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9)
온유한 자가 차지하는 땅
- 전집 4권 『성서 연구』 「산상수훈」 편 2 -
결국엔 웃었다. 하지만 순간적이나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 걸 보니 마음 한 구석에 ‘교만함’이 자리 잡고 있었나보다. 그래도 감정을 추스른 건 잘한 일이었다. 지난 학기말의 일이다. 처음 가본 작은 사학 공간은 그야말로 ‘어이없는 갑질’의 향연이었다. 대학 강사료가 워낙 낮게 책정되어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갑’이었다. 그래도 아이들만 예쁘다면 나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교수’의 역할이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자신의 전공 안에서 얻은 깨달음을, ‘프로페스(profess)’하는 직업이니까. 어느 강단이든, 어떤 대우를 받든, 나는 내 소리를 하면 되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초등학생도 아니고, 여러 가지 말도 안 되는 행정적인 ‘의무사항’들을 빌미로 교무처로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더니 급기야 학기말 성적처리를 두고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진 거다. 도대체 출석점수를 후하게 주겠다는 교수에게, 학교가 정한 방식으로 일괄적으로 점수를 깎아서 다시 평가해오라고 언성을 높였다. 미리 공지라도 하지, 이게 원칙이라는 데 미칠 노릇이었다. 이미 상대평가로 그레이딩까지 다 마친 작업인데…. 융통성 제로에 소통은 불가했다. 무엇보다 태도가 아주 불쾌했다. 내가 합리적 질문을 하면 말끝마다 “자꾸 이러시면 다음 학기 강의 못 받으세요.”가 답으로 돌아왔다.
이쯤 되자 한 학기 내내 참았던 나의 인내심이 위험수위에 다다르고 말았다. 내가 그 학교에 고용된 ‘가신(家臣)’도 아니고 수시로 전화를 해서 어디냐고 묻는 무례함과, 그 어디든 한 시간 안에 당장 달려오라는 어이없음을, 다 참아 넘겼는데 결국은 이렇게 터지는구나! 화내기 직전 스스로에게 정당함을 부여했다. 그런데 순간, 한 학기 내내 참은 게 아까웠다. 아니, 무엇보다 주변을 둘러보니 같은 처지를 ‘당하면서도’ 절절매시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하여 요구사항대로 고치느라 나의 ‘피 같은’ 하루를 온통 다 써버렸다. 한심하다는 표정을 얼굴 한가득 하고서 그제야 허락도장을 찍으며 선심을 쓰듯 “앞으로는 시키는 대로 하세요.”라고 말하는 담당자에게 나는 될 수 있는 한 가장 온화하게 웃으며,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어머, 제가 다시 온다고 언제 그랬나요? 이제 다 된 거죠? 앞으로 다시는 저에게 전화하지 마세요~.” 규모가 작은 행정실이었기에 밝은 톤으로 던진 내 말은 그 공간을 가득 채웠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시선들이 주는 따가움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주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그렇게 ‘사람을 사람대접 아니해주는’ 낯선 공간에서의 ‘임시고용’관계를 끝냈다.
내공이 깊은 탓은 아니었다. 그 일 아니어도 먹고 살 거리가 많아서 배부른 객기를 부린 것도 아니었다. 다만,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거다.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시스템에는 굴복하지 말아라. 그러니 할 말은 해라. 그럼에도 온유해라. 온유란 비굴함이나 유약함이 아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온유한 자가 결국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김교신도 이 부분에 대해 깊은 묵상을 남겼다.
예수는 선언하신다. 강포한 자가 아니요, 온유한 자가 복스럽다고. 이에 ‘온유’라 함은 praus, 즉 온화, 유순, 겸손, 온량, 원만 등을 의미함이다. 성질이 관대하여 훼손, 경멸을 당할지라도 용이히 격노하지 않고, 초급(峭急)함이나 역기(逆氣)함이 없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에게 대하여 … 눈으로 눈을 갚고 이로써 이를 갚는다기보다 차라리 피해 수욕(受辱)한 대로 인내하기에 능한 자 특히 하늘에 불역(不逆)하는 것, 하나님이 내리신 모든 곤고, 환난을 달게 받는 성질을 칭함이다. 이런 성질을 가진 자가 복스럽고 장차 땅을 자치할 것이라 한다.
하지만 김교신도 글에서 인정하듯이 현실은 그 반대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세상의 구조가 견고하면 할수록, 온유한 자는 가지고 있던 땅도 빼앗기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자신이 그랬다. 하나님 나라, 그 넓고 광활한 ‘땅’을 선포했던 예수는, 그 땅이 지정학적 경계선을 가지는 영역인줄 알고 ‘제 땅 지키기’에 연연했던 유대의 성전엘리트들, 로마의 정치엘리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법정에서 군중에게 침 뱉음을 당했고” “그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며, 관속들은 손바닥으로 때리는”(마가복음 14: 65) 지경을 당하여서도, “군사들의 온갖 희롱을 당한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힌 때에도 지나가는 자들이 기롱(欺弄)하여 마지않았던” 그 순간에도 예수는 어린 양처럼 온유했다.
그러나 할 말은 하셨다. “그것은 너의 말이다.” “내 나라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그 예수는 자신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를 믿는 자들 모두가 온유하기를 권했고 온유한 이들을 축복했다. 복되어라, 너 온유한 자여. 타협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으며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그러나 가장 부드럽고 온화하게 평안한 얼굴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를 꿋꿋하게 살아내는 너, 온유한 자여! 너는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이게 어찌 가능한가? 김교신은 온유한 자가 하나님을 향해 가진 ‘신뢰’에서 그 답을 찾았다.
