윗이 처음으로 간 곳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있는 놉(Nob)이었다. 놉은 예루살렘 북쪽 멀지 않은 곳으로서 실로(Shiloh) 성소가 블레셋에 의해 파괴된 후 이스라엘의 주요 성소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윗이 왜 그리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일을 계기로 놉의 제사장들과 다윗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다 죽고 한 사람만 살아남지만 말이다.
놉의 제사장은 아히멜렉이었는데 그는 다윗이 오는 걸 보고 ‘떨면서’ 그를 맞았단다(사무엘상 21:1). 그는 왜 다윗을 보고 떨었을까? 그가 사울에게서 도망친 걸 알았을까? 그래서 자길 해칠지도 모른다고 여겼을까?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을 거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가 다윗을 보고 떨었던 건 다윗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그는 다윗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사울에 의해 살해당한다.
아히멜렉은 다윗이 혼자인 걸 보고 “동행자도 없이 어떻게 혼자 오셨습니까?”라고 묻는다. 그게 이상하긴 했을 거다. 사울 왕국 최고위 장군이 혼자 다니니 왜 이상하지 않았겠는가. 다윗은 그에게 거짓말을 한다. 자기가 사울에게서 비밀임무를 부여받았고 부하들을 정해진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말이다. 제사장이 그의 말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다. 거짓말인 걸 눈치 챘을 지도 모른다. 척 봐도 수상했을 테니 말이다.
다윗은 수치를 무릅쓰고 아히멜렉에게 빵 다섯 덩이를 청한다. 그게 없다면 있는 것만이라도 달라고 했다. 빵이 얼마나 큰진 몰라도, 다윗의 부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빵 다섯 덩이는 그들 전부가 먹기엔 턱없이 모자랄 터이다. 하지만 아히멜렉은 다윗의 얘기가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빵은 ‘거룩한 빵’ 뿐이라면서 다윗 수하의 젊은이들이 금기를 지켰다면 그걸 주겠다고 말한다. 설화자는 친절하게 ‘거룩한 빵’이란 “야훼 앞에 차려놓은 빵”으로서 “새로 만든 뜨거운 빵을 차려놓으면서 야훼 앞에서 물려낸 것”이라고 설명한다(6절). 그러니까 ‘거룩한 빵’이란 야훼에게 드려졌다가 시간이 경과해서 물려진 빵이란 얘기다. 이에 다윗은 자기 젊은이들은 모두 금기를 지켰다고 말한다. 다윗은 누가 의심할까봐 두려워하듯 자기들은 출정하기 이삼일 전부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고 “비록 이번 출정이 보통의 사명을 띤 길이기는 하지만 제가 출정할 때에 이미 부하들의 몸은 정결했습니다. 그러니 오늘쯤은 그들의 몸이 얼마나 더 정결하겠습니까?”라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한다(5절). 음식을 먹고 말겠다는 의지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그런데 거짓말하기로는 아히멜렉도 다윗 못지않다. 그는 ‘거룩한 빵’ 외에는 먹을 게 없다고 말했는데 그게 사실이었을까? 다음 장을 보면 놉에는 “모시옷을 입은 제사장만 해도 여든다섯 명이나” 있었는데(22:18) 빵 다섯 덩이가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다윗이 놉에 왔던 그 때 공교롭게도 마을 전체에 먹을 게 아무 것도 없었을 수 있을까? 여러분은 그게 믿어지나? 다윗도 믿지 않았을 터이다.
게다가 ‘거룩한 빵’을 다윗에게 먹으라고 준 아히멜렉의 행위도 이해할 수 없다.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율을 어겼기 때문이다. 레위기 2장에는 야훼께 곡식제물을 바치는 규정이 적혀있다. 거기 따르면 곡식 제물로 바치고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아들들의 몫이다. 이것은 나 야훼에게 살라 바치는 제물에서 온 것이므로 가장 거룩한 것이다.”(3절). 그것은 오직 제사장만 먹을 수 있었다. 따라서 다윗과 그의 병사들이 여자를 가까이 했든 않았든 제사장이 아니므로 그걸 먹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아히멜렉의 질문은 뭔가? 레위기 규정을 무시하고 새 계명을 만들었나? 좌우간 그는 ‘거룩한 빵’을 다윗에게 줬다.
