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32)
종교의 파렴치한 친일행각
2015년.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병합으로부터 벗어난 지 70주년 되는 해이다. 이 날을 우리는 광복절이라 부른다. ‘빛을 다시 찾았다’는 이 멋진 메타포는 해방의 감격을 표현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다만 이 멋스런 표현이 요즘 세대에게는 조금 낯설고 먼 이야기처럼 들릴지는 않을까 교육적 불안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해방절’이라 이름 지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물론 일각에서는 우리가 애초부터 주권이 없었고 노예였다가 풀린 것이 아니라, 반만년 유구한 역사 속에서 아주 잠시 일본제국주의에 주권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아온 것이기에 ‘해방’이란 용어는 적당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그도 역시 틀린 말은 아니게 들린다. 그럼 이 문제는 결국 적절하고 정상적인 역사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우리 사회의 역사교육이라고 하는 것도 공유하는 것 못지않게 갈등점 역시 만만치 않다는 것이 숙제이긴 하다.
내 생각엔 광복절, 해방절, 건국절 논쟁보다 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이 1919년 있었던 3월 1일 독립을 위한 만세 저항 운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이다. 왜 이 중요한 저항의 날을 삼일절이라 발발한 날짜로만 한정해 이름을 붙였을까? 그날은 한반도를 넘어 세계 구석구석에서 많은 한민족이 한마음으로 독립의 의지를 표명하였고, 서울 한복판에서는 민족의 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포고하였다. 당시 만세운동에 나선 이들이 백만 명이 넘었고, 사망자만 해도 7천 5백여 명, 구속된 사람은 4만 7천명을 헤아린다. 이 정도의 독립운동이라면 응당 그에 걸맞은 이름을 붙여줘야 할 터인데, 우리 사회는 고작 날짜만으로 부르고 있다. 심지어 삼일운동의 정신 아래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그것이 결국 새로운 대한민국의 기틀이 되었다고 지금 우리의 헌법도 적시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논지는 1948년 7월 17일에 제정 공포된 제헌헌법 전문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확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諸) 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各人)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하여 안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이렇게 제헌헌법에도 대한민국은 1919년 삼일 독립운동을 통해 세워진 것으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건국절은 8월 15일이 아니라, 3월 1일이 되어야 한다.
미국의 예를 봐도 삼일절에 대한 대우는 조금 아쉽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7월 4일인데, 이 날은 영국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난 날이 아니라 독립선언문을 채택한 날이다. 그에 반해 독립선언문을 포고한 우리의 삼일절은 아직도 숫자로만 불리고 있다. 미국의 경우를 대입해 본다면 당연히 삼일절은 숫자이름이 아닌 ‘독립기념일’ 내지 ‘건국절’로 불러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굳이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 수립을 건국절이라 부르고자 하는 이들의 저의는 무엇일까? 아마도 친일의 흔적을 덮고 시작한 이승만 정부에 기대야만 하는 절박한 사정이 저마다 있던 까닭은 아닐까? 그들, 친일세력들에게 1945년 8월 15일은 절망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일제의 퇴거와 함께 그들도 세상의 앞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운명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1948년 8월 15일은 친일의 주홍글씨를 지워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니 1948년 8.15를 근대 대한민국의 기점으로 잡아야 그들의 트라우마가 지워질 터! 아마 여기에 지금 건국절 논쟁의 진의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역사는 우리의 진정한 건국은 1919년 3월 1일 만세 항거에서 잡고 있으며, 그것이 또한 헌법의 정신이다. 따라서 삼일절은 이제 숫자가 아니라, 그에 응당한 이름으로 불러줘야 한다. 독립기념일, 내지 건국절로서!
국경일 논쟁은 이제 뒤로하고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 활동했던 종교들의 모습은 어떠한가를 잠시 생각해보자. 앞서 언급했던 삼일절을 보면 종교들의 독립 및 반일 운동은 찬란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른바 민족대표라 불리는 33인들 대부분이 천도교(15명), 개신교(16명), 불교(2명)의 지도자들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보면 삼일절은 독립을 갈망하는 종교들의 구국적 연합활동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면면을 살펴보면 대표로 참석했던 많은 이들이 이후에 변절하여 일제에 협력했던 사실은 매우 씁쓸한 우리 역사의 그림자이다. 암튼 많은 역사가들이 삼일절은 천도교의 자금과 개신교의 조직이 선도한 독립을 향한 민족적 반일 저항 운동이긴 하다. 하지만 실제로 일제 강점기 때 종교들은 어떠했을까? 그 당시 그들은 이 땅의 민초들에게 어떤 희망의 언어를 건넸을까? 아니면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그 시대를 살고 있었을까? 특히 종교와 그 지도자들은?
실제를 보면 매우 비참하다. 일제 때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이 보인 태도는 비굴하다 못해 염치없을 정도이다. 예서 간단히만 살펴보면, 개신교의 경우는 매우 적극적으로 일본 편에 서있었다. 당시 조선예수교 장로회에서는 중일전쟁이 난 이후에 수많은 강연회와 구국기도회를 통해 거액의 헌금을 모금하고, 그 돈으로 비행기와 군함을 구입하여 일본에 헌납하였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국민의례의 하나로 인정하여 적극 홍보하며 참석하였고, 그 중 몇몇 지도자들은 친히 일본으로 날아가 그곳 야스쿠니 신사에서 직접 참배를 하고 돌아오기까지 하였다. 이름만 대면 다 알 수 있을 정도의 명망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보여줬던 친일행각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나 반성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가톨릭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일제 때 가톨릭은 철저히 친일 쪽에 서 있었다. 심지어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가담했던 삼일운동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아니 되려 이 독립운동의 의미를 축소 폄하하기까지 했다.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뮈뗄 주교와 대구 교구장이었던 드망즈 주교는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삼일운동에 대한 한국 가톨릭의 입장을 깔끔히 정리하고 있다.
