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산책길에서 만난 길벗들
초대받은 사람들
김기석을 따라 같이 욥기산책을 하다보면 동서고금의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 중에는 욥기 전문가는 별로 없는데, 욥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이들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이들이 한 때 어디선가 한 말이 독자들의 욥기 이해에 얼마나 큰 빛을 비추는 지를 꾸준히 밝히면서, 그들을 일일이 소개한다. 이 책을 다 읽는 동안 독자들은 적어도 90여명 이상의 길벗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초청을 받은 이들 중에는 단연 시인들이 많다(다니카와 슌타로, 단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소동파, 엘리어트, 파블로 네루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호메로스, 횔덜린, 구상, 기형도, 김승희, 도종환, 박두진, 윤동주, 윤석산, 이문재, 이정록, 정진규, 정현종, 정호승, 한하운, 황동규).
그 다음이 철학자들(괴테, 노자, 마사 너스바움, 막스 피카르트, 맹자, 비트겐슈타인,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에밀 시오랑, 에픽테투스, 임마누엘 칸트, 자끄 데리다, 장자, 칼 야스스, 토머스 홉스, 하이데커)이고, 극작가나 소설가들(니코스 카잔차키스, 로버트 자레츠키, 밀란 쿤데라, 비르질 게오르규, 사무엘 베케트, 알베르 카뮈, 엔도 슈샤쿠, 외젠 이오네스코, 제임스 힐턴, 카프카, 크리스토퍼 에릭 히친스)이 그 뒤를 잇는다. 또한 인문학 교수들(강상중, 김흥호, 신영복, 카렌 다위샤), 실학자(박지원), 신학자들(김민웅, 마틴 루터, 송천성, 수스따보 구티에레츠, 스티븐 보우머 프레디거,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어거스틴, 월터 브루그만, 칼빈, 폴 틸리히), 작곡가들(헨델, 비발디), 화가들(마크 로스코, 미켈란제로, 조르주 피에르 쇠라), 과학자들(미다스 데커스, 제레드 다이아몬드, 리처드 도킨스), 문명 비평가들(루이스 멈퍼드, 테리 이글턴, 함석헌), 정치가들(넬슨 만델라, 바츨라프 하벨), 종교지도자(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작가들(로버트 자레츠키, 에릭 스프링스티드, 엘리 위젤, 크리스토퍼 에릭 히친스, 파커 파머), 의사(올리버 색스), 유대문학자(피쉬베인) 등도 저자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 주역, 농가월령가, 회심곡에 이르기까지, 저자 자신이 욥기 이해의 여정에서 만난 지적 유산의 전승들이 모두 언급되며, 인용되고 있다.
김기석의 욥기산책에 참여하는 독자에게 이토록 많은 인물과 전승들은 어떤 구실을 할까? 독자들의 욥기 이해를 돕는다? 아니다! 욥기의 세계를, 자신의 삶의 경험과는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응시하거나, 그것도 혼자서 흥미삼아 관광을 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의 축적을 가지고, 여러 사람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그들과 함께 사귀면서, 욥기의 세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독자들이 욥과 그의 네 친구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논쟁 같은 대화에 한 번 끼어들어 보기도 하고,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도 듣지만 말고, 하나님에게도 사탄에게도 말을 걸어 독자 자신의 견해를 밝혀보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 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생기는지도 조금은 심층적으로 파헤쳐보고, 우주가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 온갖 피조물이 함께 사는 곳임을, 창조주 하나님은 단순히 사람과만 교제하시는 인격적인 대상으로 제한할 수 없는 분임을, 그리고 욥을 둘러싼 세계는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이고 우리의 삶일 수도 있음을, 학제간學制間의 여러 인물을 만나 듣고 생각해 보기도 하면서…. 김기석이 깔아놓은 이 마당에서 놀이의 주인공이 되어보기도 할 일이다.
