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28)
자책이 전부일 수는 없다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이 예루살렘 백성(百姓)이 항상(恒常)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固執)하고 돌아오기를 거절(拒絶)하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正直)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악(惡)을 뉘우쳐서 나의 행(行)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者)가 없고 전장(戰場)을 향(向)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各各) 그 길로 행(行)하도다 공중(空中)의 학(鶴)은 그 정(定)한 시기(時期)를 알고 반구(班鳩)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百姓)은 여호와의 규례(規例)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예레미야 8:4-7).
‘오십 보 백 보’라는 말이 있다. ‘오십 보 도망친 사람이 백 보 도망친 사람을 보고 겁쟁이라고 비웃는다’는 데서 나온 말로, 좀 낫고 못한 차이는 있으나 크게 보면 서로 어슷비슷함을 이르는 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뜻이 되겠다.
‘오십 보 백 보’라는 말은 〈맹자〉 ‘양혜왕’에 나오는 고사이다. 맹자가 양혜왕을 찾아왔을 때, 양혜왕은 어떻게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맹자는 왕에겐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이라 대답함으로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에 대한 관심을 은근히 질책하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전쟁에 나간 병사 중에 한 병사는 100보를 도망가고 또 한 병사는 50보를 도망갔는데, 50보를 도망간 병사가 100보를 도망간 병사를 겁이 많다고 비웃었다. 이 말을 들은 양혜왕은 도망간 것은 50보 도망간 병사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하자, 맹자는 모든 왕들이 부국강병을 이야기하는 것은 도망한 병사들과 같으며 그러기에 왕은 오로지 인의로만 정치를 펴야 한다고 설득했던 것이다.
예레미야서 곳곳에는 하나님의 탄식이 담겨있어, 예레미야의 탄식과 만난다. 하늘의 탄식과 땅의 탄식이 만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이 이스라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런데도 예루살렘 백성은, 왜 늘 떠나가기만 하고, 거짓된 것에 사로잡혀서 돌아오기를 거절하느냐?” <새번역>
“그런데 이 백성은 나를 배반하고 돌아오지 않으려고 버티니, 될 말이냐? 돌아올 듯 돌아올 듯 하면
서도 기어이 돌아오지 않는구나.” <공동번역 개정판>
“그런데 어찌하여 이 예루살렘 백성은 한 번 빗나가면 배반을 고집하느냐? 그들은 거짓에 사로잡혀 돌아오기를 마다한다.” <성경>
“그런데 어째서 이 백성은 길을 거꾸로 가면서도 계속 그 길을 고집하느냐? 거꾸로 된 그 길을! 그들은 한사코 거짓된 것을 따라가려 하고, 방향을 바꾸기를 거절한다.” <메시지>
‘항상’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어찌 내 백성들은 ‘항상’ 나를 떠나갈 수가 있을까, 중간 중간 돌아설 법도 한데 어찌 한결같이 나를 떠나갈까, 그 점을 하나님은 탄식하신다.
거꾸로 길을 가면서도, 돌아올 듯 돌아올 듯 하면서도 항상 떠나가는 백성들의 모습은 공중의 학만도 못하고, 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만도 못하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제 때가 되면 어김없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천국의 열쇠>를 쓴 크로닌은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를 드린다.
“제발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 지향을 보아 내 삶을 판단하소서.”
행위보다 중요한 것은 지향(指向), 방향이다. 비록 넘어지고 실수한다 할지라도 다시 일어나 바른 길을 가면 된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되면 넘어지지 않아도 항상 잘못된 길을 간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어떻게 해서 계속해서 떠나가기만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새번역> 6절 속에서 그 이유를 보게 된다.
“내가 귀를 기울이고 들어 보았으나, 그들은 진실한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일을 하다니!' 하고 자책은 하면서도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그릇된 길로 갔다. 마치 전쟁터로 달려가는 군마들처럼 떠나갔다.” <새번역>
‘자책은 하면서도’라는 말이다. 떠나는 이들도 자책을 한다. 우리가 이래도 되는 걸까, 뉘우치기는 뉘우친다. 그런데 자책을 할 뿐 고치지는 않는다. 고칠 마음이 없다. 자책을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면죄부로 삼았던 것이다. 바로 그 점이 ‘항상’ 하나님을 떠났던 이유였다. 자책을 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은 괜찮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자책이 전부일 수는 없다. 자책만 할 뿐 고치지 않는 것은 하나의 핑계일 뿐이다. 그럴듯한 고급 핑계이다. 자책하되 자신을 바로잡지 않는 것, 항상 하나님을 떠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은 항상 그렇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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