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톺아보기(15)
이 성전을 허물라
모두가 안에서 단란하고 오붓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 같은 데, 홀로 문 밖에 내몰린 듯싶어 외로움에 사무쳤던 때가 있었다. 그때 먼 곳에서 들려왔던 교회 종소리가 한 순간 내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종소리에 이끌려 찾아간 교회, 그곳에서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 속에 머물고 계신 분을 만났다. 추운 겨울 아침, 기도실 마룻바닥에 햇살이 비쳐들면 곳곳에 보석처럼 빛나는 것이 보였다. 새벽마다 성도들이 흘리고 간 눈물이 얼어 수정처럼 보였던 것이다. 결핍과 고통이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는 미학적 깨달음에 가슴 벅차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 시절은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우련한 풍경으로만 남아 있다. 어느 동네든 성채처럼 거대해 주변을 압도하는 교회가 참 많이 세워졌다. 말구유와 십자가, 수건과 대야로 요약할 수 있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담기에 지나치게 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본本’을 붙잡지 못할수록 ‘말末’에 집착하는 게 인간의 버릇이다. 예수 정신을 꼭 붙잡는 이들이라면 어찌 규모에 집착하겠는가? 교회를 세우기 전에 먼저 빈민가에 가서 그들의 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이라고 말했던 마하트마 간디의 충고가 아프게 떠오른다.
사람들은 성전 건축을 솔로몬의 최대 치적으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전사인 동시에 시인이요 정치가였던 아버지 다윗도 이루지 못한 꿈을 그가 성취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그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이집트 땅에서 우리의 조상을 이끌어 내실 때에,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는데, 나는 주님의 언약이 들어 있는 궤를 놓아 둘 장소를, 이렇게 마련하였습니다.”(왕상8:21) 성전 건축을 출애굽의 완성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 갖는 신학적 의미에 대한 평가는 일단 유보하고, 성전 건축이 이스라엘 역사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살펴보자.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는데 필요한 백향목과 잣나무를 얻기 위해 두로의 히람 왕에게 매해 밀 이만 섬과 짜낸 기름 스무 섬을 보내주었다. 그것은 물론 백성들의 고혈이었다. 게다가 솔로몬은 레바논에 파견하는 벌목꾼 삼만 명, 짐을 운반하는 사람 칠만 명, 산에서 돌을 떠내는 사람 팔만 명을 징발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조세 부담은 물론이고 노역에까지 시달렸으니 어느 가정인들 온전했을 리가 없다. 어사 이몽룡이 변 사또의 생일잔치 자리에서 읊었던 시가 절로 떠오른다. “금잔의 좋은 술은 만백성의 피요, 옥쟁반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다.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드높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출애굽의 완성으로 보았지만, 스스로 ‘새로운 바로’가 되어 평등의 공동체를 ‘새로운 애굽’으로 만들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분단이었다. 솔로몬이 세상을 떠나자 북부 지파 사람들은 르호보암을 찾아와 선왕이 메웠던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왕은 단호히 거절한다. 다윗 가문으로부터 기대할 것이 없음을 깨달은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옹립하면서 남북 분단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무리한 성전 건축이 빚어낸 참상이 이와 같았다.
그에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이 출애굽 공동체가 함께 세웠던 성막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라는 소명을 가슴에 품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성막을 함께 세웠다. 성막을 짓기 위해 필요한 예물은 결국 백성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물 봉헌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라는 말이다. 여하한 형태의 강요나 강제도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금이나 은을 봉헌하는 이들도 있었고, 각종 짐승의 가죽을 봉헌하는 이들도 있었고, 여러 가지 빛깔의 실을 봉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기여는 경중이 가려지지 않았다. 모두가 기쁨으로 헌신했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솔로몬의 길을 가고 있는가? 출애굽 공동체의 길을 가고 있는가? 온갖 불법을 자행하고 편법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고는 그것을 하나님의 도움 혹은 은혜로 포장하는 일은 제발 그만 두어야 한다. 30여 년 전 교인들의 자발적 헌신으로 아담한 예배당을 짓고 봉헌하는 날, ‘이 성전을 허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던 어느 목사님이 떠오른다. 그는 건물에 집착하는 순간 예수 정신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예수 정신이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위선과 자기만족임을 경고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제 다시 시작할 때이다. 규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본질을 꼭 붙들 때 교회는 든든히 서간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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