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43)
마음의 파수꾼
영성의 대가는 영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들뜬 바깥일을 멀리하여라.
내적 상념의 격랑을 피해 숨어라.
내적 상념은 평안을 갉아먹을 따름이니.”
그러므로 영혼은 잠잠히 평화 속에 머물러
하나님이 영혼 안에서 말씀하시게 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교의 위대한 랍비인 바알 셈 토브는 저녁 늦게 강가로 나가 명상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강가에서 잠시 명상을 한 다음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그가 다니는 길은 어느 막강한 권력가의 집을 지나게 되어 있었고, 그 집 앞에는 경비 초소가 있었다. 그 초소에서 파수를 보는 보초는 항상 자기가 파수를 보는 집 앞을 지나다니는 이 이상한 남자가 대체 무엇을 하는 걸까, 궁금해 했다. 그는 여러 차례 바알 셈 토브를 따라가 보기도 했지만, 궁금증을 풀 수 없었다.
일러스트/고은비
어느 날 그는 바알 셈 토브에게 직접 물어 보았다.
“당신이 종종 강으로 나가는 걸 보았소. 그리고, 내 호기심을 용서하기 바라오만, 당신을 몰래 따라가 보기도 했소. 그런데 당신이 거기서 뭘 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소. 당신은 그냥 물가에 앉아 있다가 그대로 돌아오곤 했으니까.”
바알 셈 토브가 대답했다.
“그래, 나도 당신이 몇 번 내 뒤를 밟았던 걸 알고 있지. 밤에는 조용해서 당신 발걸음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지. 그런데 말일세. 나 역시 자네가 이 커다란 저택 문 앞에 서 있는 걸 자주 봤어. 그럼, 자넨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아, 그거야 간단하지요. 나는 파수꾼이잖아요?”
“그래, 그거 참 우연이네.”
바알 셈 토부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나도 파수꾼인데 말이야.”
“만일 당신이 파수꾼이라면 감시해야 할 무엇인가가 있어야 할 게 아니오? 궁전이나 무슨 공원이라든지…? 그렇지만 당신은 기껏해야 강가에 앉아 있을 뿐이던데…”
“우리 둘의 차이는 별 거 아닐세. 자네는 이 집을 지키고, 나는 내 자신을 지키는 것이지. 자네는 이 집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하고, 나는 내 자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한단 말이야.”
“거 참 이상하네.”
파수꾼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럼 누가 당신한테 보수를 지불한단 말이오?”
바알 셈 토브가 껄껄대고 웃더니 말했다.
“나의 보수는 평안일세. 이 세상 어떤 금은보화로도 살 수 없는 평안이라구.”
우리의 마음은 파수꾼이 필요하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고, 고요한 공간을 마련해 명상방석을 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가 항상 깨어서 자기 마음을 지켜보지 않으면 우리는 ‘상념의 격랑’에 휩쓸리기 쉽다.
그래서 명상요가 전통에서는 영혼의 스승이 제자에게 ‘만트라’를 준다. ‘만트라’는 숱한 상념의 격랑에서 우리의 ‘마음을 수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만트라’란 말이 산스크리트어로 ‘마음을 수호하다’ 혹은 ‘마음을 해방한다’는 뜻이다.
예수도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만트라’를 주었다. ‘주기도문’이 그것이다. 당신이 예수의 제자라면 마음이 산란해질 때마다 그가 가르쳐준 ‘주기도문’을 외워보라. 전심을 기울여 외워보라. 그것이 강력한 힘으로 당신의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켜줄 것이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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