구태여 현학적인 본문상호관련성intertextuality이네 다중본문융합多衆本文融合이네, 이 따위 너스레는 떨지 않겠다. 저자가 독자에게 소개하는 길벗들 중 몇몇은 욥에 관해서 주목할 만한 발언을 한 이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독서에 초대받은 대다수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들이지만, 욥이나 욥기에 관한 한 우리 일반 독자처럼 주인공 욥이나, 그의 이름으로 된 욥기란 책에는 별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다만 우리의 저자 김기석은 그들을 욥의 세계로 끌어 들이고 그의 독자들과 만나게 중재할 뿐이다. 그들이 필연적으로 욥기 산책에 함께할 까닭은 없다. 저자가 그들을 초대하고 그들의 글을 인용하는 것도 저자의 욥기 이해나 어떤 주장에 대해 무슨 증거를 가져다 대려고 그들을 증인들로 소환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욥기산책 길에서 욥 이야기를 같이 하자고 초청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저자를 따라 산책을 하다보면, 김기석의 책에 언급된 그 90여 명의 동서양의 인물들은 마치 욥기 이해를 위해 뭉친 저자들과 독자들의 컨소시엄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모두가 제각기 자기 위치에서 자기 재능을 따라 공동 작업을 한 것 같은 결실을 얻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김기석의 ‘욥기 산책’으로 나온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바쁠 게 없는 초대 손님들
이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도 나에게 와서 너무 지체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책의 출판이 좀 늦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죄송스러움이 있다. 그러나 결코 리뷰 필자인 나 자신의 잘못이란 누명을 혼자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다. 까닭인즉, 김기석의 소개로 만난 이들과의 개인적 대화가 너무 길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이 흥미 있는 길손들과도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나를 장시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이들이 있다. 그 중 두 사람이 카렌 다위샤와 프랜시스 톰슨이다. 아마 독자에 따라서는 이들 말고 다른 길벗들과의 특별한 만남이 있을 것인데, 아마도 그들과 함께 욥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새로운 체험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특별히 마주하며 오래 얘기를 나누게 만든 두 사람에 대해 얘기해 본다. 저자는 욥기 8-9장에 나오는 빌닷의 신학이 자칫하면 지금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의 현실을 정당화 해주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의 사다리 윗단까지 오른 사람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 자리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탈세와 권력형 뇌물 수수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을 정당화시키는 오류를 지적하면서,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그의 일당 110명이 러시아 금융재산의 35%를 도적질한 것을 폭로하는 카렌 다위샤 교수의 저서 《푸틴의 클렙토크라시(도적지배체제)》를 소개한다. 카렌 다위샤의 이 저서는 지난 두 달(2016년 10월과 11월)에 터진 청와대 스캔들의 러시아판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범죄권력집단의 범죄 실태와 그 구성원들의 역할이 다 공개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크렘린과 청와대가 같은 시기에 같은 연배의 주인공들이 유사한 범죄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그와의 대화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또 한 사람은 <하늘나라의 사냥개>라는 시를 쓴 노숙자 출신 시인 프랜시스 톰슨인데, 그의 시는 낭독하는 데만 10분 30초가 걸린다. 하나님으로부터 도피에 실패하는 그의 경험이 감동으로 다가오자 나는 그를 쉽게 놓아줄 수가 없었다. 저자 김기석은 욥이 체험하는 하나님 부재와 욥을 단련시키는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 고백된 본문(욥기 23:8-12)을 설명하면서, 프랜시스 톰슨의 이 시를 부분적으로 인용한다. “나는 그분에게서 도망쳤다. 밤과 낮의 그늘 속으로,/나는 그분에게서 도망쳤다. 수많은 세월 동안을./나는 그분에게서 도망쳤다. 마음의 미로 속으로.” 그러나 끝내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로 시인 자신을 찾아오셨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시의 이 대목을 인용하면서, 이 시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달아나는 인간과 그를 끝없이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숨바꼭질을 장대하게 펼쳐 보여준다는 점을 밝힌다. 프랜시스 톰슨이 경험한 어둠은 사랑으로 내미신 하나님의 손 그림자였다는 것을 저자는 욥의 유사 경험과 대조시키고 있다.