한편 다윗을 못 잡아 안달난 사울은 신하들에게 호통을 쳤다. 다윗이 어디 있는지 귀띔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이다. 그러자 에돔 사람 도엑이란 자가 나서서 다윗이 놉에서 아히멜렉과 만나는 걸 봤다고 일러바쳤다(사무엘상 21:7). 도엑이 놉에서 우연히 다윗이 아히멜렉과 만나는 걸 봤다는 거다. 도엑은 “그 때에 아히멜렉이 다윗이 해야 할 일을 야훼께 여쭈어 보고 나서 그에게 먹을 것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었습니다.”(22:10)라고 사울에게 보고하는데 정작 21장에는 아히멜렉이 다윗이 할 일을 야훼께 여쭤봤다는 얘긴 없다. 아히멜렉이 다윗의 할 일에 대해 야훼에게 신탁을 받아 전해줬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아히멜렉과 다윗의 관계는 빵을 건네준 거보다 더 친밀한 동맹관계로 보는 게 맞겠다.
사울은 도엑의 말을 듣고 아히멜렉은 물론이고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모두 불러들여 심문했다. “네가 왜 이새의 아들과 함께 공모하여 나에게 맞서려고 하였느냐? 네가 왜 그에게 빵과 칼을 주고 왜 그가 하여야 할 일을 하느님께 물어서 그가 오늘날과 같이 일어나서 나를 죽이려고 매복하도록 하였느냐?”(13절). 도엑이 한 말 때문에 아히멜렉과 그 집안 제사장들은 모두 다윗의 ‘공모자’가 됐다. 아히멜렉은 사울과 다윗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제사장이 하느님의 신탁을 구하는 게 얼마나 당연한 일인지 얘기하면서 무죄를 주장했지만 사울은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고 다윗이 도망치는 줄 알면서도 그걸 자기에게 알리지 않았다면서 아히멜렉과 그 집안의 제사장들을 모두 죽였다(19절). 과거 사울은 ‘헤렘의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야훼의 미움을 샀는데 그걸 만회하려는 의도였을까, 뒤늦게 엉뚱한 사람들에게 그 법을 적용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무슨 수를 썼는지 다윗에게 도망쳤단다. 그에게서 소식을 들은 다윗은 “그 날 내가 에돔 사람 도엑을 거기에서 보고서 그가 틀림없이 사울에게 고자질하겠다는 것을 그 때에 이미 짐작하였소. 제사장의 집안이 몰살당한 것은 바로 내가 책임져야 하오.”(22절)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그럴 줄 알았는데 방치했다고? 이게 무슨 말인가? 왜 알면서도 도엑을 방치했나 말이다. 의도적으로 아히멜렉의 죽음을 방치했단 말인가? 자기를 도와준 그를 대체 왜? 아히멜렉을 통해서 받은 야훼의 신탁이 맘에 안 들었나? 아무리 따져 봐도 다윗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다윗이 의중에 품고 있던 말을 전한 설화자의 의도도 이해할 수 없긴 마찬가지다. 가급적 다윗 편을 들어온 그였으니 말이다. 좌우간 다윗은 아비아달을 받아들였다. 둘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공동운명체가 됐으니 함께 지내자는 거였다. 아비아달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훗날 사독과 함께 다윗 왕실 대제사장이 됐다가 솔로몬에 의해 숙청당한다.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치면서 최초로 겪은 이 사건은 앞으로 그가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예시한다. 우선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서 속임수를 써야 할 때는 서슴지 않고 속임수를 썼다. “거짓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엔 그의 상황이 너무도 급박했었던지 모른다. 그에겐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계명을 지키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 같다. 둘째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히멜렉에게 했던 말, 곧 부하들과 같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무리’를 이뤘다. 그토록 열악한 상황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무리를 이뤘기 때문이다. 셋째로, 피신기간 중 그에겐 친구와 적의 구별이 모호해졌다. 그는 생존을 위해선 유다인의 정체성을 버릴 준비가 돼있었다. 동족이냐 아니냐 보다는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은 친구요 해치려는 사람은 적으로 여기게 됐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 때문에 그는 훗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왕이 되지만 말이다.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 다윗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야에서의 다윗(3) (1) | 2015.09.03 |
---|---|
광야에서의 다윗(2) (0) | 2015.09.01 |
다윗,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해야 했다 (0) | 2015.08.09 |
엇갈리는 운명 (0) | 2015.08.02 |
누가 골리앗을 죽였을까? (4) | 2015.07.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