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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의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

절체절명의 순간, 그들은 생명의 수호자였다

by 한종호 2016. 6. 11.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2)

 

절체절명의 순간, 그들은 생명의 수호자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생육과 번성뿐만 아니라 강하고 온 땅에 충만한 것을(출애굽기 1:7) 두려했던 바로는(출애굽기 1:9-10) 인구 억제를 위한 은밀하고 우회적인 방법을 동원했었다. 그러나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겼던 폭력적인 노동정책과 히브리 산파들을 이용한 교활한 방법은 산파들의 하나님 경외 신앙에 근거한 불복종 앞에서 좌절되었다(출애굽기 1:11-20). 바로는 자신의 은밀한 방법이 실패하자 영아 학살을 위한 전면전에 돌입했다. 그는 모든 백성들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는 왕명을 내린다(출애굽기 1:22). 악하고 잔인한 국가적 법령 선포였다.

 

이 상황은 오랜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 일어날 사건의 전조였을까. 마치 예수님의 탄생 시점을 내다보며 헤롯의 위협을 예고하고 웅변하는 상황 같다(마태복음 2:16). 당대 나일 강은 이집트에게 풍요를 선사하는 젖줄이요 생명의 강이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을 위한 생명의 강은 이스라엘 후손들에게 죽음의 강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집트 제국의 왕명 아래 죽음이 엄습하는 찰나에도 새로운 생명은 끊임없이 태어났다. 이때 레위 족속에 속한 남녀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부부는 아기의 준수함을 보고 3개월을 숨겼다(출애굽기 2:1-2). 어느 부모의 마음이 이와 다를까. 아기의 어머니는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히브리어, “테바”)를 가져와 방수에 도움이 되는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에 눕혀 나일 강 갈대 사이에 띠운다(출애굽기 2:3). ‘상자’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테바”는 노아가 만든 ‘방주’(창세기 6:14)와 같은 단어다. ‘방주’는 고페르 나무(잣나무)로 만든 ‘상자’다.

 

구약에서 유일하게 두 번 사용된 단어 “테바”는 ‘방주’였고, 갈대 ‘상자’였다. 거대한 물의 혼돈으로부터 하나님 명령에 따라 모든 생명의 씨를 보존할 구원의 ‘방주’를 노아가 만든 것처럼, 갈대(파피루스) ‘상자’는 아기를 살리려는 한 여성의 손에서 준비된 구원의 ‘방주’였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는 바로의 영아학살정책은 대홍수의 위협처럼 치명적이다. 그러나 땅과 물의 경계를 무너뜨린 대홍수의 혼돈의 위협위에 미래의 생명의 씨를 품은 노아의 ‘방주’가 띄워진 것처럼 위협적인 죽음의 강 위로 어머니의 갈대 ‘상자’가 어린 생명 하나를 품고 위태롭게 띄워졌다.

 

 

 

이스라엘의 미래 세대를 이어갈 남자 아기들이 학살되는 절체절명의 시간, 드라마틱한 상황이 펼쳐진다. 갈대 상자에 아기를 담아 물에 띄우고 누군가는 죽음의 강 위로 아기를 보호하고 있는 갈대 상자를 지켜봐야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은 아기의 누이였다(출애굽기 2:4). 아기의 누이는 물에 떠내려가는 갈대 상자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으리라. 갈대 상자에 어린 생명을 누인 어머니의 의지보다 더 큰 의지를 가진 분에게 아기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순간이다.

 

때마침 바로의 공주가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나왔다. 그녀는 갈대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 가져오게 하여 열어보았다(출애굽기 2:5). 위험천만한 순간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공주는 우는 아기를 보고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그녀가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구나”(2:6)라고 말하는 순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신비롭다. 갈대 상자의 아기가 공주의 모성애를 자극한 것일까? 히브리 사람의 아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울고 있는 작은 생명을 향한 연민은 지엄한 왕명을 거슬러 삼켜버렸다. 이집트 제국의 공주가 자기 아버지의 왕명을 거역한 불복종이다. 억압의 상징 이집트 제국의 공주가 억압 받는 민족의 어린 생명을 살리는 역설적인 순간이다. 이스라엘의 혈연적 경계 밖에 있는 이방 여인이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게 된 절묘한 순간이다.

