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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두런두런'

옥수수 수염

by 한종호 2015. 8. 18.

두런두런(28)

 

옥수수 수염

- 동화 -

 

이제부턴 흙길입니다. 차가 덜컹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하자 민구가 잠에서 깼습니다.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오랜만의 나들이에 신이 나서 창에 코를 박고 밖을 구경하던 민구가 따뜻한 햇살에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잘 잤니? 이제 곧 할아버지 댁이다.”

 

운전하는 아빠 옆에 앉아 있던 엄마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아직 졸음기가 남아있는 민구는 큰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습니다.

 

기지개를 켜며 막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민구뿐이 아니었습니다. 나무마다 아기 손톱 같은 작은 이파리들이 조잘조잘 돋아나고 있었고, 논둑과 밭둑으로는 누군가 크레용을 칠한 것처럼 굵고 힘찬 초록색 선들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창문을 열자 확, 시원한 바람이 밀려듭니다. 맑은 기운이 가득 담긴 바람입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바람을 마시자 찬물에 세수를 한 것처럼 민구의 잠기운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들판 곳곳에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소를 부려 밭을 가는 모습들도 보입니다. 나란히 서서 일하는 두 마리 소, 겨릿소입니다. 개울가에 줄지어 선 산수유나무에는 샛노란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있었고, 어디서 우는지 뻐꾸기 소리도 은은하게 들려왔습니다.

 

뻐꾸기 소리를 듣자 대뜸 민구는 뻐꾸기시계를 떠올립니다. 민구네 집 거실 벽에는 뻐꾸기시계가 있습니다. 시간만 되면 뻐꾸기가 문을 열고 나와 “뻐꾹! 뻐꾹!” 어떻게 아는지 시간의 수만큼 노래를 합니다. 뻐꾸기시계 소리에 익숙해진 민구는 진짜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소리가 뻐꾸기시계를 닮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쫑긋 쫑긋 꼬리를 까불며 날아다니는 할미새도 보이고, 머리 위에 로마 병정의 투구를 닮은 깃털을 달고 “호홍, 호홍” 빈 병에 입을 대고 불면 나는 소리를 내는 후투티도 보입니다.

 

나무 이름도 새 이름도 모두 잘 아는 것처럼 척척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민구는 아는 게 없습니다. 서울에 살면서 그런 것을 본 적이 없고,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냈으니까요. 어떤 걸 물어도 막힘없이 대답을 해주시는 아빠가 신기할 뿐입니다.

 

“저기 할아버지가 마중을 나와 계시는구나!"

 

산모퉁이를 지나 저 앞에 동네가 나타났을 때 엄마가 앞 쪽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멀리서도 보이는 하얗고 긴 수염, 민구도 대번 할아버지를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4월 5일, 식목일이자 한식입니다. 민구네 가족은 한식을 맞아 몇 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산소를 찾아온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평생토록 일해오신 산간밭 한쪽 양지 바른 곳에 할머니는 묻히셨습니다.

 

할아버지 손길이었겠지요, 할머니 누우신 산소는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란히 서서 할머니 앞에 큰 절을 올린 뒤 엄마 아빠를 따라 봉분 위의 풀 하나를 뽑을 때 민구는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시며 ‘아이구, 우리 민구 왔구나!’ 하며 손을 잡아주시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을 잡아주시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던 할머니의 손길은 유난히 따뜻했었답니다.

 

‘그래요, 할머니. 저 민구에요. 제가 왔어요.’

 

민구도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렸습니다.

 

산소에서 돌아온 민구는 할아버지와 함께 텃밭으로 갔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 옥수수를 심기로 했습니다. 호미 끝이 반 이상 닳은, 할머니가 쓰셨던 호미를 민구가 잡았습니다. 호미 끝 몇 번 닳으니 세월이 다갔다 하시던 할머니 말씀이 생각납니다.

 

“할아버지, 땅은 얼마나 깊이 파면 되요?”

“옥수수 알은 몇 개씩 넣으면 되죠?”