욥기 산책길에서 잠시 벗어나 이 두 인물과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이 책의 독자로서 나 개인의 일탈이었음이 분명하지만, 나는 감히 독자들에게도 확언할 수 있게 됐다. 저자가 초대한 90여 명의 손님과 함께 산책하는 동안 독자는 도중에 이 산책을 중단하고, 초대받은 이들 중 어느 누구와 외길로 빠져 들어가 또 다른 세계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초대 손님을 선별한 김기석에게 욥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고민했던 바흐친, 지라르, 융, 지젝, 멜빌, 라캉, 윌리엄 블레이크 등은 왜 부르지 않았느냐고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또 다른 질문
「욥기」는 「잠언」과 「전도서」와 함께 구약성서에서도 지혜문학으로 구별되는 책이다. 이 세 책의 성격이 현격하게 다르다. 「잠언」은 전통적인 지혜를 수집해 놓은 책이다. 「전도서」는 꼭 잠언을 염두에 두고 그것에 저항할 목적으로 수집 편찬된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 지혜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자신들의 인생체험에 따라 이 두 서로 다른 지혜에 대해 긴장을 느끼면서도 둘 다 수용할 수 있다. 더욱이 이것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세 종교의 경전의 일부가 되면서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지니게 되었고 여기에서 독자들은 믿음과 실천의 규범을 찾는다. 그러나 욥기는 좀 복잡하다. 이 책이 경전 안에 들어오면서 욥기를 경전으로 읽는 독자는 혼란을 겪게 된다. 이것은 욥기를 경전으로 대하지 않고 한 종류의 문학작품으로만 대할 수 있는 독자들과는 또 다른 체험이다.
기독교의 경전 「성경전서」(66권)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어 있다는 것이 전제된 말이기 때문에, 단순히 직접화법의 화자가 하나님이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것은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 특히 시편과 같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들의 찬양과 감사와 기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직접화법 (“하나님이/여호와께서 가라사대…”)이 없어도 「시편」을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견지에서 보면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과는 달리, 욥기는, 욥기 저자의 지문이나 편집구를 제외하고서는, 등장인물들 사이의 대화이고 논쟁이다. 등장인물로는 하나님, 사탄, 욥, 엘리바스, 빌닷, 소발, 엘리후 등이 번갈아 나온다. 각 등장인물이 화자로 나오고, 그들의 직접화법이 길게 또는 짧게 전개된다. 욥기를 읽을 때 독자들은 어떤 화법에 대해서는 누가 누구에게 언제 왜 그런 말을 하는 지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화자들의 말은 지혜전승의 인용이고 편집이고 선별된 전승에 근거한 자기주장이다. 욥기에서 화자 표시를 다 제거하고, 문맥을 다 무시해 버리고, 언급된 지혜전승만 나열해버린다면, 어떤 부분은 「잠언」 같고 어떤 부분은 「전도서」 같을 것이다. 그러나 욥기가 그런 지혜의 수집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하나님의 직접화법만 하나님의 말씀이고, 욥의 경우 좀 불손 불경한 표현이 나오더라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기 1:1)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정하신 자인만큼 하나님의 직접화법 다음으로 그의 말은 존중받아야 하고, 사탄의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고, 엘리바스, 빌닷, 소발, 엘리후, 이들 네 친구는 그들이 말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 꾸중을 받은 것이니(욥기 42:7-8), 그들의 직접적인 말들도 실은 성경에 적혀는 있어도 “성경말씀”이라고는 볼 수 없고… 이런 식으로 재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욥기산책의 저자가 욥기 독자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1강의 결론 부분은 이 책만의 공헌이라고 판단된다. 이것은 위에서 밝힌 평자의 기우를 넘어서는 적극적으로 욥기를 읽는 자세이다. 그는 독자에게 네 가지를 당부한다.
첫째, 욥기를 읽어나갈 때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태를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이 태도는 욥의 친구들의 기본적인 태도였고, 그것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꾸중을 받았기 때문이다. 짐짓 하나님 편을 드는 것 같은 전통적인 응보의 교리를 가지고는 더 이상 욥의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 서구 신학의 틀을 가지고 세월호 사건을 해석하려할 때 그것이 작동할 수 없었던 것도 똑같은 이치다.
둘째, 욥기를 읽으면서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까닭이 무엇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욥의 말보다 친구들의 말이 더 은혜스럽게 들리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욥의 말이라고 다 맞는 것도 아니지만, 친구들의 말이라고 다 그른 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하라고 한다. 다만, 말의 옳고 그름의 척도로 욥과 친구들의 논쟁에 접근하면 욥기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발화된 말의 내용에 집중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말이 발설되는 상황이나 심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부탁이다.
셋째, 욥기의 주제를 무고한 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이라고 규정해버리는 것은 다의적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에 굴레를 씌우는 일임을 상기시킨다. 김기석은 욥기가 독자들에게 정답 없는 삶을 살아갈 용기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김기석은, 욥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과거의 인물로 규정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지금도 많은 ‘욥’들을 양산하는 체제라는 점을 주목하게 한다. 이렇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김기석의 장치가 욥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독자를 도울 것이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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