 

멀찍이 마음 졸이며 지켜보았을 아기의 누이가 공주의 반응을 얼마나 세심히 살폈겠는가. 그녀는 재빠르게 바로의 공주 곁으로 가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키울 히브리인 유모를 소개하겠다며 나선다(2:7). 이 소녀 대담하다. 장차 선지자가 될(15:20) 소녀의 대담한 용기와 행동 때문에 아기의 최고 양육자 친모와 공주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바로의 공주는 아기를 데려가 젖을 먹이게 했고, 아기의 엄마는 젖먹이는 삯을 받기까지 했다(2:8-9). 엄마가 자기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그 삯을 받는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예측불허의 반전이다.

 

죽음의 강에서 건져진 아기는 엄마 품에서 안전하게 커갔다. 아기가 자랐을 때, 아기의 엄마는 자기 아들을 바로의 딸에게 데려간다. 아마도 젖을 떼는 시점이지 싶다. 이때 바로의 공주는 아기를 양자로 삼고, 아기의 이름을 “모세”라고 부른다.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냈다”라는 이유에서다(2:10). “내가 물로부터 그를 구원했다”(민-함마임 메시티후)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모세의 이름은 당대 이집트인들의 이름에 사용된 애굽식 이름이다. 예컨대 프타모세, 투트모세, 아흐모세 등이 그러했다. 반면에 히브리말, “모세”는 ‘끄집어내는 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죽음의 강에서 이방 여인이 구원한 모세는 장차 제국 이집트의 장자들을 멸하는 도구가 될 것이고, 이스라엘 후예들을 억압의 땅에서 ‘끄집어내는 자’가 될 것이다. 아이러니다. 이렇게 모세는 살육의 현장에서 세 여성들의 비밀스러운 활약과 함께 살아남았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갈대로 만든 상자(방주)를 준비한 어머니, 어린 생명을 살리려는 용감하고 민첩하고 침착한 누이의 행동, 설명하기 어려운 공주의 모성적 본능이 생명을 구원하는 도구였다. 그녀들은 생명의 수호자들이었다. 그녀들은 현실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미덕으로 삼지 않았다.

 

장차 바로가 염려했던 그 일, 그러니까 이집트 땅을 나가는 일(2:10)을 수행할 모세는 바로의 왕실에서 합법적으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이집트의 장자들을 징벌하는 도구로 성장할 것이다. 역설적인 반전의 사건 배후에 하나님은 평범한 모녀를 동원하셨고, 대적자의 딸의 마음까지 움직이셨다. 세 여성들은 이스라엘의 해방과 구원의 문빗장을 열어줄 희망의 빛으로서 이야기 주변부가 아니라 중심에 서있다.

 

스스로 “지혜롭다”(1:10)라고 생각한 바로의 인구 억제정책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적인 섭리 앞에 완전히 제압당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강하다”(고린도전서 1:25)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약자를 억압하여 이익을 챙기려는 강자의 모든 의도와 똑똑해 보이는 방식과 잔인성은 언제든 더 큰 의지를 가지신 분의 주권적인 섭리 앞에 속수무책이 될 수 있음을 교훈한다. 남성적 질서의 강고함이 주도하는 질서 속에서 주변인이며 약자인 여성들(어머니, 딸, 이방 여인)은 새로운 희망의 전령이었다. 이들은 주어진 현실에 무조건 순응하지 않고 자유 했다. 때문에 하나님의 무대 위에서 모세의 어머니, 누이, 이집트 공주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준비시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결정적 대리자였다.

김순영/백석대, 안양대 신학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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