오히려 저에게 영웅적 기개가 있었으므로 그처럼 온유한 것이었다. … 사람과 사회를 대하여 온유한 자의 그 온유의 깊은 곳에는 ‘공의로 심판하는 자에게 부탁하는’ 신뢰가 있다. 예수의 경우가 그것이었고 욥의 순종이 또한 거기서 발원한 것이었다. … 그리스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주장하신다. 악자의 난폭에 대항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를 호위로 하라. 이랑이 포악하다고 양조차 포악할 것이 아니라 양은 양대로 온유하여 ‘그 생명의 안전은 다만 목자에게 대망(待望)하라.’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방도는 “나를 주의 날개 아래 덮이게”(시편 17:8) 하는 것뿐이다. 그리할 때에 우리들은 소원의 십배, 백배하여 설치(雪恥)도 하고 “권위 있는 자를 그 지위에서 내리치시고 온유한 자를 올리시는 자”(시편 113:6-9, 욥기 5:11, 누가복음 1:52)에 의하여 “장인들이 버린 돌인데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마태복음 21:42), 시편 118:22, 사도행전 4:11)을 보고 그 기이함에 놀라기도 하는 것이다. … 전도(顚倒)가 생기고야 만다. 사상상의 혁명으로써 이에 지날 것은 없었다.
물론 동의하는 바다. 예수도 그 날을 믿고 그 믿음을 ‘현재’ 소유한 채 자신의 몫을 살아낸 온유한 자였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은 의문이 남는다. 결국은 미래에 도래할 그 ‘땅’을 오늘 ‘믿고 사는 것’일 뿐 온유한 자가 현재 ‘땅’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예수가 선포한 이 축복이 나중에 죽어서 저 천국이 네 것이라는 미래적 소망만이 아니었지 않나? 여기, 현재의 세계 안에서도, 관계 안에서도 땅의 소유자가 될 것이라는 선포였지 않나? 나의 이 질문에, 그리고 어느 정도 내 안에 가지고 있던 답을 다시 확인시켜주며, 김교신은 이렇게 묵상했다.
현실에 있어서도 강포한 자는 안정을 얻지 못한다. … 저들은 수백 배의 토지를 소유하였다 할지라도 실상은 아무 것도 소유치 못한 것이다. 마는 이에 반하여 온유한 자, 하나님의 자녀들은 입추(立錐)의 땅을 소유함이 없다 할지라도 지상에서 안강(安康)한 주거를 향락할 수 있고, 아무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모든 것이 유족하여 많은 사람을 부하게 한다.(고린도후서 6:10)
‘아멘’이다. 맞다. 이제야 속이 뚫린다. 최근 2~3년 사이에 내가 경험한 바이기도 하다. ‘입추의 땅’이라… 송곳 설만한 자리가 없더라도 ‘권위를 나누고’ ‘소유를 나누며’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온유함으로 살아내는 이는 이 땅에서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이 땅이 온통 다 그의 것일 수 있다.
현대 관료제(bureaucracy)만큼이나 ‘자리’가 중요한 세상이 또 있을까? ‘자리’가 통치하는 세상에서 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통치권마저 빼앗기는 법이다. 하여 둘이 쓰던 작은 연구실 책상마저 ‘빼앗긴’ 뒤에 한동안은 나도 ‘데스크’(bureau)가 없는 관료의 설움을 느꼈었다. “교수님, 연구실로 찾아 갈게요~.” 내 책상이 여전히 거기 있는 줄 알고 찾아오겠다는 학생들의 문자와 이메일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내 존재가 한참 작아지던 때가 잠시 있었다.
그 시절 계시처럼 꿈을 꾸었다. 길었던 스토리의 앞뒤 다 자르고, 깨고 나니 ‘르호봇'이라는 단어만 생생했다. 아, 이삭의 세 번째 우물 이름이었지. 수고로이 파 놓으면 빼앗기고, 수고로이 파 놓으면 또 분쟁이 나서 포기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이삭은 분내지 않고 또 다시 묵묵히 우물을 팠지. 그 세 번째 우물의 이름이 ‘르호봇’이었다. ‘장소가 넓어 더 이상 다툼이 없다’는 의미이다. 싸우지 마라, 그러나 포기하지도 마라. 묵묵히, 담대하게, 온유하게 너의 할 일을 계속 행하라. 하여 방학을 맞아 이런저런 상담요청을 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말한다. “종로 2가 ***카페로 올래요?” “선릉역 1번 출구 앞에서 만나요~.” 내 일상을 살아내는 한가운데서 시간을 내고 마음을 뚝 떼어 내어 제자들에게 줄 수 있는데, 장소가 뭐 그리 중요하겠나? 밥 한 끼 사 먹이고 등 한번 토닥이는 것밖에 해줄 것 없는 스승임에도 발걸음을 재촉하여 달려오는 아이들이 있는데… 맞다. 내가 선 곳이 하나님 나라다. 나도 예수께서 약속하신 그 넓고 광활한 땅을 소유했다. 하여 스스로에게 다시 다짐하는 하루다. 묵묵히, 온유하게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자. 그러니 성질 내지 말자! 하하.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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