 

민구는 모르는 것도 궁금한 것도 많습니다. 때마다 할아버지는 흐뭇한 목소리로 대답을 합니다.

 

“씨앗은 씨앗의 크기만큼만 묻으면 된단다.”

“한 구덩이에 서너 알씩 넣으렴.”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옛 이야기까지 해주었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그러셨단다, 옥수수를 심을 땐 서너 알씩 심으라고. 그래야 한 알은 하늘의 새가 먹고, 한 알은 땅속 버러지가 먹고, 한 알은 사람이 먹는 거라고.”

 

민구에겐 한 알만 심어도 되는 것을 서너 알씩 심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졌지만, 아직 자기가 알지 못하는 좋은 뜻이 할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담겨져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손으로 흙을 만지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손도 마음도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옥수수 씨를 심으니 마음이 착해지는 것도 같았습니다. 가끔씩 긴 지렁이가 나와 기겁을 하고 놀라기는 했지만요.

 

민구가 할아버지 집을 다시 찾은 것은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학원이다, 영어 캠프다, 숙제다…, 방학이 더 바빴으니까요. 그래도 개학을 며칠 앞두고 할아버지 집을 찾을 수가 있게 되어 민구로서는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지난번에 할아버지와 함께 심었던 옥수수가 어떻게 되었는지 여간 궁금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민구는 이제 초등학교 5학년, 엄마 아빠는 민구가 혼자서 시골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도록 했습니다. 전철과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먼 길이었습니다. 엄마 아빠는 시간이 없어 그런다고 했지만 꼭 그런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민구도 아주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자기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엄마 아빠 앞에 민구도 용기를 냈습니다. 중간에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싶어 떨리기도 했지만 의젓한 마음을 갖기로 했습니다. 아빠 차로 갈 때와는 달리 혼자서 찾아가는 할아버지 집은 땅 끝에 있는 것처럼 멀리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며칠 동안 민구는 할아버지 집에서 할아버지와 단 둘이 지냈습니다.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도 거들어드리고, 밤에 할아버지 곁에 누워서는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옛날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어릴 적 모습 속엔 지금의 자기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땐 너무도 닮아 지금 아빠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책에서는 읽을 수 없었던 재미난 이야기들도 할아버지는 많이 알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이야기들은 컴퓨터 게임과는 다른 독특한 재미와 감동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에 빠져드는 재미를,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다시 한 번 꿈속으로 나타나는 재미를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짐작이나 할까요?

 

할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은 하루가 언제 갔나 싶게 재미있고 즐거웠지만 민구는 왠지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쓸쓸한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와 두 분이 계실 때는 그런 줄 몰랐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신 뒤로는 할아버지 등이 허전하게 보입니다.

 

혼자되신 할아버지께 서울로 올라가 같이 사시자고 엄마와 아빠 그리고 민구까지 나서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할아버지는 시골이 좋다시며 굳이 혼자서 지내십니다. 시간이 될 때마다 슬며시 할머니 산소를 찾으시는 것을 보면 아마도 할아버지는 서울이 싫기보다는 할머니 곁을 떠나기가 싫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민구가 서울로 돌아가기로 한 전날 저녁, 엄마와 아빠가 서울에서 내려왔습니다. 엄마 아빠는 며칠 사이에 얼굴이 검게 탄 민구가 건강하게 보여 반가웠고, 민구는 혼자 찾아와 보낸 시간을 엄마 아빠에게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 날 밤은 정말로 멋진 밤이었습니다. 마당에 널찍한 멍석을 펴놓고 식구들이 둘러앉았습니다. 그새 할아버지께 배운 대로 민구는 말린 쑥을 가져와 모깃불을 피웠습니다. 모기를 쫓는 것은 모기향밖엔 없는 줄로 알았던 민구에게는 쑥으로 연기를 피워 모기를 쫓는 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습니다. 손을 들어 휘저으면 후두두둑 떨어질 것 같은 머리 위의 수많은 별들, 앞산과 뒷산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대답하듯 번갈아 울어대는 소쩍새의 울음소리, 빛과 소리가 어둠 속에서 너무나도 잘 어울렸습니다.

