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톺아보기(14)
소멸하는 것을 통해 불멸을 보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창세기 8:22)
1.
시간 여행자인 인간은 순환하는 계절의 리듬을 타고 산다. 그 속에는 패턴이 없는 무질서에서 패턴을 만들어내신 큰 생명의 숨결이 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의 규칙적인 패턴에 따라 번갈아 찾아오는 낮과 밤, 여름과 겨울에 몸과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그 리듬을 타고 살 때 삶은 흥겹고, 그 리듬을 거스를 때 삶은 힘겹다. 지금은 우주의 리듬과 문명의 리듬이 충돌하는 시대이다. 몸이 고단하고 심성이 거칠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시를 쓸까? 시간 여행길에 만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붙들기 위한 기억투쟁일까? 세상에서 제일 힘센 덧없음에 작은 틈이라도 만들고자 하는 바람 때문일까? 혹은 자기 속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일까? 어쩌면 시 쓰기는 우주의 리듬에 자기 존재의 리듬을 연결시키고픈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자기 발견을 위한 몸짓이든, 세상과 소통하려는 열망이든 시를 쓴다는 것은 행복하지만 고된 일이다. 시 이전의 시가 마음에 밀려올 때, 그것을 언어의 그릇에 오롯이 담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시인이 그 고됨을 마다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멸의 운명을 타고난 생명이 불멸의 무늬를 잣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인 정명성은 관찰자이다. 그는 세상을 유심히 살핀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에게 세상은 ‘초월자의 암호’인 것처럼 시인에게도 세상은 초월자의 암호이다. 하지만 그는 해석자가 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설명하려 하기보다는 보여주려 한다. 자기 심상에 비친 이미지들을 캔버스에 그리듯 그저 그려낼 뿐이다. 그의 심상 속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같은 하얀 연기가
굴뚝마다 피어오른다
처마 밑 장작더미 틈새로
뉘엿뉘엿 스며든 석양을 거두어
아궁이 속에서 불로 지피는 사람들
바람은 멎고
새들은 산으로 돌아가고
등불처럼 오롯이 타오르던
노을도 꺼져가는 저녁
홀로 남은 빈들엔
어둠이 내려,
종소리보다 평화로운
어둠이 내려
저녁기도 끝나는 시각
연기를 지펴 올린 마을 하늘에
강가의 돌들만큼이나 무수히
피어난 저 환한 별들
(<저녁> 전문)
이미지의 전환이 눈부시다. 시각적인 이미지는 청각적 이미지로 전환되고, 아래로 향하던 시선은 돌연 위를 향한다. ‘굴뚝마다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로 전환되면서 시적 생동감이 만들어진다. 아궁이 속에 불을 지피는 사람들은 장작이 아니라 ‘장작더미 틈새로 스며든 석양’을 지피는 것이다. 저녁이 되어 홀로 남은 빈들도 외롭지 않다. 종소리보다 평화로운 어둠이 덮어주기 때문이다. 마을 하늘마다 무수히 피어난 환한 별들은, 여항의 삶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기표가 된다. 이처럼 무정물인 ‘하얀 연기’와 ‘석양’과 ‘어둠’과 ‘별들’은 시인의 심상 속에서 유정물로 전환되어 밀접히 연결되고 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홀로 있지 않다. 이 든든한 유대 속에 삶의 뿌리가 놓여있다.
2.
시인의 시선은 따뜻하다. 따뜻한 관찰자인 시인에게는 모내기조차도 우주와의 교감이다. 이앙기가 지나간 자리에 심기는 것은 어린 모가 아니다. ‘오월의 싱싱한 햇살 몇 오라기’이다. 그러니 모주머니를 어깨에 멘 구부정한 할머니가 흙 속에 꽂는 것은 ‘부유하는 어린 햇살들’이 되는 것이다(<모내기>). 시인은 어느 비오는 날 오후, 호박 모종 옮겨 심고 밭이랑 사이에 풀을 뽑는 촌노를 본다. 땅과 촌노는 구별되지 않는 일체이다. 그는 자기 밭 속에 스며들어 밭이 되고 만다(<촌노의 하루>).
