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6)
여호와를 아는 사람
- 전집 3권 『성서 개요』 「사무엘상」 편 -
어디나 높은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은 사회생활의 무기가 된다. 사소한 일상의 일부터 죽고 사는 크고 긴급한 일까지, ‘내가 높은 사람을 안다’는 것은 더 쉽게, 더 빠르게, 나아가 나에게 더 유리하게 일을 처리하는 힘이 된다. 최근 어이없게 방역망이 뚫려 안타까운 생명들을 잃고 전 국민을 떨게 했던 ‘메르스 사태’만 보아도 그렇다. 1번 환자(그나저나 사람에게 1번이 뭐냐? 인격체를 호칭하는 방식으로는 참 별로다.) 스스로 ‘메르스 같다’고 자진신고 했다는데, 안이한 탁상행정에 콧방귀로도 안 듣던 보건당국 사람들은 ‘높은 사람을 안다’는 환자의 ‘협박’(?)에 움직였고, 덕분에 더 끔찍하게 확산될 수 있었던 상황을 막았다고 한다. 평소 ‘알고’ 지내는 높은 사람이 없는 나로서는 듣는 것만으로도 참 신기한 일이다. 내가 높은 사람인 것도 아니고, 높은 사람을 아는 것만으로 세상살이가 편하다니.
그건 사사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독특한 살림 방식이었던 사사제도! 이집트 파라오의 악몽이 싫어서, 아니 더 거슬러 가면 조상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Ur)를 떠나던 시절부터 소위 ‘높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 쓰고 ‘짓’이라 읽는다)들을 너무나 뻔히 알던 터라, 이스라엘은 ‘달리’ 살고자 했었다. ‘높으신 이’는 여호와 한 분이시면 족하다. 야훼께서 우리 왕이다. 그러니 인간끼리는 ‘높고 천한’ 수직적 위계 관계를 그치고 살자. 그래도 하나의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 제의 집전하는 리더, 방어전에서 구심점이 되어줄 전쟁지도자 정도는 필요한 법이니 ‘사사’를 세우자. 그렇게 살던 사람들이 초기 이스라엘이었다. ‘사사’는 한마디로 임시직이었다. 왕과 같이 대대로 계승하여 ‘높은 가문’을 만들 여지를 아예 초장부터 차단했다. ‘사사’가 되는 것 역시 스펙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야훼의 영이 내리면 목동이든 농부든 미미한 가문의 막내아들이든 첩의 자식이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야훼의 영이 그와 함께 한다’는 사실, 그러니까 그는 ‘여호와를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물론 높은 이는 야훼 한 분이시므로 사사의 ‘갑질’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온 지 어언 200여년, 이집트 시절 제국의 악몽이 무언지를 알 길 없는 이스라엘 후손들은 주변 나라들의 아주 ‘안정적으로 보이는’ 군주제 시스템을 열망하게 된다. 이미 기드온 시절에 한 번 “우리의 왕이 되어주소서” 러브콜을 했던 전적이 있었던 그들이다. ‘여호와를 아는’ 아버지가 이런 유혹을 거절했다고 해서 그의 아들들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맛이 ‘권력’이라는데,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아들들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권력이 아버지 것인 줄 알았을 일이고, 아버지를 ‘아는’ 아들인 자신들의 입지 또한 높은 줄 착각했을 일이다. 하여 일찍이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름 뜻도 가관이다. ‘우리 아버지가 왕이다’라니)이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될 시도를 하지 않았던가! 제사를 집전하고 공동체 내의 판결을 수행하던 엘리의 아들들도 이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김교신이 정리한 「사무엘상」의 요약을 보자.
엘리는 40년간 이스라엘 민족의 사사 되어 그 백성을 다스려 왔으니 … 엘리 일가의 행장을 성서 기자의 쓴 대로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괴악하여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지라. 제사장이 백성에게 세운 규례가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하인이 세 살 가진 갈고리를 손에 갖고 와서 냄비에나 솥에나 시루에나 가마에나 있는 고기를 찔러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대로 제사장이 다 차지하는지라”(2. 12-17). 하여 가장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할 제사장의 일가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다만 아는 것은 제물을 횡령하는 일뿐이었다. 실로 공황할 일이었으나 이런 일은 종교계에 드물지 않은 일이다.
일찍이 나 역시 성서묵상 중에 기염을 토했던 성경구절이다. 세 살 갈고리라니! 무엇보다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성서도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사사’였던 아버지를 ‘아는’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의 아들들’이 남용하는 권위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받아들인 까닭 역시 그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여호와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여호와의 뜻과 통치원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저런 유치한 초단마술 같은 퍼포먼스로 제 몫(이상)을 챙기는 제사장을 어찌 가만히 두겠는가.
