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자리의 종횡서해(18)
하나님을 창밖으로 내던져버린 세상에서
이름 석 자로도 충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 있지요. 그의 이름 속에 그의 삶이 오롯이 담겨 있는 경우입니다. 제게는 ‘홍순관’이라는 이름이 그렇습니다. 이름 뒤에 그 무슨 호칭이나 설명을 따로 붙이지 않아도 이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홍순관이라는 이름 속에는 그가 걷는 길과, 품은 꿈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상처 입은 이들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애정과, 그러면서도 지금의 자신이 맞는지에 대한 아픈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홍순관이라는 이름 뒤에 집사라는 호칭을 붙입니다. 집사라는 호칭으로 교회라는 틀 안에 묶어두려는 마음에서가 아닙니다. 행여 집사 위에 목사를 두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호칭이라는 것이 누군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틀이라 한다면, 집사님이 교회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학생 때부터 교회에서 살고, 금식을 하고,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집사님이 서 있는 바탕은 분명 교회를 향한 애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래된 익숙함보다는 집사님의 바탕을 공감하는 마음이 제가 부르는 ‘집사’라는 호칭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책 《나는 내 숨을 쉰다》를 읽으며, 잘 알고 있다 싶은 사람의 새로운 면을 대하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지만 처음으로 목욕탕에 같이 들어가 목욕을 하며 지낼 땐 몰랐던 아름다운 몸매와 근육, 생각지도 못했던 상처들을 처음으로 대하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집사님이 부른 25개의 노래에 대한 짤막한 단상은 분명 글이었지만 한 편 한 편의 조각 작품을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집사님이 직접 쓴 노랫말이 그랬고, 노랫말에 대한 설명이 그랬습니다. 집사님은 언어로 조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가사든 곡이든 허투루 노래를 만들지 않는 장인 정신이 있기에 ‘내겐 언어가 노래보다 앞서죠!’ 그렇게 말할 수 있었겠다 싶습니다.
그것이 신앙이든 일상이든 군더더기를 모두 버리고 나면 꼭 필요한 것만 남게 되겠지요. 그런 점에서 집사님은 풍경보다는 여백을, 소리보다는 침묵을 노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사님의 노래가 향하고 있는 시선도 다시 한 번 새로웠습니다. <새의 날개>처럼 자유를 꿈꾸기도 하고, 하나님과 하나 된 교회 이웃과 하나 된 교회 말씀과 하나 된 신자가 추는 <천국의 춤>을 꿈꾸기도 하고, 기도할 때 큰 산이 되고 바다가 되고 마침내 기도가 되는 <나무>를 꿈꾸기도 하고, <은혜의 강가로> 나가 하나님의 원 안에 머무는 시간을 꿈꾸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윤동주의 시선을 따르기도 하고, 방금 나를 지나간 바람은 어떤 바람이 되었을지 <어떤 바람>을 바라보기도 하고, 하나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며 높은 곳이 아니라 <산 밑으로> 향하기도 하고, 하늘나라를 <여행> 하기 위해 일부러 발아래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기에 <민들레 날고>처럼 다른 이에게서 빌린 옷이 아니라 내 옷을 입고 <나는 내 숨을 쉰다>고 노래하며, 온 우주의 무게가 담겨 있는 <쌀 한 톨의 무게>를 재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천진함을 따라가는 <저 아이 좀 봐>는 지극함을 향하고 있고, 아흔아홉 번 정신대할머니들의 눈물을 마주한 뒤에야 부를 수 있었던 <대지의 눈물>은 뻔뻔한 이들이 어물쩍 덮으려 하는 질곡의 골짜기를 보듬고 있습니다.
집사님은 집사님의 노래와 노랫말에 관한 단상을 두고 ‘노래신학’이라 했습니다. 억지와는 거리가 먼 집사님의 성품을 잘 아는 저에게는 그 말이 외로운 항변처럼 들립니다. 신학은 결코 신학자만의 점유물일 수 없어 누구라도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신앙과 접목시킬 수 있고, 그것이 신학을 윤택하고 풍성하게 하는 길이라 여깁니다. 그런 점에서 집사님이 노래를 통해 길어낸 사유는 신학의 큰 자양분이 되겠지요.
굳이 드러내지 않음으로 마땅히 드러낼 것을 드러내는 집사님의 삶과 노래를 두고 볼 때 ‘노래신학’이라는 말은 결코 가볍지도 흔하지도 않은 노래를 별난 것으로 밖의 것으로 가벼이 함부로 대하는 풍조 앞에서의 조용한 분노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집사님, 너무 외로워하지는 마세요. 작고 나직한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는 세상이 온다면 분명 집사님의 노래는 신학이라는 울타리까지 넘어서는 하나의 강으로 자리매김이 될 테니까요.
저는 그동안 부른 노래에 관한 집사님의 글(특히 ‘덤’)도 좋았지만 지강유철 씨와 9시간 넘게 나눈 속 깊은 이야기에 더 마음이 갑니다. 그야말로 집사님의 ‘속살’을 대하는 듯싶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꾸밈이 없지만 더욱 집사님의 민낯을 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두 분이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깜짝 놀란 대목이 몇 군데 있습니다. 당대를 주름잡던 레코드 사장 앞에서 70곡의 노래를 연속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는 놀람보다는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개런티가 있는 초청보다는 노 개런티의 초청이 더 많다는 이야기도 어렴풋 짐작했던 일이었습니다. 저 또한 원고료와 상관없이 글을 쓰는 일이 적지 않아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끼게도 됩니다.
