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인문학 산책(34)
식민지 정신의 찬가
“인도가 영국에 식민지가 되어 안락을 누리고 있으며, 필리핀은 미국에게 통치를 받고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서 다들 안전한 생활을 하고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이 말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미국에서 운영하던 <태평양잡지>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일본의 식민지보다는 서양제국의 식민지, 특히 미국의 식민지가 되는 편이 낫다는 시사를 하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그의 프린스턴 대학 학위 논문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었습니다. 1910년에 발표된 이 논문의 논지는 제국주의 열강의 포위망에 갇혀 있던 조선의 영세중립이나 국제정치적 균형을 위한 주체적인 선택보다는, 미국이 주도하는 중립화였습니다. 이때 중립화는 미국이 조선에 대한 다른 나라의 개입과 간섭을 저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논리는 1919년이 되면 이른바 “위임 통치론”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장차 한국의 완전독립을 보장하는 조건 아래 국제연맹이 위임통치를 하면서 일본의 지배를 청산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우리 민족이 스스로 독립을 쟁취할 능력이나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 강대국 미국의 힘이나 제국주의 열강의 영향력이 주도하는 국제연맹에 기대어 나라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내자는 논지를 폈던 것입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이승만은 미국에서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통해 국내 정세에 영향을 끼치면서 일종의 신화적 존재로 군림해나가게 됩니다. 자신에 대한 국내의 무지와 환상에 기초해서 이승만은 미국의 힘에 의지한 정치를 펼쳐나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구체적인 과정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미군정의 배경을 가지고 친일우파를 규합시켜나간 이승만은 분단정권 수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맹렬하게 치닫습니다.
1948년 이 땅에 등장한 제1공화국은 이런 이승만의 정치적 본질과 지향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한국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앉혀놓을 수 있었고, 친일세력은 반공을 무기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냈으며 당시 74세의 노인이었던 이승만은 탐욕적인 권력의 화신으로 일관하는 독재자가 되어갔습니다. 다들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거론할 때마다 우리사회는 제1공화국의 권력적 본질과 국가적 정체성을 혼동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제1공화국의 역사적 오류와 독재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우리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정체성을 확보해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승만이 정치적으로 농락하고 무시했던 임정과 그런 그를 극복한 4.19가 대한민국의 헌법적 질서라는 점은 이러한 까닭입니다. 제3공화국과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곧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것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승만과 그의 권력체제인 제1공화국을 비판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도리어 그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세우는데 장애가 된 그와 그의 지지 세력의 모순과 반민족적 처신들을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 우리의 장래를 위해 거듭 의미 있는 작업일 것입니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던 작가 이병주의 그 유명했던 말처럼, 우리 역사는 밝은 태양에 내놓고 보기보다는, 음습한 그늘 아래 꾸며져 온 잘못된 정치적 전설이 압도해버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태양이 뜨면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게 될 단세포적 미생물들이 주인노릇을 하려는 것이 너무 오래인가 싶습니다.
게다가 이에 더하여, 요즈음 역사 교과서가 ‘국정화’로 가는 길이 아니면 마치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얼빠진 주장으로 식민지 노릇 하기를 자청하려는 자들이 여기저기서 해괴하게도 역사의 주인 노릇을 하려 드니,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체제에 찬사를 보낸 이승만의 정신사적 후예가 따로 없는 듯 합니다.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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