자고로 ‘제사장의 몫’이란 생산노동을 하지 않는 까닭으로 생계가 막연한 그들을 먹여 살리실 작정으로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거룩한 몫’을 확보해주신 정도의 분량이었다. 제사장들이 거룩해서 떼어주는 것도 아니요, 그들이 무슨 영험한 능력이나 높은 권세가 있어서 바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너희들, 우리가 안 떼어주면 먹을 게 없지?” 백성들이 그들을 무시하며 건네주면 안 되겠기에, 배려 많으신 야훼께서 ‘내 몫’이다 그리 말씀하시고 ‘먹을 만큼만’ 챙겨 먹이신 사랑의 분량이었다. 그런데 ‘거룩’의 이름을 남용하여 마치 자신들이 거룩한 양, 그 거룩의 양도 마음대로 조정하여 세 살 갈고리로 가득 움켜잡다니! 김교신의 요약 내용에는 나오지 않지만, 엘리의 아들들은 익힌 고기만 갈취하지 않았다. 먹고 배부르고 나니 아예 제사 드리기 전의 날고기까지 갈취하기에 이른다. 팔려는 속셈이었을 거다. 성전 제사를 돕기 위해 성별되었던 여성들에게 몹쓸 짓을 일삼기도 했다.
어째 적다보니 그 시절 일만이 아니다. 최근에 어느 대형교회 목사님의 주일 점심 한 끼 식사비용이 25만원이라는 기사를 읽었다. 하필 같은 교회 부목사님께서 대낮에 서울역에서 젊은 여자들 치마 속을 찍다가 공개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그 교회만의 일도 아니다. ‘거룩’을 제 것으로 잘못 해석한 오늘날의 제사장들이 하는 행위들은 여러모로 엘리의 아들들과 꼭 닮아 있다. 이렇게 막강한 ‘가문’을 형성한 엘리를 향해 야훼께서는 서슬 퍼런 말씀을 전하셨다. 아마도 살아생전에 여호와의 영이 자기와 직접소통하기를 그치신 까닭에 다른 이에게 말씀을 전해들은 사사는 엘리가 처음이지 싶다. 심히 자존심 상했을 일이다. 나이 어린 사무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무엇이더냐 묻는 심경이 어땠을까? 사무엘을 통해 여호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높이는 자는 내가 높일 것이요, 나를 멸시하는 자는 내가 장차 네 팔과 네 조상의 팔을 끊어버려 네 집에 늙은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리라.”(2. 30-31)
이 이야기는 ‘단명하는 것은 야훼의 벌’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렇게 받자면 나이 사십 오세에, 그것도 그렇게나 보고 싶어 했던 조국의 해방을 석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던 김교신의 죽음은 어찌 설명할 건가? 최근 마스크로 꽁꽁 감싸고 옆에서 콜록만 해도 인상 찌푸리던 사람들을 보다보니, 김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새삼 느낀다. 그가 일하던 공장에 발진티푸스가 돌았었다. 전염력이 강력한 질병이다. 그럼에도 내 가족 같이 환자들을 돌보다 그 건강하던 분이 감염되어 돌아가셨다. 그러니 행여 “네 집에 늙은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리라”는 야훼의 말씀을 맥락 없이 물리적 수명에만 국한하여 해석하는 우는 범하지 말자. 노인의 지혜로움마저 폄하하는 이야기 또한 아닐 것이다. 익숙함, 당연함, 관행, 이런 걸 잘 ‘알고 있는’ 이들의 이름이 ‘늙은 사람’ 아닐까? 그리 본다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영이 늙은’ 사람들이었다. 김교신의 「사무엘상」 개요설명이 ‘어린(젊은) 다윗’ 이야기로 끝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주의할 것은 저편의 무기 완비함에 대하여 다윗은 입혀 준 갑옷과 검까지 벗어 놓고, 양칠 때의 모양으로 하고 오직 만유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온 태도이다. 다윗의 일생 운명은 벌써 이 싸움에서 결정되었다. 오늘날 골리앗은 금력, 권력, 연회와 총회의 결의 형식으로써 오는 수도 있다. 마는 겁낼 것이 없다. 오직 여호와를 믿는 자답게 천연스럽게 싸우면 족하다.
그러고 보니 신자야말로 ‘가장 높은 이를 아는 사람’이로구나! 가장 높으신 이, 아니 유일하게 높으신 이 ‘야훼’를 알고 믿고 그만을 의지하여 “천연스럽게 싸우면 족할” 일이다. 그게 참 힘든 시절이지만, 괜찮다. 우리는 야훼를 ‘아는’ 사람이니까. 야훼의 영을 늘 새로이 받는 ‘젊은이들’이니까.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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