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끝이 허망한 이들

by 한종호 2016. 2. 1.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43)

 

끝이 허망한 이들

 

 

네가 백향목(柏香木)으로 집짓기를 경쟁(競爭)하므로 왕(王)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公平)과 의리(義理)를 행(行)치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亨通)하였었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者)와 궁핍(窮乏)한 자(者)를 신원(伸寃)하고 형통(亨通)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예레미야 22:15-16)

 

당시 유다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나마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안간힘을 쓴 요시야 왕 덕에 무너져가던 나라가 얼마간 버틸 수 있었지만, 결국 요시야는 전쟁에서 전사하고 만다.

 

앗시리아를 도우려고 유프라테스 강변의 갈그미스로 올라가는 이집트의 느고 왕과 므깃도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를 당하고 만 것이다(열왕기하 23:29-30). 요시야의 시체는 병거에 실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온 백성은 요시야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퍼한다(역대하 35:24-25).

 

요시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이집트의 느고 왕은 여호아하스를 왕위에서 끌어내린 뒤 이집트로 유배를 보낸다(열왕기하 23:31-34).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른 지 석 달 만의 일이었다.

 

 

 

 

이집트로 끌려간 여호아하스는 이름이 살룸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유다가 이집트의 속국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호아하스가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이집트에서 종말을 맞게 될 것은 예레미야가 예언을 한 바 있다(예레미야 22:10-12).

 

느고 왕은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을 왕으로 세우며 그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다. 이제 유다는 이집트에 과중한 공물을 바치는 무거운 멍에를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여호야김 왕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예레미야 22장은 여호야김 왕이 한 일을 이렇게 말한다.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으며, 동족을 고용하고도, 품삯을 주지 않는 너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13절) <새번역>

 

<공동번역>에서는 좀 더 직설적으로 번역을 했다.

 

“부정한 수법으로 제 집을 짓고 사취한 돈으로 제 누각을 짓는 이 몹쓸 놈아! 동족에게 일을 시키고, 품값을 주지 않다니!”

 

지금 나라는 위태하게 기울어가고 있다. 강대국들의 힘겨루기 속에서 나라의 운명이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과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이 했던 일은 불의로 궁전을 짓고 불법으로 누각을 쌓는 일이었다. 뿐만이 아니다. 동족에게 일을 시키면서 품삯은 주지도 않았다.

 

“‘내가 살 집을 넓게 지어야지. 누각도 크게 만들어야지’ 하면서, 집에 창문을 만들어 달고, 백향목 판자로 그 집을 단장하고, 붉은 색을 칠한다.”(14절)

 

여호야김의 생각 속엔 오로지 궁궐과 누각을 더 좋은 재료로 더 크게 짓는 것밖엔 없다. 그런 여호야김을 두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남보다 백향목을 더 많이 써서, 집짓기를 경쟁한다고 해서, 네가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겠느냐?”(15절)

 

궁궐을 크게 짓는다고,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한다고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다. 온통 건축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긴 여호야김에게 그의 아버지 요시야 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가 공평(公平)과 의리(義理)를 행할 때 형통(亨通)하였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지 건축 사업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신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16절)

 

나라가 기울어가건 말건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를 늘리며 공적을 쌓기에 급급한 지도자는 어느 시대에나 있다. 그들은 자신이 업적을 크게 이루면 이룰수록 좋은 지도자가 된다고 생각을 한다. 백성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고, 하늘의 뜻을 받들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들의 결국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도 여호야김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들도 ‘슬프다!’ 하지 않고 여자들도 ‘애석하다!’ 하지 않을 것이다. ‘슬픕니다, 임금님! 슬픕니다, 폐하!’ 하며 애곡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끌어다가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멀리 내던지고, 마치 나귀처럼 묻어 버릴 것이다.”(18-19절) <새번역>

 

불법으로 대단한 업적을 이루지만, 최후는 너무도 초라한 이들이 있다. 이룬 업적이 화려하면 할수록, 그 끝이 허망한 이들이 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