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인문학 산책(24)
“여름밤 기차의 행선지”
흑판의 글씨처럼 쉽게 지우기를 거듭하면서 새로 쓰는 서툰 문장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념(想念)으로 뒤척이다가, 그만 때를 넘기고 미처 잠들지 못한 여름밤은 여느 때보다도 고독해집니다. 순간, 오후 내내 몰인정하게 작열하던 태양을 껴안고 간신히 열기를 식힌 적막(寂寞)을 불현듯 가르며, 홀로 그 긴 몸을 앞세워 어디론가 돌진하기 시작하는 기차의 움직임이 들리는 작은 창문은 “목표를 정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의 무임승차(無賃乘車)”를 허용하는 출구가 됩니다.
마치 대단한 일을 벌일 것처럼 머리끝에서 흰 연기를 뿜으며 저 멀리 고갯마루를 넘어서야 비로소 흩어질 기적소리를 울리던 시절의 기차라야 비로소 기차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도 흑백사진 속의 안타까운 추억이 아니라, 일상의 흔한 풍경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이들의 소탈한 낭만 때문이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쁜 걸음으로 스쳐지나가는 주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침착하고 묵묵하게 쉬고 있다가, 이따금은 아니지만 대체로는 엄격한 일정표를 따라 정거장에서 천천히 빠져나가는 이 검고 육중한 물체가 다정하게 여겨지는 것은 실로 기이한 일입니다.
분명 어디론가 달리기 위해서는 이미 설정된 궤도를 이탈할 수없을 터인데도, 기차는 우리에게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아무런 부담 없이 약속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아직 타고 있지 않은, 또는 이제 막 타려는 여름 밤 기차의 행선지(行先地)를 굳이 묻지 않습니다. 어느 정거장에서 잠시 멈출 것인지, 그리고 결국 어디에서 여장(旅裝)을 풀 것인지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미리 알리지 않은 채 “미지(未知)의 지점”을 향해가는 흥분은, 때로 이렇게 막을 길 없이 겹겹이 쌓여가는 세월의 협박으로 자기도 모르게 두려워하며 시들어가는 영혼을 위한 청량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그저 잠깐의 탈출로서도 어느새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열차에게 어렵사리 길을 내어준 들과 산과 그리고 강의 표정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족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혹시 아무리 오래전부터 낯익은 광경이라 할지라도 도시의 천박한 색조의 네온사인과 차단할 수 없는 소음(騷音)에 어쩔 수 없이 친밀해져야 하는 사나이와 여인네들에게는, 처음 가보는 이국(異國)의 시와 노래이며, 놓치면 다시 만날 기약을 할 수 없는 “연인(戀人)”입니다.
<"JNR C11 289 on Tadami line" by BehBeh. Wikimedia Commons.>
가령, 반도의 북을 서슴없이 가로질러 지구 저편 아득히 먼 곳에 있을 이름모를 작은 마을로 가는 편도 승차권만 끊고 떠나는 여행이라면, 그건 일상의 걱정을 매일 감당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래도 무모한 선택일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때로 “상상 속의 은하철도(銀河鐵道)”야 못 타 볼 이유는 없겠지요. 무섭게 훈련된 군견(軍犬)을 풀어놓은 채 경비가 삼엄한 개찰구에서 위압적인 정복을 입은 누군가가, 그럴 까닭이 결코 없는데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줄을 서고 있는 우리를 제지하고 나서는 것도 아닐 테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은하철도의 이런 행선지는 또 어떨까요. 식민지 시대의 소금장수가 일군(日軍)들의 눈을 피해 구사일생의 모험담처럼 건넜던 두만강을 그때와는 다른 발걸음으로 건넌 뒤 저 쓸쓸하고 비장한 하얼빈 역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 무림(武林)의 전설을 수없이 낳은 중원(中原)의 그 광활한 대륙을 지나, 마침내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코란을 읽으며 수염을 기른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거쳐 영원히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사막의 별을 보는 열차에 계속 몸을 싣고 가는 것입니다.
관광버스의 노래 테이프에서 철지난 유행가를 지겹도록 듣는 대신, 아라비아의 그 얄궂고 육감적인 <천일야화(千一夜話)>를 들으면서 낮과 밤을 거꾸로 살고, 전쟁의 포성은 벌써 그친 바그다드를 들린 다음 결국에는 고색창연한 이스탄불, 또는 비잔틴 아니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해도 좋고 좌우지간 몇 가지 이름을 가진 이곳을 통과하는 동안에 나는 편견과 선입관 그리고 무지와 과거의 노역(奴役)으로부터 해방된 존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영화의 미흡한 시나리오를 닮은 여정(旅程)이 줄 베르느의 화려한 “80일간의 세계일주”가 될 지, 아니면 그저 시골 어느 가난한 역사(驛舍)에서 여름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면서 무한정 연착(延着)하고 있는 기차를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 될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는 이제는 돌아가야지 하고 여독(旅毒)의 무게를 툭툭 털고 일상으로의 복귀를 도리어 설레어 하고 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름밤 기차의, 그 좀체 사라지지 않는 여운을 남기고 간 기적소리가, 지금껏 굳세게 살아왔다고 믿었으나 그만 상심(傷心)해버린 인생에게 해질녘 우연히 읽고 기쁨을 얻은 소설 같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득합니다. 어차피 우리의 행선지를 미리 알 수 없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김민웅/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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