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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내 눈이 눈물샘이라면

by 한종호 2015. 10. 19.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29)

 

내 눈이 눈물샘이라면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根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殺戮) ()한 딸 내 백성(百姓)을 위()하여 주야(晝夜)로 곡읍(哭泣)하리로다”(예레미야 9:1).

 

우연히 헌책방에서 만난 강아지 똥동화를 읽은 뒤로 동화가 참 좋은 그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뒤로 동화를 찾아 읽고 써왔다. 동화는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쓰는 것이라는 권정생 선생님의 말도 좋았다. 인생에 대해서 뭔가를 안 다음에 써야 한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젊은 시절부터 동화를 썼던 것은 그저 내 마음에 찾아온 이야기를 스케치하듯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쓴 동화는 소리새이다. 시대의 어지러움을 두고 아파하는 젊음을 보며 쓴 동화였다. 새들이 모여 사는 마을 새터에 어느 날 이상한 소문이 번진다. 큰 폭풍이 찾아와 새터가 모두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비바람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많은 새들이 새터를 떠나가기 시작한다. 굵다란 나무들이 쓰러지자 모든 새들이 새터를 떠난다.

 

새터에 살던 새 중에 소리새가 있었다. 볼품없고 체구가 작은 새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노래를 잘 못했다. 예부터 조상들이 불렀다는 느리고 구슬픈 노래만을 고집스레 불렀다. 아무도 그런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다.

 

소리새는 새터를 떠날 수가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떠나면 어떡하나, 누구라도 남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유라면 그게 전부였다. 소리새는 새터에서 가장 높은 나무로 날아올라 노래를 불렀다. 소리새의 노래는 폭풍 속 새터를 떠나가는 새들의 마음속에 화살처럼 박혔다.

 

무슨 이유에선지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뒤 새들이 하나둘 새터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소문대로 새터는 모두 무너져 있었다. 어느 날 한 자리에 모인 새들이 자기가 새터로 돌아오게 된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이유가 같았다. 소리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소리새의 노래가 마음에 떠올랐고, 그것이 마음을 가득 채워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마침내 새들은 소리새를 찾기로 한다. 새터를 모두 뒤진 끝에 한 나무 끝에 매달려 죽은 소리새를 발견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채 죽은 소리새 곁으로 모여들은 새들은 소스라쳐 놀라고 만다. 소리새의 발목이 가지 끝에 철사줄로 칭칭 동여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늘로 향한 소리새의 부리가 형편없이 부러져 있는 것을 보면 소리새의 발목을 철사로 묶은 건 소리새 스스로가 한 일이었다.

 

고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새들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두들 참 서럽게 울고 있을 때 어디선가 소리새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무시했던 노래, 그렇지만 자신들을 새터로 돌아오게 한 그 노래를 한 목소리로 불렀다. 새터엔 소리새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노래를 부르느라 아무도 보지 못했지만 새들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소리새는 어디론가 다시 날아올랐다. 그는 결코 죽지 않았던 것이다.

 

소리새를 쓰며 끝내 떠날 수 없는 땅이 있다면 내 나라 이 땅과 인간다움이라는 곳 아닐까 생각했다.

 

차라리 내 눈이 눈물의 근원, 눈물샘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예레미야의 탄식은 참으로 애절하다. ‘근원’(根源)이란 물줄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곳혹은 사물이 생겨나는 본바탕을 의미한다. ‘뿌리 근’()근원 원’()이 합해진 말이다. ‘근원 원’ ‘계속할 원으로 새기는데,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 모양을 나타낸다. 언덕 아래에서 샘이 솟아나는 형상에서 온 말이다.

 

곧 다가올 일을 바라보고 있는 예언자의 눈에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모습이 벌써 보인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충분히 예감을 한다. 틀림이 없는 예감,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다. 예언자와 백성들 사이에는 어떤 틈도 보이지 않는다. 예언자는 백성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유다 백성을 이라 부르며, 사랑하는 딸이 당할 아픔과 수모에 온 몸과 마음을 떤다.

 

 

 

 

예언자의 가슴은 병이 들었고, 멍이 들었다.(8:18) 딸이 채찍을 맞는 모습을 바라보는 어미의 심정으로 자신이 상처를 입는다.(8:21) 상처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는 길르앗 지방의 향나무 진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절망한다.(8:22) 절망 끝에 예언자는 이렇게 탄식한다.

 

살해된 나의 백성, 나의 딸을 생각하면서,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 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 <새번역>

 

내 머리가 우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밤낮으로 울 수 있으련만, 내 딸 내 백성의 죽음을 곡할 수 있으련만.” <공동번역 개정판>

 

, 내 머리가 물이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라면 살해된 내 딸 내 백성을 생각하며 밤낮없이 울 수 있으련만!” <성경>

 

내 머리가 물 가득한 우물이었으면, 내 눈이 눈물의 샘이었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내 사랑하는 백성에게 닥친 재앙을 가슴 아파하며 밤낮으로 울 수 있을 텐데.” <메시지>

 

눈물겹다. 백성들은 자신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하는데,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등을 돌리고 있는데, 예레미야는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운다. 그냥 울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눈이 눈물샘이 되기를, 자신의 머리가 물 가득한 우물이 되기를, 흘릴 눈물이 마르지 않기를, 그래서 밤낮없이 울 수 있기를 원한다.

 

아픔과 실망으로 큰 상처를 준 백성들, 그럴수록 어떤 틈도 보이지 않는 예레미야, 백성들과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는 건 결국 눈물 밖에는 없다고, 예레미야는 뜨거운 눈물로 우리에게 일러준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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