책을 통해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은 집사님이 노래를 택한 이유였습니다. 미술, 서예, 조각, 무대미술 등 집사님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관심으로는 얼마든지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었겠다 싶으니까요.
노래를 좋아하고 잘해서 노래의 길을 걷는 것 아닐까, 막연하게 가졌던 생각은 책을 읽으며 보기 좋게 깨어졌습니다. 노래를 택한 이유를 집사님은 단언을 하듯 교회개혁 때문이라 했지요. 오랫동안 꿈꿔오며 준비해온 이탈리아 국립미술원 ‘까라라 아카데미’ 유학을 포기할 만큼 집사님에게 교회는 너무도 매력적인 곳이라 했습니다. “내겐 가수로서 이름을 날리겠다는 것보다도 교회개혁이, 세상개혁이 더 중요했어요.”라고도 했습니다.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꿈을 접었던 이유가 교회개혁을 위해서였고, 교회개혁을 위해 선택한 것이 노래였다는 말은 얼마나 놀랍고 생경스럽게 다가오는지요. 목회를 생각하는 이들에게 그만한 고민과 결단이 있는 것인지도 돌아보게 됩니다. 다른 가능성을 접고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노래를 택했다는 집사님의 선택은 비장하게까지 느껴집니다.
집사님이 걷는 길을 생각하면 외로움, 무모함, 어리석음, 외고집 등이 떠오릅니다. 어찌 노래가 교회개혁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까 싶고, 그렇게 생각했다 할지라도 어떻게 그 생각을 삶으로 밀고 나갈 엄두를 냈을까 싶기도 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 상황을 보면 마음이 아뜩해집니다. 국민들 중 10.2%만이 기독교인을 신뢰한다는, 결국은 기독교인마저도 기독교인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얼마 전 보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나의 성소에서 멀리 떠나가게 하고 있다”(에스겔 8:6) 하신 주님의 탄식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주님을 주님의 성소에서 멀리 떠나가게 한 것은 주님을 모르거나 믿지 않는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의 담벽을 헐고 보니 그 안에서 역겹고 가증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지요. ‘벽을 헐고 보니’ 말이지요. 70명의 장로들이 우상의 방을 만들어 놓고 우상에게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상의 방 벽에는 온갖 벌레와 불결한 짐승 등 우상들이 사방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주님이 우리를 보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둠 속에서’ 말입니다. 생선가시 목에 걸리듯 ‘담벽을 허니’ ‘어둠 속에서’라는 말이 걸립니다. 여인들은 바벨론의 농경신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을 하고 있었고, 주님을 등지고 동쪽의 태양을 향하여 절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심판을 선언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겨운 일 때문에 슬퍼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그리게 하고, 표가 없는 이들을 가차 없이 치라 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고 두려운 것은 심판을 명하시며 “우선 나의 성소에서부터 시작하여라.”(에스겔 9:6)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피할 길 없는 무서운 심판을 죄가 가득한 아골 골짜기에서가 아니라 성소에서부터 시작하라고 명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개혁을 위해 집사님이 택한 도구가 노래라 했을 때 저는 그것을 결코 유약한 선택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집사님의 노래가 우리가 잃어버린 염치를 되찾게 해주는 표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집사님이 마음을 담아 부르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곪고 병들고 비뚤어진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돌아보며 슬퍼하고 탄식하는 일들이 나타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집사님의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집사님의 책 발간을 축하하며 열린 북 콘서트 자리, 집사님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야기 손님들이 저마다 집사님에 대한 공감과 격려와 지지의 마음을 쏟아놓았을 때, 노래를 부르러 나온 집사님은 그 시간을 두고 견디기 힘든 ‘고문’이라 했지요. 모두들 웃었지만 마음은 아팠습니다. 착한 사람 어깨에 무거운 바윗돌을 얹고 있다고, 이야기 손님 중의 하나였던 저 또한 같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거든요.
낙숫물이 섬돌을 뚫는다지만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은 매번 산산이 깨어져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그 모든 것을 견딘 결과가 섬돌을 뚫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 모든 과정을 당연한 듯 견디라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일일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말 중에 ‘불환무위 환소이립’(不患無位, 患所以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에 나오는 말로 ‘자리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지를 걱정하라’는 뜻입니다. 목회할 자리가 없다고 걱정하는 신학교 후배들에게 정말로 없는 것은 ‘자리’가 아니라 ‘사람’이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집사님이 책에서 인용한 밴드 플레밍 유스의 <Ark Two>에 실린 ‘The Planets’에 나오는 노랫말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창밖으로 내던져 버린 때의 진상이란 이렇다. 그 어떤 것도 믿지 않게 된 것이 아니라, 아무 것이나 무엇이든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창밖으로 내던진 세상의 참 모습은 아무 것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아무렇게나 함부로 쉽게 믿는 것,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왜 가벼운 것인지를 아프게 돌아보게 됩니다. 아무 것이나 무엇이든 믿는,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한없이 가벼워진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싶습니다.
하나님을 창밖으로 내던져 버린 시대, 그럴수록 한 구절 한 구절 정직한 마음을 담아 부르는 집사님의 노래가 더욱 필요하겠다 싶습니다. 그래야 주변에서 일어나는 역겨운 일을 두고 슬퍼하고 신음하는 일이 가능하겠다 싶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성소에서부터 쫓겨나고 있는 이 시대, 집사님의 노래가 슬퍼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해 모시옷을 입고 허리에 먹통을 찬 서기관의 걸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또한 집사님의 마음에 또 하나의 바윗돌을 얹는 일이 아니기를 빕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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