 

엄마가 막 쪄낸 옥수수를 쟁반에 담아 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민구가 심은 옥수수가 잘 자랐다고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호미로 땅을 파고 서너 개 옥수수 알을 심었더니 그게 자라 정말로 옥수수가 열리다니, 땅은 보물창고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낮에 옥수수를 딸 때부터 민구는 여러 번 했습니다.

 

무릎을 맞대고 둘러앉은 식구들이 찐 옥수수를 먹으며 광주리에 담긴 옥수수 껍질을 벗겼습니다. 서울 갈 때 가져가라며 할아버지는 밭에 익었다 싶은 옥수수를 거반 다 따냈습니다. 촘촘한 옥수수 껍질을 한 겹 두 겹 벗겨내면 그 속에서 하얀 옥수수 알이 드러났습니다. 옥수수 알은 긴 수염에 덮여 있었습니다. 간지럼을 탈만큼 보드라운 수염이었습니다.

 

 

 

“엄마, 옥수수에 수염은 왜 있는 거예요?”

 

무슨 이유로 수염이 껍질 안에 들어있는 것인지, 옥수수 껍질을 벗기다말고 민구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네 생각에는 왜 그런 것 같니?”

 

물으면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되묻는 것은 엄마의 주특기입니다. 마땅한 대답을 찾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속에 있는 옥수수 알을 지켜주려고 있는 게 아닐까요? 옥수수 알이 다치지 않도록 감싸주려고요.”

 

민구의 대답에 자신이 없자 엄마가 말했습니다.

 

“그런 것은 할아버지께 여쭤보렴. 할아버지는 모르시는 게 없거든.”

 

함께 옥수수 껍질을 벗기며 가만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빙긋 웃으며 대답을 하였습니다.

 

“얘길 들어보니 민구 대답도 그럴듯하구나. 옥수수 수염은 옛날부터 요긴한 쓰임새가 있었단다. 오줌이 시원찮게 나올 땐 옥수수 수염 말린 것을 달여 먹었지. 얼굴이 부었을 때도 옥수수 수염을 달여 마시면 부은 것이 내리곤 했어.”

 

“아니, 옥수수 수염이 약으로 쓰였단 말이에요?”

 

“그럼. 땅에서 나는 것은 어느 것 한 가지도 버릴 게 없는 거란다. 어디엔가 다 쓸모가 있는 법이지.”

 

할아버지는 땅에서 나는 것은 한 가지도 버릴 게 없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쉬운 것 같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음날 아침, 민구는 엄마 아빠와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개학이 눈앞으로 다가왔으니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저것 할아버지가 챙겨주시는 것들이 어느새 자동차를 가득 채웠습니다.

 

할아버지를 혼자 두고 떠나야 하는 마음은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고향을 지키다 할머니 곁에 눕고 싶은 할아버지 마음이야 잘 알지만 혼자 계셔야 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인사를 드리다가 괜히 눈물을 보일까 싶어 얼른 인사를 드리고는 뒷자리에 올라탄 민구가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몸을 돌려 할아버지께 손을 흔듭니다. 할아버지도 같이 손을 흔들어 주십니다.

 

차가 산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할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던 민구는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나무처럼 서서 여전히 손을 흔들고 계셨는데, 갑자기 할아버지의 흰 수염이 와락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할아버지의 하얀 수염이 어젯밤 마당에서 벗겨내던 옥수수수염과 겹쳐졌던 것이었습니다. 순간 민구는 마음이 울컥해졌습니다.

 

‘그래 맞아. 옥수수 수염은 옥수수 알을 지켜주기 위해 있는 거야. 할아버지가 우리를 지켜주고 계신 것처럼!’

 

끝까지 흙을 일구시며 아빠와 엄마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시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할아버지 수염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것을 민구는 분명하게 알 수가 있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엄마 아빠는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훔쳐내는 민구에게 몇 번을 물었지만 민구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 할아버지의 옥수수 수염!’

 

꾹꾹 눈물을 참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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