하지만 관찰자는 외로움의 운명을 타고 난다. 누군가에게 선뜻 다가가 손을 내밀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다가와도 그는 그만큼 뒤로 물러선다. 거리를 확보해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따뜻함에도 불구하고 시 전편에 외로움이 묻어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의 외로움은 건조하지 않다. 그는 호수의 밤을 타고 산을 돌아 손님처럼 마을로 흘러들어오는 안개를 닮았다.
호젓한 가로등 아래 모여 수런거리다가
불빛 새는 외딴 처마 밑을 기웃거리다가
잠 못 드는 개구리들의 울음을 말없이 듣다가
개망초 피어나는 강둑에 걸터앉았다가
바람이 자는 들판에 켜켜이 고여 졸다가
(<안개> 부분)
수런거리고, 기웃거리고, 말없이 듣고, 걸터앉고, 졸고 있다 하여 비참하지는 않지만 외로움은 어쩔 수 없다. 시인은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을 청하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상처는 스스로 견뎌야 할 삶의 몫인 까닭이다. 삭풍같은 마른 외로움과 뼛속까지 에이는 겨울의 헐벗음을 감싸기 위해 단단하게 얼어붙은 강은 ‘햇살의 입맞춤에도’ 쉽게 녹지 않다. 새 살이 차오르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입춘 즈음>). 조개는 아프고 괴로우면서도 생살 속에 박힌 모래를 뱉어내지 않는다. 먼 훗날 어여쁜 임금께 바칠 진주를 바라보기 때문이다(<진주조개>). 시인에게 ‘사는 일은 늘/소리 없는 눈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 눈물이 뜨거워지면 ‘흔들리는 한 떨기’ 불꽃으로 피어오른다(<초>).
3.
외롭기에 시인은 소멸하는 것들에 눈길을 보낸다. 소멸하는 것들은 안쓰럽다. 하지만 잿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불사조처럼 시인은 소멸하는 것 속에서 불멸을 본다. 소멸과 불멸, 하늘과 땅, 하루와 영원, 삶과 죽음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긴밀히 내통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은 가능태가 현실로 이행하는 운동이라 했다. 즉 시간은 공간과의 싸움이라는 말이다. 시간이 우리를 본래적 삶을 향해 부르고 있음에 비해, 공간은 타성 속에 우리를 가두려 한다. 타성화된 공간 속에서 삶과 죽음은 서로를 외면한다. 공간은 우리로 하여금 소멸을 거부하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관찰자인 시인의 눈길은 공간을 넘어 영원을 응시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에게 소멸은 사라짐이 아니라, 변화의 계기가 된다. 시인이 ‘어둠이 와 닿기 전/지는 노을 따라’ 스스로 꽃잎을 접는 무궁화처럼 망설임없이 스러져 갈 수 있기를 소망(<무궁화>)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할머니처럼 매일/조금씩 주저앉는 초가’도 초라하지 않다. 금계국 핀 들길 따라 어김없이 바람이 찾아옴을 알기 때문이다(<외딴 집>).
봄이 되어서야
기다렸다는 듯
강가의 갈대들은 죽어간다
황량했던 불모의 겨울 내내
메마른 강변에서 홀로
숲을 이루었던 것들
황혼처럼 조용히 스러지는 저녁
노을에 젖은 가랑비가 내린다
갈대들이 죽어가는 길을 따라
비로소 봄이 들어선다
스러지는 갈대숲 무덤 딛고
파릇파릇 일어서는 작은 풀들
봄비 그친 아침
햇살이 이슬 털어낸다
(<사월> 전문)
봄은 갈대들이 죽어가는 길을 따라 온다. 갈대숲의 무덤이야말로 작은 풀들이 돋아나는 밭이 되는 것이다. 생명과 죽음은 이처럼 긴밀한 연결되어 있고, 소멸의 과정을 통해 불멸의 리듬을 만든다. 밀물과 썰물의 주기적 순환이 바다를 푸르게 유지시키는 것처럼, 낮과 밤의 순환이 생명의 바탕인 것처럼, 생명과 죽음의 순환 속에서 우주가 숨쉬고 있다. 그러니 죽음과의 대면을 늘 연기하며 살기 원하는 이들의 삶은 천박을 면하기 어렵다. 죽음 혹은 소멸의 빛에 비추어 보아야 삶은 무지개빛 광휘로 빛나게 된다. 시인이 자기 마음 갈피를 뒤적이다가 ‘빛바랠 줄 모르고’ 여전히 푸른빛으로 남아 있는 오래된 애착 한 잎을 나뭇가지 끝에 매달아 두는 까닭도 조락(凋落)의 순환 속에 들고자 함이다.
