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7)
도(道)는 ‘평범하고 밝다’
- 전집 3권 『성서 개요』 「열왕기하」 편 -
오시지 말라고 그렇게 부탁을 드렸는데, 강단에 올라가 보니 ‘계시다.’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청중 가운데 앉아 계신 특강을 편히 여길까. 늘 사적 공간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로만 지내왔던 사이였는데, 하필 작은어머님께서 다니시는 교회에 초대된 까닭에 일정이 ‘노출’되어 버렸다. 어쩌랴. 애정표현이신 것을... 심호흡을 하고 그냥 준비한 대로 강의를 진행했다. “여러분은 사람을 둘로 나누라고 한다면 어떻게 나누시겠어요?” 서로 첫 대면, 청중들과의 거리를 좁히려 내가 던진 질문에 재미있는 이분법이 여기저기서 등장했다. 남자와 여자,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갑과 을, 예능형과 다큐형, 너와 나...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면서 한바탕 까르르, 한층 편안해진 분위기에서 강의를 이어갔다.
다 마치고 나오는 길에 시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어떻게 둘로 나누는지 아니?”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모범생 스타일이신지라 며느리(?) 말인데도 그걸 또 숙제처럼 성실하게 생각하셨나 보다.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 “어머님하고 저는 기도하는 사람이라서 다행이에요.” 뭐, 이렇게 비교적 훈훈하게 고부간의 특강체험기가 지나갔다.
물론 사람을 둘로 갈라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요 아주 종종 갈등을 유발하는 호전적인 사고방식일 수 있다. 그 위험성을 깨달아 ‘포스트모던(post-modern)’한 사람들은 이런 이항대립적 경계긋기를 지양한다. 그러나 여전히 동서고금 돌아보면 보통의 사람들은 이렇게 양분하여 사고하는 것을 즐겨한다. 구약성서 역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로 사람들을 이분한다. 이스라엘의 군주제 시절을 다룬 역사서인 「열왕기」 개요를 설명하며 김교신도 이렇게 말했다.
열왕기 하를 읽는 자마다 지루하게 생각되는 것은 선한 왕 즉 우상을 퇴치하고 여호와 유일신을 신앙하는 왕은 흥하고, 악한 왕 즉 이방의 잡신을 숭배하는 왕은 망하였다는 간단한 원칙을 많은 인물과 장면을 교대하여 가며 누설(累設) 역설하였다는 것이다. … 의로운 자가 성하고, 불의한 자가 쇠한다 함은 이스라엘 국민생활에서 경험한 사실이었다.
‘여호와 유일신’과 ‘이방의 잡신’이라는 대립적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밝히지만, 김교신에게 ‘여호와 유일신’이란 신자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공의(公義)와 정직한 삶을 가능케 하는 유일의 원천이요 모든 생명 존재의 기반을 의미했다. 때문에 김교신이 표현한 구약의 이분법은 ‘여호와’와 ‘이방 잡신’의 대조보다는 ‘의로움’과 ‘불의’의 대비에 방점을 찍어야 올바른 독해(讀解)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열왕기의 배경이 되는 시절에 ‘여호와(야훼)’는 단일신적인 의미가 강했다. 역사적으로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야 ‘유일신’이라는 신학적 이해가 확고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김교신이 요약·대비하면서 사용한 ‘여호와’는 형상을 가지고 특수한 효험(예를 들어 다산이라든가 전쟁에서의 승리라든가 하는)을 자랑하는 구체적인 단일신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여러 신들 사이의 경쟁적인 존재로 여호와를 인식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김교신과 깊은 친교가 있었고 『성서조선』에 수차례 글을 기고하기도 했던 다석 류영모의 표현에 따르면 ‘여호와(야훼)’는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존재케 하는 바탕이다. ‘여호와’는 인간의 언어로 ‘크다’ ‘있다’라는 상대적 표현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유일신 야훼를 인간이 경험하고 드러내는 길은 오직 그의 뜻을 내 안에 ‘들숨’처럼 받아들이고 ‘영성’으로 길러내어 하루의 삶 속에서 ‘날숨’으로 체현하는 길뿐이라는 것이 류영모의 신(神) 이해였다. 물론 류영모 스스로도 밝히듯이 자신은 ‘비(非)전통’이요 김교신은 ‘정통 신앙’을 가진 이다. 그럼에도 김교신의 신앙고백에는 현재의 신자들 주류가 가진 ‘여호와/이방신’의 경쟁 구도보다는 류영모가 표현한 근본적인 ‘하나’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김교신의 글에는 언제나 신자들의 체험신앙을 의애(義愛)의 길로 이끄는 힘이신 야훼와의 인격적 만남이 핵심에 놓여 있었다. 