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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인문학 산책'

“미생(未生)을 위한 철학”

by 한종호 2015. 9. 25.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33)

 

“미생(未生)을 위한 철학”

 

 

비정규직의 모멸감과 격차사회의 모순을 드러낸 드라마 <미생(未生)>은 끝났지만, 현실의 미생은 여전히 미생인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일까? 이 드라마를 패러디한 방송 프로의 이름은 <미생물(微生物)>이었다. 아예 육안(肉眼)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시인 이문재의 <어떤 경우>라는 시의 전문이다. 어쩌면 이리도 고마운 시가 있는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한 “나”라는 존재가, 어느 한 사람에게는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는 깨달음은 누가 뭐래도 뜨거운 사랑이다. 그 “나”는 우리 모두다. 이걸 모르거나 무시하면, 우리는 누군가를 그저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쉽게 보거나 짓밟던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모독한다. 그건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인 존재를 사소하게 여기거나 그 존재감을 소멸시키는 것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장일순 선생이 살아생전에 쌀 한 톨 앞에 담긴 무게를 일깨웠을 때, 사람들은 그 안에도 웅장한 우주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보게 되었다. 가수 홍순관이 지은 “쌀 한 톨의 무게”는 그런 눈뜸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그런데 쌀 한 톨과 사람을 같은 저울추에 올려놓고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 무게는 아무래도 다를 듯하다. 담겨진 우주가 각기 다르기 때문일까? 하나는 태양계이고 다른 하나는 은하계? 물론 그건 아니다. 사람은 쌀 한 톨 안에도 우주가 스며들도록 햇살과 별빛 못지않게 한 몫을 하기 때문이다. 쌀 한 톨은 우주창조의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거듭 매 순간 창조되는 우주의 한 “주역”인 셈이다. 그 쌀 한 톨이 이 주역을 길러내는 힘이 되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바이나, 사람의 노고는 쌀 한 톨의 터이다.

 

문제는 인간이 그런 주역에게 주어졌던 본래의 기능을 오늘날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주 이야기》를 쓴 토마스 베리 신부는 이렇게 그 상실을 짚어낸다.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자연세계의 소리를 듣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더 이상 산이나 계곡, 강이나 바다, 태양, 달, 별들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동물들과 의사소통하는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일몰과 일출의 언어는 영혼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변환이었다.”

“동창(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우리의 옛 시조는, 태양과 비조(飛鳥)의 세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노을은 또 어떤가?

 

저녁노을 붉은 하늘 누군가 할퀸 자국
하느님 나라에도 얼굴 붉힐 일 있는지요?
슬픈 일 속상한 일 하 그리 많은지요?
나사는 세상엔 답답한 일 많고 많기에 …


 

시인 나태주의 <노을>이란 시다. 석양의 붉은 빛 속에서, 하루를 마치고 이리 저리 상처받아 고단해진 인간사를 본다. 저물어가는 노을에서 여유로운 낭만만 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몰과 일출의 언어는 우리의 삶에서 어느 새 사라져 가고 있다.

 

이렇게 살아가다보니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토마스 베리 신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지구를 산업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성취되는 경이로운 세계, 그것을 향한 진보는 결국 우주의 모든 존재를 가능케 했던 진화과정을 파괴시킨다.”

 

황폐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원천을 고갈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왜 그런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서로 분리되어 존재한 결과다. 이런 현실에서 자연이 피 흘리는 소리와 인간이 치러내는 고통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체감, 인간과 우주와의 일체감은 인간이 인간되는 근본이다. 그렇지 못하면, 인간이 매일 호흡하고 자신을 만들어가는 질료는 인간 자신을 파괴하고 해체하는 것들이 대부분이 되기 마련이다. 이기심, 지배욕, 오만, 거짓 등은 모두 사람의 영혼을 부패시키고 끝내는 자신을 실종시킨다. 자연을 약탈하고, 인간을 유린하면서 행복해지겠다는 생각과 행위는 마침내는 인간 자신을 향한 공격이 될 뿐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인간은 풀잎 하나, 나비 한 마리도 만들지 못하지만 그걸 지켜내는 것은 인간 자신이게 달려 있다. 그건 풀 한 포기, 나비 한 마리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우주 전체와 우리 자신이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우치는 마음에서 진정 이루어질 수 있는 능력이다.

 

이어져 있다는 것은 서로 간에 생명의 기운이 넘나들고 있다는 걸 느끼는 기쁨이다. 사랑의 핵심이다. 단절은 이 기쁨을 봉쇄해버리는 폭력이다.

 

미생의 삶을 보다 낫게 바꾸게 하려는 노력들은 현실에서 진압되기 일쑤이다. 비정규직의 현실을 다룬 영화 <카트>도 그런 진압의 현장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인 사람들이 그렇게 짓밟히고, 누군가에게는 우주의 무게로 존재하는 이들이 상처받고 고립 당한다. 서로 간에 뜨겁게 이어지는 감격이 이렇게 해서 조롱당하고 능멸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어짐의 관계를 복원할 때 비로소 미생에게 완생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만나고 느끼고 공감하고 끄덕이며 손을 잡고 함께 나가는 순간들이 우리에게 힘이 된다. 그로써 우주의 기운이 그런 우리에게 벅차게 스며들 것이다. 폐허가 되살아난다.

 

어떤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 전부인 사람들이다. 이 믿음에서 한 발자국도 후퇴할 생각이 전혀 없다.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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