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속 여성돋보기(6)
아버지의 서원, 딸이 죽었다
이스라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의 문화는 유혹거리였다. 그 정점에는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 아스다롯을 비롯해 아람, 시돈, 모압, 암몬, 블레셋의 신들을 섬기며 저지른 악행이 있었다(사사기10:6).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블레셋과 암몬 자손을 이용하셔서 요단강 동편 길르앗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후손을 18년 동안 억압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며 도움을 청했으나 하나님은 여느 때처럼 구원자를 보내지 않으셨다(10:13-14).
하나님의 응답이 없자 길르앗 장로들은 해결방안을 모색한다. 장로들은 ‘입다’라는 남자를 찾아내 고통의 탈출구로 삼는다. 그는 아버지 길르앗과 창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때문에 가족 공동체 일원으로 안착하지 못하고 추방되다시피 했다(11:2). 그는 이복형제들을 피해 요단강 북동쪽 돕 땅에 피신해 있으면서 건달패들과 어울려 살고 있었다(11:3). 길르앗의 장로들은 입다를 찾아와 암몬과의 전쟁 승리를 조건 삼아 ‘우두머리’로 삼겠다는 협상과 함께 약속을 이행한다(8-11절).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변덕스러움은 하나님의 근심거리였지만(10:10-16), 하나님은 끝내 보고만 계실 수 없었다. 입다를 선택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길르앗 장로들이었지만, 하나님은 ‘주님의 영’을 입다에게 부으셨다. 그는 암몬과의 전쟁을 위해 길르앗, 므낫세, 미스바를 분주히 돌아다니며(11:29) 병력을 동원한다. 그리고서 그는 전쟁에 나가기 직전 확실한 승리를 위해 하나님께 서원한다.
내가 암몬 자손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먼저 나오는 그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내가 번제물로 그를 드리겠습니다(11:31, 새번역)
번제는 짐승을 남김없이 태워 바치는 제사다. 이때 입다의 말이 애매하다. “먼저 나오는 그 사람”을 히브리 본문에서는 “나오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가축들이 나와서 전쟁의 승리를 축하할까? 입다는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짐승인지 사람인지 애매하게 말한 셈이다.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들을 악기와 춤으로 환영하는 여성들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다(출애굽기15:19-21; 사무엘상18:6-7). 그러면 입다는 겉말과 다르게 속으로 인간 번제를 생각한 셈인데, 하나님은 이미 가나안 땅에서 성행했던 인간 번제를 금지하셨다(레위기18:21: 20:1-5).
암몬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 몰렉에게 어린아이를 제물로 받쳤던 종교적 관행을(레위기20:2-5) 입다가 모방하여 극단적인 맹세를 한 셈이 되었다. 가나안 땅의 신들에게 매료되었던 이스라엘(10:6), 여호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을 리 만무하다. 입다의 서원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의 행위였다. 확실한 성공을 보장받기 위해 신앙을 빙자하여 하나님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출애굽기20:7)는 십계명 중 하나를 뒤엎는 행위다. 이것을 드릴 것이니 저것을 달라는 조건적인 서원은 신앙을 앞세워 하나님을 이용하는 조작적인 행위다. 입다의 서원은 믿음과 용기가 아니라 통제였다.
입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더라도 전쟁에 대한 설명은 단지 두절뿐이다(11:32-33). 사사기 저자는 전쟁의 승리를 중요하게 다룰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반면 서원의 희생양이 된 입다의 무남독녀 일화가 좀 더 길게 소개된다(11:34-40). 문제는 입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다. 그의 딸이 탬버린을 들고 춤추며 아버지를 맞이하려고 나오고 있지 않은가!(34절). 입다는 자기 딸을 보는 순간 옷을 찢고 부르짖으며 괴로워한다. “나를 괴롭히는 것이 하필이면 너란 말이냐, 주님께 서원한 것이어서 돌이킬 수 없으니 어쩌란 말이냐?”(35절)라고 탄식했지만, 자신의 잘못을 문제 삼거나 딸을 위로하지 않았다.
반면에 이름 없이 등장한 딸은, “나의 아버지, 서원한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할 뿐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했다(36절). 아버지의 종속물처럼 존재하는 딸은 아주 침착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딸은 왜 저항하지 않았을까. 잘못된 서원은 대체될 수 있었다(레위기27:1-8; 민수기18:15-16, 30장). 그러나 이것을 알려줘야 할 제사장이나 레위사람은 왜 가만히 있었을까. 자식을 제물 삼는 가나안 풍습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폭력적인 행위였지만, 누구도 막아서지 않았다. 숨겨진 욕망위에 허세로 포장한 신앙과 공동체의 신앙적인 무지의 암묵적 공모였는가. 젊은 딸이 아버지 손에 짐승처럼 죽어야 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하게 되었다”(호세아4:6)라고 하신 하나님의 질타가 귀에 쟁쟁하다.
순종적인 딸은 슬펐다. 딸은 번제물이 되기 전 아버지에게 두 달간의 시간을 요청한다. 딸은 친구들과 산에 가서 실컷 통곡하고 싶었다(37절). 아버지는 딸의 소원을 들어주었지만, 결혼 적령기의 처녀인 딸은 비통할 뿐이다(38절). 두 달 만에 돌아온 딸에게 아버지 입다는 서원한 것을 지켰다(39절). 딸을 번제물로 바친 입다의 참혹한 행위를 저자는 의도적으로 피한 것일까? 그저 입다가 서원한 것을 지켰다는 한 마디 말로 참담한 사건은 마무리 된다.
입다는 주님의 영을 입었지만, 성공에 눈멀어 신중함을 잃고 순진하고 순종적인 딸을 죽여야 했다. 아버지의 권위는 세워졌지만, 아버지 입다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한 마디 저항도 못한 딸은 만연된 우상숭배와 무모한 서원, 공동체의 신앙적 무지로 인한 희생물이었다. 왜 하나님은 입다의 딸이 불의한 희생물이 되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말씀하시지만 억지로 자기 뜻을 수행하도록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다. 위대한 하나님도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까지 막으실 수 없다.
이 불행한 사건으로 이스라엘에는 여자들이 해마다 산으로 가서 입다의 딸을 애도하며 나흘 동안 슬피 우는 풍습이 생겼다(40절). 놀랍게도 기억해줄 후손도 남기지 못한 채 번제물이 된 이름 없는 젊은 여성은 이스라엘 역사에 오래도록 살아남아 기억되었다. 그러면 마지막 40절은 아버지의 권위아래 무조건 순종하고 저항하지 않은 것을 미화시키려는 가부장적인 문화의 흔적일까?
설령 그렇더라도 슬픈 이야기 끝에 입다의 딸에게는 슬픔과 고뇌를 함께 나누며 연대할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딸의 생명을 앗아간 아버지는 딸의 죽음을 앞두고 함께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잘못된 번제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증명한다. 아버지 권위로 이익을 통제하려는 가부장적인 질서에 대한 저항의 일면인 셈이다. 하여 그녀를 기억하는 통곡 의식은(11:40) 세대를 거듭하며 또 다른 딸들의 연대를 통해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버지 입다의 서원이 숨겨진 사욕을 교묘히 채우기 위해 신앙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모든 것의 그릇된 본보기라는 것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김순영(백석대 신학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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