윤리적·책임적 삶으로 구현되지 않는 신(神) 체험은 김교신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류연복 판화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요는, 김교신이 보기에 「열왕기」를 쓴 사가의 신앙고백은 명료하다는 말이다. 여호와의 선한 뜻을 따르는 자(왕)는 흥하고, 여호와를 외면하고 자기 영달을 위한 마술적 종교행위를 하는 자(왕)는 망한다는 아주 간단한 메시지다. 그럼에도 「열왕기」를 보면 이 자명하고 간단한 원리를 온전히 지킨 이스라엘 왕과 백성이 드물었다. 이 쉽고도 간단한 원리가 지켜지지 않는 것이, 대쪽 같은 성품의 김교신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와 무교회 기독교인들은 「열왕기」 하에 등장하는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아주 간단한 원리를 단순하게 주장하고 살아낸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위대한 선지자는 밤낮 비범한 언행만 있어서 위대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평범한 진리를 확언 궁행(躬行, 몸소 행하다)하는 데에 참위대함이 있다. 모름지기 이스라엘 백성일진대 여호와 신의 능력에 대하여 다시 논의할 여지없이 알고 있을 것이며, 참신의 권능을 알진대 위급존망지추에 목석으로 만들어 세운 우상에게 문점할 필요도 없는 것은 이스라엘의 삼척동자도 분변할 것이다. 그런데 아하시야왕은 이 일을 불변(不變)하였고, 엘리야는 이 평명(平明)한 진리를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이것만 하여도 전자는 범용(凡庸)이라 하고 후자는 만고의 위인(偉人)이라 칭할 이유가 된다. 과연 도는 가깝다.
이 ‘가까운’ 도(道)를 멀리하고 따르지 않는 까닭에 대해 김교신은 “공포와 초려(焦慮)”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생명의 근원이요 바탕이요 돌아갈 종착지인 여호와를 알고 믿는다면 무에 그리 두렵고 무에 그리 근심일까? 세상 살아감에 생노병사는 피할 길 없는 것이요, 오직 하루하루 여호와께서 선하다 하신 행동을 선택하며 하루씩 살면 될 것을... ‘기근과 병란, 암살과 탈위의 난세 중에서도 어린 왕 여호아스를 선정으로 이끈 제사장 여호야다’처럼, 앗수르의 위협 가운데 유대의 존폐가 풍전등화와 같던 시절에 “모략하기보다 기도하였던” 왕 히스기야처럼, 살 길은 오직 여호와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이라는 단순명료한 ‘도(道)’를 이스라엘의 다른 왕들과 백성이라고 모를 리 없었을 터이다. 다만 알면서도 불안함에, 공포에, 근심에, 어찌 될까 일월성신에게 물어보고, 지켜 달라 주변 제국들에게 빌붙고, 잘 봐 달라 강자의 불의를 눈감아주고 나아가 협력하는 것 아니겠냐는 말이다.
이처럼 선왕과 악왕이 교대하여 정권 무대에 출현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무시로 대변자를 보내어 선민들이 우상을 버리고 선에 취(就)하여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경고하였으나 선을 행하는 왕은 적으며 짧고, 악을 행하는 왕은 많고 길어서 애굽에서부터 무한한 노력으로 이끌어 내시던 여호와의 선민은 악을 행하고 불신에 떨어진 결과로, 하나님의 약속은 휴지로 돌려보내고 다윗의 나라는 멸망하고야 말았다. … 선을 알면서도 행할 능력이 없는 개인처럼, 선민 이스라엘도 구름같이 에워싼 선지자들의 경종(警鐘) 가운데서 불신으로 멸망을 자취(自取)하여 인류의 절망을 여실히 고백한 것뿐이다.
어제의 일만도, 이스라엘만의 일도 아니다. 김교신의 말처럼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아니하려함이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법원이 호떡장사도 아니고’ 판결을 어찌 호떡 뒤집듯 뒤집나? 1, 2심에서 승소한 것을 보면, 아니 그냥 법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 보아도 명백한 잘못인 것을, 근 10년을 버티며 권리주장을 해온 KTX 여승무원들의 삶의 터전과 살아갈 희망을 어찌 저렇게 짓밟나? 엘리야와 엘리사는커녕 김교신의 발그림자에도 따라가지 못할 사람이지만, 평범한 나도 밝히 안다. 도는 평범하고 밝기 때문이다. 악한 행실을 그치지 않는다면, 돌이켜 여호와를 아는 법도대로 살지 않는다면, “혹독하게 의로우시고 철저하게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손을 펼치시는 날에 우리가 어찌 될지는 너무나 뻔하다. 그러니 제발 더 늦기 전에, 아는 만큼만 살아내자. 도는 평범하고 밝으니….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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