“우리 천주교인들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정부에 대한 충성의 모범을 보였다.”(뮈뗄 주교)
“일본 정부는 합법적 정부이므로 우리 가톨릭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쳤다.”(드망즈 주교)
물론 당시 한국 가톨릭이 주로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는 것도 일제에 대한 태도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긴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저 두 주교의 발언은 그들이 속한 국가(프랑스)의 일본에 대한 입장과 같은 선 위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뮈뗄 신부는 안중근 의사의 일화에 한 번 더 등장한다. 안중근 의사가 처형 직전 종부성사를 청하자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뗄 신부는 단칼에 거절해 버린다. 그는 안중근 의사를 가톨릭 신자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후에는 안 의사의 종부성사를 집행한 신부를 ‘성무집행정지처분’까지 내려버린다. 여러 주도적 위치에 있던 신부들의 신사참배는 개신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의 전쟁 열병이 한창일 때는 대대적인 모금행사를 통해 비행기 2백여 대를 구입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을 모아 헌납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친일 행각은 불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교 역시 대동아 전쟁이 발발하자 조계종 산하 전국 사찰에 일본의 전승을 위한 기도법회를 열도록 재촉하였고, 또 무기구입을 위한 모금에도 열을 내었다. 그리고 이런 행사에 적극 나섰던 인사들이 이후 조계종의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였고, 심지어 동국대의 총장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동학 역시 친일의 아픈 흔적이 남아있다. 바로 이용구가 이끌었던 일진회가 그러하다. 최초에는 독립협회 관련자들이 주도하여 유신회의 후신으로 설립되었지만, 러일전쟁 이후 일제로부터 자금 및 조직 지원을 받으면서 철저한 친일 조직으로 탈바꿈되어 갔다. 결국 동학은 일진회 때문에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어야만 했고, 이후 교단 분열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다.
유교는 말한 것도 없다. 일제는 합방에 일정 부분 협력한 적이 있는 관료요원에게는 작위를 부여하고 ‘은사공채’(恩賜公債)를 주어 그 이자로 여생을 편히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 외에도 친일파 양성책의 하나로 귀족이나 공로자의 유족들, 그리고 이전 조선정부의 관리 총 3,638명에게는 8,246,800원의 은사금(恩賜金)을 주었고, 전국 각지의 양반 유생 12,115명에게는 300,000원으로 분배하였다. 일제 초기 1원은 순금 두 푼(750mg) 정도였다고 한다. 이를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1만 원 정도이니 일제가 뿌린 금액의 규모가 어떠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은 유생이라야 황현(黃玹, 1855-1910)을 위시해 을사늑약에 비통해 자살한 20여명이 전부였다. 그때 일제가 나눠주던 은사금을 받고자 했던 유교식자층들로 인해 서울로 가는 모든 길이 북새통을 이뤘을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유교 식자들의 민족의식도 참담할 지경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은 그때 받은 돈과 토지 등을 기반으로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주도층이 되어 갔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역사와 민족 앞에 제대로 진정어린 사과를 했다는 소리는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때 종교로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은 홍암 나철(1863~1916) 선생이 창도한 대종교 정도뿐이다. 나철선생은 과거에 장원급제한 엘리트로서 국가의 패망과 주권의 손실을 민족정신을 구심삼아 회복하려고 하였다. 당시 많은 독립을 희구하던 엘리트들이 대종교 운동에 동참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집중도 있는 독립운동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대종교는 존재 자체가 너무도 미미하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왜 그 당시 종교인들은 다른 이들과 특별히 다를 것 없이 일제에 순응적 태도를 취한 것일까? 그건 아마도 철저한 현실에 대한 애착 때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라는 전가의 보도와도 같은 기존 정권의 천부설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그들의 현실인식에서 이미 일본은 합법적인 한반도의 국가체로서 받아들였기에 저런 행위를 결과로 내어놓은 것은 아닐지. 그런 점에서 당시 종교인들은 내일을 말하며 철저히 오늘을 산 사람들이다. 오늘의 통치자에게 제대로 순응하며 미래는 수사적으로 포장하고 있었던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신앙적이지 않은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종교, 그리고 신앙을 좇는 이들은 오늘에서 미래를 살아간다. 그래서 현실의 권력보다는 미래의 희망에 더 집중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종교인이 저처럼 미래가 아니라 어제와 오늘에 천착하고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이미 그들 마음속에 ‘조선’은 사라졌고, ‘대일본제국’만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광복이, 해방이 그리 도적처럼 올 줄 알았으면 그들이 그런 판단을 했겠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신앙인이었을까? 오늘에 집중한 삶을 살았던 그들이 종교 지도자 인양 행세를 했는데, 과연 내일을 갖지 못한 이들이 어떤 믿음을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었을까. 신앙이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사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이다. 그러니 지금도 오늘에만 집중하는 이들에게 감히 참된 종교인, 신앙인이라 불러 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역사의 교훈은 그렇게 치밀하게 우리의 오늘을 질타하고 있다.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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