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45)
‘자비’보다 ‘무심’(無心)이 낫다
나는 무심(無心)을 자비보다 더 차원 높은 것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자비는 동료의 결핍을 향해
밖으로 나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무심은 이러한 마음의 혼란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내가 모든 덕들을 살펴보건대,
무심만큼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덕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랜 전에 믿음이 깊은 성인이 있었다. 그는 매우 거룩한 사람이었으나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성자라고 말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성자라고 여기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평범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자기 주위에 사랑의 향기를 퍼뜨렸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했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했다.
어느 날, 천사가 내려와서 그에게 물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그대에게 보내셨네. 무엇이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보게. 혹시 치유의 은사를 받고 싶은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주님께서 친히 치료하시길 바랍니다.”
천사가 다시 물었다.
“죄인들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고 싶은가?”
그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주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덕행의 모범이 되어 사람들이 본받고 싶게 마음이 끌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관심의 중심이 됩니다. 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답답한 천사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그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저는 다만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만 있다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이 때 천사가 다시 말했다.
“안 되네. 어떤 기적이든 그대가 원하는 것을 말해야 하네. 안 그러면 한 가지라도 억지로 떠맡기겠네.”
“정 그러시다면, 저를 통해서 좋은 일이 이루어지되, 제 자신이 알아차리는 일이 없게 해 주십시오.”
“알겠네.”
그래서 천사는 그의 소원대로 그 성인의 그림자가 그의 뒤에 생길 때마다 그곳이 치유의 땅이 되도록 해주었다. 그 성인이 지나는 곳마다, 그래서 그의 그림자가 생기는 곳마다 병자들이 치유되고, 땅이 기름지게 되고, 말라붙었던 샘물이 다시 솟고, 삶의 고달픔에 시달린 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그 성인은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그의 그림자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는 잊혀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는 잊혀진 채 자기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그의 소원은 충분히 성취되었다.
일러스트/고은비
이 놀라운 성인(聖人)의 이야기는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드러내 준다. 영적으로 성숙한 이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이런 깊은 신심을 지닌 이가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할 수만 있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행한 선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아예 현수막을 내걸고 자기의 선행을 드러내놓고 광고하는 세상이 아닌가.
동양의 한 현자는 그래서 우리에게 이렇게 간곡히 권유한다.
“만물을 낳으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소유로 하지 않으며, 만물을 생성하는 작위를 하면서도 자기의 능력이라 뽐내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도 그 공에 거처하지 않는다”(《도덕경》).
성인의 경지가 바로 이와 같다. 치유의 은사나 죄인들을 돌아오게 하는 능력을 주겠다는, 그래서 세인의 관심을 끄는 존재가 되게 해주겠다는 달콤한 속삭임을 성인은 단호히 거절한다.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만족하겠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자, 그는 자기가 베푼 선행을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 달라고 간곡히 당부한다. 자기 마음의 간사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요구대로 그를 통해 나타나는 선행을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해 준다. 사람들은 오직 그의 그림자만을 주목할 뿐이었다. 성인의 그림자, 그것은 곧 ‘자기 비움’의 상징이다. 사람들이 성인의 그림자에만 관심을 둘 뿐 성인을 잊었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튼 이 성인 속에는 무릇 ‘나’라는 게 없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그는 조물주의 손에 들린 대나무 피리에 불과하다. 조물주가 입을 대어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면 그 때서야 피리는 아름다운 가락을 낼 뿐이다.
그 아름다운 가락이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의 파문을 일으켜도, 피리는 그것을 자기가 한 일이라 뽐내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공(功)으로 돌리는 일도 없다. 무아(無我)라는 말처럼 피리의 속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온갖 집착이 끊어진 이 성인은 이제 하나님의 손에 들린 속이 텅 빈 한 자루 피리일 뿐이다.
흔히 우리는 사랑의 나눔을 소중한 덕으로 꼽는다. 하지만 그 나눔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하듯 하는 행위가 아닐 때, 그런 선행은 하지 아니함만 못하다.
에크하르트는 그래서 남의 결핍을 향해 나아가는 ‘자비’보다 ‘무심’을 더 차원 높은 것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무심의 사람은 주머니를 툭툭 털어 자비를 베풀고도, 자기가 그렇게 했다는 생각조차 텅 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천사가 오늘 우리에게 다가와 소원을 말하라면 무엇을 빌겠는가. 나는 다만 당신의 손에 들린 한 자루 피리로 살게 해 달라고 빌겠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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