다섯 살 무렵 아버지의 상여를 따라 오르던 산에, 시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오른다. 무덤가에 쭈그려 앉아 잡초를 솎아내며 그는 오래 전 봉인해 두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관을 연다. 하지만 관 속에는 아무도 없다. 아버지는 어디에 가신 것일까? 그때
동시에, 사태라도 난 것인지
온 산을 흔드는 웃음소리
까르르 까르르
무지개 미끄럼 타듯, 구름다리 건너듯
할아버지 무덤 오르며 내리며
구르는 아이들이 쏟아내는
봄 햇살보다 눈부신 웃음
(<만남> 부분)
시인은 아이들의 눈부신 웃음 속에 일어서신 아버지를 본다. 이승과 저승이 이렇듯 상쾌하게 내통할 수 있다니. 이런 이미지는 요양원에 머물며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도 등장한다. 가을볕을 쬐고 앉아 기억을 풍장하는 것처럼 고요한 어머니, 그리고 시끄럽게 뛰어노는 아이들. 시인은 ‘어머니의 침묵으로/깊어진 가을 숲 속’에서 환하게 울려나는 아이들의 함성을 듣는다(<침묵>). 어머니는 그 함성 속에 이미 녹아들고 있다. 소멸과 불멸은 되먹임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4.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남보다 커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모습을 갖춰가는 것이다. 처마 높이까지 자라 태양만큼 노란 꽃들을 피워내는 해바라기나, 낮은 장독대 둘레에 드문드문 피어나는 풀꽃보다 작은 채송화나 모두 제 모습으로 한 세상 살고 있다. 생명의 세계는 무등(無等)의 세계이다. 높고 낮음이 없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높고 낮음의 차별상을 만들며 산다.
크고 작은 것이
무슨 상관인가
모두 하늘을 향해
피어난 꽃들인 것을
큰 일을 하든
작은 일을 하든
무슨 상관인가
하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무슨 상관인가> 부분)
높고 낮음이 문제가 아니라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주어진 삶을 견디며 살아내는 것이다. 흐르면서 얼고, 녹이면서 또 흐르는 것이다. 밟히면서도 파릇파릇한 민들레처럼, 칼칼한 흙바람 맞으며 피어나는 냉이꽃처럼 다만 피어나는 것이다(<봄비>). 장맛비에 꺾어진 허리를 다시 곧추 세우며 일어서는 옥수수처럼(<태풍 민들레>) 영혼에 깃든 습기들을 말리며 일어서는 것이다. 그러다가 주인이 부르시면 망설임 없이 스러져가는 것이다(<무궁화>). 시간 여행자인 시인은 여전히 외롭지만, 누군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 주변머리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가야 할 곳을 알고 가고 있다. 시간의 리듬을 타고 그가 마침내 이를 곳은 어디인가? 세상의 관찰자인 그의 가슴은 속으로 뜨겁다. 해를 삼킨 김기창 화백의 닭처럼 그의 가슴에는 하늘이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높고 멀어
하늘이라는데
당신의 박동소리
이토록 가깝고 생생하니
내 가슴 이렇게
일렁거릴 수밖에
크고 넓어
하늘이라는데
그대가 내 안에 들어와 있으니
나 어쩔 수 없이
넘쳐날 수밖에
(<파도> 전문)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 톺아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심이 뭐예요?’ (0) | 2015.09.22 |
---|---|
이 성전을 허물라 (0) | 2015.09.09 |
예수라는 원천에 이르고 싶다 (0) | 2015.08.12 |
영혼의 둔감을 경계하며 기다릴 뿐 (0) | 2015.08.05 |
대지에서 솟아나는 영성의 향기 (0) | 2015.07.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