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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내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by 한종호 2016. 6. 13.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7)

 

내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토굴(土窟) 옥(獄) 음실(陰室)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시드기야 왕(王)이 보내어 그를 이끌어 내고 왕궁(王宮)에서 그에게 비밀(秘密)히 물어 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가 대답(對答)하되 있나이다 또 가로되 왕(王)이 바벨론 왕(王)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예레미야 37:16-17).

 

‘용기’(勇氣)를 사전에서는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않는 기개’라 풀고 있다. 예수님을 통해 생각하게 되는 용기의 모습이 있다. 풍랑이 이는 밤바다, 어부 출신의 제자들은 놀라 당황했지만, 예수님은 태연히 잠을 주무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평온함을 누리는 것, 그것이 믿음 혹은 믿음에서 비롯된 용기임을 예수님은 그 밤 몸으로 보여주셨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을 통해 보게 되는 용기는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모습이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하니 여기에서 떠나가라고, 뜻밖에도 어떤 바리새인들이 일러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새번역, 누가복음 13:32-33)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 줄을 잘 알지만 그 길이 내 길이기에 포기하지 않고 가는 것, 그 또한 믿음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임을 생각하게 한다.

 

 

내 나라 조국의 멸망을 예언해야 했던 예레미야의 심정이 어찌 괴롭지 않았을까? 귀에 단 말을 기대하는 백성들에게 쓰디 쓴 소리를 외쳐야 했던 예레미야의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예언자의 길,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길이었다.

 

바벨론이 이집트의 군대 때문에 잠시 예루살렘에서 물러났을 때였다. 예레미야는 집안의 일로 베냐민으로 갔다가 그를 미워하던 이들에게 붙잡혀 지하 감옥에 갇히고 만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으로 투항하러 간다는 누명을 씌우고선 예레미야를 때린 뒤 오래도록 감옥에 가둬두었다.

 

예레미야를 가둔 곳은 ‘토굴(土窟) 옥(獄) 음실(陰室)’이었다. 어둠 속에 소리를 가둔 것이다. 하지만 소리는 어둠이나 지하에 갇히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말씀을 전하는 자를 가두고 있지만 사람이 말씀의 근원을 가둘 수는 없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가둠으로 주님의 말씀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과 다를 것이 없다.

 

이 모든 일을 방조했던 시드기야 왕이 어느 날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고 은밀히 물어본다. 말씀을 전하는 이를 가뒀던 왕이 자신이 가뒀던 이를 불러내어 아무도 모르게 주님의 말씀을 묻는 모습이 기이하게 역설적이다.

 

왕은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둠으로 더 이상 쓴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지만, 실은 주님의 말씀이 두려웠던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도피를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은밀하게 묻는, 시드기야의 모습 속에는 인간의 연약함이 담겨 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왕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지에 따라 예레미야의 처지와 목숨이 좌우되는 순간이었다. 지하 토굴 어둠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마 예레미야가 몰랐을까?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입니다.”

 

왕에게 쓴 소리를 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아프게 경험했으니, 이제 자신이 대답할 말이 무엇인지를 예레미야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잘 모르겠다고 하든지 아니면 알 듯 모를 듯한 말로 얼버무리든지, 선택의 여지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레미야는 왕의 면전에서 또 다시 있는 그대로의 주님 말씀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대답하는지에 따라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알았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그렇게 대답을 했다. 주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한 대가로 내게 돌아오는 것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내게는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는 사람, 그가 주님의 사람이며 그것이 주님의 사람이 걸어갈 길이다.

 

“내게는 주님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사람의 눈치를 보며 자라목 감추듯 말씀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기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다가 어느 토굴 어느 음실에 갇힌 오늘의 예레미야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지.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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