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인문학 산책(28)

 

산의 비밀스러운 영토

 

 

산을 오르는 것은 산이 품고 사는 사연들을 만나는 일이 됩니다. 산의 높이와 크기, 그리고 가파른 정도만을 우선 눈여겨보았다가, 그때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던 비밀스러운 영토로 들어서는 순간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주인 몰래 잠입하여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벌이는 은밀한 정찰이 아니라, 예의를 갖추어 정중한 자세로 상대와 새로운 교제를 시작하는 경건한 시도에 속합니다.

 

사실 평지에서 무심히 바라보는 산은 하늘과 능선이 맞닿아 있는 경계선으로 그 윤곽을 드러낼 뿐입니다. 때로는 계절이 허락하는 다채로운 모습으로, 일상에서는 예상치 못한 면모를 불현듯 확인시키기도 합니다. 물론 그로써 우리는 산의 전체적인 인상을 대강이나마 포착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 인상기(印象記)가 곧 나의 발이 딛고 선 경사진 언덕이나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찾아든 계곡의 진실을 모두 다 충실하게 담아내 줄 수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막상 마주하게 되는 산 속의 풍경은 아무리 그 겉모양이 단순해도 결코 어수룩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들어선 일체의 것들이 자신의 자리를 전혀 서툴지 않은 방식으로 확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가 온종일 비치는 곳에 나야할 풀과, 그림자가 젖은 장막처럼 드리워진 곳에서만 비로소 활력을 얻는 무명의 초목은 각기 빈틈없이 짜여진 우주의 공평한 질서를 입증해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에게 마련된 공간에 묵묵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산은 자신의 영토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위해 태초로부터 산이 되는 운명을 타고 난 진지한 표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건 군림하는 자의 경박한 오만이 아니요, 짐짓 베푸는 자의 은근한 자기과시도 아니며 피할 수 없이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슬퍼하는 자의 비극적인 몸짓들과도 완연히 구별됩니다. 들판을 치열하게 달려오다가 하필 그곳에 기어코 불쑥 거대한 집처럼 솟아오를 이유가 있음을 아는 존재의, 가볍게 볼 수 없는 위엄이 있습니다.

 

먼 길을 마다않고 자신에게 지친 몸을 의탁하러 온 자나, 침략자처럼 기세등등하게 육박해오는 자나 그 상대를 가리지 않고 산은 무언(無言)의 포옹을 합니다. 어떤 생각으로 산을 대하고 있었던 간에 인간은 그 산의 기운에 묵직하게 휩싸이게 되면 허물을 벗듯 지금까지의 처신과 아쉬움 없이 결별할 줄 알게 됩니다. 너그러운 산의 체온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래 전 사라진 화전민의 구차한 살림살이의 흔적이 석기시대 유적처럼 남겨놓은 터에 돌보는 이 없어 황폐해진 주인 없는 묘지조차, 산은 자신의 일부인양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산은 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눈물과 아침의 태양이 선사하는 맑은 하늘, 그리고 밤이 결국 들려주게 되는 전설의 숨겨진 가락을 일깨워줍니다.

 

도시가 괴로운 하루의 전투를 마치고 겨우 잠들고 있을 때에도, 산은 잠들지 않고 그제야 깨어나는 존재들에게 마저도 안식의 황홀함을 맛보게 합니다. 그러다가 그 자신이 곧 산이 되어가는 즐거운 환각에 취한다면, 한적한 달빛에 유유히 산 길을 접어드는 도인(道人)이 다만 낯모를 타인이 아니라는 꿈결 같은 유쾌함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김민웅/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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