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35)
주님은 그저 신기루입니다
“나의 고통(苦痛)이 계속(繼續)하며 상처(傷處)가 중(重)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주(主)께서는 내게 대(對)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예레미야 15:18).
주님 앞에 진솔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숨김없이 털어놓은 것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주님을 ‘사람의 마음을 통찰하시는 분’ ‘사람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라 고백을 하면서도, 그분 앞에 솔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아시는 분 앞에 때로는 충분히 정직하지 않은 말로, 때로는 일부러 말하지 않음으로 마음을 가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는 한다.
그날의 새벽기도를 잊지 못한다. 단강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였으니 오래 전의 일이다. 새벽예배를 마친 뒤 집사님의 기도가 시작됐다. 처음 예배당이 두세 평 되는 작은 사랑방이었던지라 집사님의 기도는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집사님의 기도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하나님, 해두해두 너무 하십니다.”
어떻게든 자식들 키워보려고 혼자 발버둥을 치며 농사를 지었는데, 어찌 된서리를 내려 곡식들을 다 태워죽일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거둘 것이 남아 있지 않으니 도시로 식모살이라도 떠나야겠다고 했다. 울먹울먹 감정이 북받쳐 뚝뚝 끊기면서도 구구절절 이어진 집사님의 기도는 기도라기보다는 항변에 가까웠다.
집사님의 형편과 사정을 잘 아는 터라 집사님의 기도를 들으며 시방 하나님의 가슴이 뜨끔하겠는 걸 싶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도 한 마디를 보탰다.
“하나님, 뜨끔한 걸로 끝내서는 안 돼요.”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백성들이 원하는 말 대신 주님이 전하라 하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복과 평안을 원했지만, 예레미야는 주님의 심판을 경고했다.
그런 예레미야를 백성들은 저주하기까지 한다.(15:10) 백성들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15절) 예레미야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지만(16) 결국은 외톨이가 되고 만다(17절).
고통이 계속 되며 상처가 낫지 않는 현실 앞에서 예레미야는 자기의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새번역>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까?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 <성경>
지금 예레미야에게 있어 주님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비가 오면 물이 보이다가도 비가 안 오면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여름 시내와 다를 것이 없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예레미야의 탄식을 이렇게 실감나게 옮겼다.
“그러나 이 떠나지 않는 고통은 왜입니까? 어찌하여 이 상처는 나아질 가망 없이 점점 심해져만 가는지요? 하나님, 주님은 그저 신기루입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오아시스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메시지>
주님은 그저 신기루라니,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오아시스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니, 예레미야의 고백이 차라리 시원하고 솔직하다. 어느 것도 꾸미거나 감추지 않는다.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다 털어놓고 있다.
이만한 탄식이 어디 있을까 싶다.
이만한 신뢰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한희철의 '두런두런' >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심히 썩은 것 (0) | 2015.12.18 |
---|---|
그들이 너에게 돌아올망정 (0) | 2015.12.11 |
가뭄 끝은 있다고 말하지만 (0) | 2015.11.27 |
모두를 취하게 하여 (0) | 2015.11.18 |
어떻게 말과 경주하겠느냐? (0) | 2015.11.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