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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어떻게 말과 경주하겠느냐?

by 한종호 2015. 11. 8.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32)

 

어떻게 말과 경주하겠느냐?

 

 

“여호와여 내가 주(主)와 쟁변(爭辯)할 때에는 주(主)는 의(義)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主)께 질문(質問)하옵나니 악(惡)한 자(者)의 길이 형통(亨通)하며 패역(悖逆)한 자(者)가 다 안락(安樂)함은 무슨 연고(緣故)니이까 주(主)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長成)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主)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여호와여 주(主)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主)를 향(向)하여 어떠함을 감찰(鑑察)하시오니 양(羊)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爲)하여 그들을 예비(豫備)하옵소서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地方)의 채소(菜蔬)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滅絶)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거민(居民)이 악(惡)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結局)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네가 보행자(步行者)와 함께 달려도 피곤(疲困)하면 어찌 능(能)히 말과 경주(競走)하겠느냐 네가 평안(平安)한 땅에서는 무사(無事)하려니와 요단의 창일(漲溢)한 중(中)에서는 어찌하겠느냐”(예레미야 12:1-5).

 

신학교에 들어간 뒤 적지 않은 날들을 혼란 속에서 보냈다. 강의실에서 만난 교수님들은 신입생으로 들어온 우리들을 신학이라는 나무 위에 올려놓고선 마구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뭔가를 벗겨내려 한다는 것은 짐작했지만 그것은 내내 지켜온 순결처럼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어지러워 떨어질 것 같았고, 바닥에 떨어지면 막연하게 꿈꾸었던 목회는 멀어질 것 같았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기도와 성경공부 등 단순한 경건훈련만을 생각하고 신학교에 들어간 내게 처음으로 대면하는 신학의 세계는 그토록 낯설고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도무지 맞지 않는 옷을 걸친 듯 거북하고 어색하게 여겨졌다.

 

다행히 학교에는 나와 비슷한 혼란을 느끼는 어리바리한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는 강의를 듣다말고 슬그머니 눈짓을 주고받고는 도망치듯 강의실을 빠져나와 우리가 믿던 ‘하나님’은 누구고 교수가 교실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누구인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교실 대신 찻집에서 이어지던 그런 토론은 제법 진지했고, 그러다가 날이 저문 날도 제법이었다.

 

순진한 믿음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신학의 입문과정들, 그 때 큰 위로가 되었던 책이 폴 틸리히의 설교집이었다. 《흔들리는 터전》, 《새로운 존재》, 《영원한 지금》 등 작은 문고판 설교집을 찾아 열심히 읽었다. 그의 설교에는 신학공부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정돈시켜 주는 깊이와 힘이 있었다. 폴 틸리히의 설교를 읽으며 마음에 닿는 구절들에 열심히 밑줄을 그었는데,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신앙이란 의심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의심을 신앙의 한 요소로 받아들임으로써 의심을 극복하는 용기입니다.”

 

목청껏 기도하며 의심의 찌꺼기까지도 내어버리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 배워왔던 터에, 정직하고 용기 있게 질문을 하는 것이 얼마든지 신앙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준 것은 그 한 마디였다.

 

 

 

 

예의였을까, 주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면서 예레미야는 조심스레 질문을 한다. 주님의 공정성에 관한 질문이다. 악(惡)한 자(者)의 길이 형통(亨通)하며 패역(悖逆)한 자(者)가 다 안락(安樂)함은 무슨 연고(緣故)’(1절)인지를 묻는다. 형식은 질문이지만 내용은 항의에 가깝다. 이래도 되느냐며 따지는 형국이다. ‘주(主)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長成)하여 열매를 맺었다’(2절) 하는 걸 보면 그 모든 책임이 주님께 있다며 주님을 추궁하고 있는 듯하다.

 

예레미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이 전혀 알지를 못하고 있는 비밀을 일러주기라도 하듯이 ‘그들의 입은 주(主)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2절) 한다. ‘마음은 멀다’라는 말을 직역하면 ‘콩팥들에서는 멀다’라는 뜻이다. 마치 자신이 사람들의 콩팥까지도 꿰뚫어보고 있다는 투다.

 

‘양(羊)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爲)하여 그들을 예비(豫備)하옵소서’(3절)라는 말은 얼마든지 기도로 보이지만, 앞으로 하실 일을 자상하게 알려드리는 조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째 하시는 일이 도통 시원치 않은 주님께 항의도 하고, 책임도 추궁하고, 주님이 알지 못하시는 것을 알려드리기도 하고, 이렇게 하시는 게 좋겠다며 충고를 아끼지 않는 모습이다.

 

이런 예레미야의 모습은 낯설다. 더없이 철없고 교만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이런 모습이야말로 어김없는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모습 하나 하나는 주님 앞 우리들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다. 주님 앞에서 수도 없이 지나가는 우리의 숱한 생각이 그런 것 아닌가?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들으신 주님께서 대답하신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이 기가 막히다.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해도 피곤하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네가 조용한 땅에서만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요단강의 창일한 물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 <새번역>

 

“네가 사람과 달리기를 하다가 지쳐버린다면, 어떻게 말과 달리기를 하겠느냐? 편안한 곳에서나 마음 놓고 살 수 있다면 요르단 강 가 깊은 숲 속에서는 어떻게 살겠느냐?” <공동번역 개정판>

 

“네가 사람들과 달리기를 하다가 먼저 지쳤다면 어찌 말들과 겨루겠느냐? 네가 안전한 땅에만 의지한다면 요르단의 울창한 숲 속에서는 어찌하겠느냐?” <성경>

 

“예레미야야, 네가 사람들과의 경주에서도 이렇게 피곤해하면, 앞으로 말들과는 어떻게 경주하겠느냐? 평온한 시절에도 정신을 가누지 못하면 앞으로 고난이 홍수 때의 요단강처럼 물밀 듯 닥쳐올 때는 어떻게 하려느냐?” <메시지>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이 닥칠 터인데 눈앞에 펼쳐진 일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약해진다면 장차 나타날 일을 어찌 견디겠느냐 하신다. 지금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들과의 달리기일 뿐, 곧 닥쳐올 일은 말들과 달리기를 해야 할 일들이다. 사람과의 달리기와 말과의 달리기는 비교불가, 사람과의 달리기에서 지친다면 어떻게 말들과의 달리기를 감당할 수가 있겠느냐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쉽게 낙심하고 절망해서는 안 된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더 큰 일이 얼마든지 닥쳐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의 일로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쳐온다 하여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하고 있어야 한다. 주변의 일과 사람들 때문에 실망하고 지쳐 쓰러지는 것은 혹 사람에게는 동정을 살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는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다. 무릇 하나님의 사람이란 절망의 땅 한복판 천릿길을 단숨에 내달리고서도 그 이상을 견딜 수 있는 숨이 여전히 남아있어야 한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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