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22)
의로운 매춘부 라합
‘여호와의 종’ 모세의 지도력을 계승한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전쟁이 시작되었다(주전 15세기). 여리고성을 시작으로 아이성, 기브온, 하솔 등 여러 도시와 전쟁을 치러야한다(여호수아 1-12장).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하신 광야에서 레바논까지, 큰 강 유프라테스에서 헷족속 온 땅과 서쪽 지중해까지다(1:4). 이미 아브라함에게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신(창세기 15:18) 것처럼, 약속의 성취 시점이 임박했다. 그런데 요단강을 건너 본격적인 정복전쟁이 시작되기 전, 가나안 땅 여리고성에 거주하는 매춘부 라합의 드라마가 자리 잡고 있다(2:1-24).
전쟁의 거친 함성소리가 들려오기 전이다.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정탐꾼 두 명을 여리고로 보내 은밀하게 요단강 서쪽의 상황을 엿보게 했다. 이때 정탐꾼들이 유숙하게 된 집이 “라합”이라는 “매춘부의 집”이었다(2:1). 현대사회도 그렇겠지만, 고대 사회에서 매춘부는 극심한 가난과 빚에 내몰려 선택하게 되는 생존을 위한 최후 수단이었다. 그런데 하필 정탐꾼들이 유숙하려고 찾아간 집이 매춘부의 집이라는 것이 불편했는지, 주석가들 중에는 히브리말 매춘부에 상응하는 “조나”를 “여관 안주인”(hostess) 또는 “여인숙 주인”(innkeeper)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매춘부라고 번역하더라도 각주에 여인숙 주인으로 명시하곤 한다. 마태복음 1장 5절의 예수님 족보에 라합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보아스의 어머니요, 다윗의 조상이니(룻기 4:21) “매춘부”라는 것을 제거하고 싶을 만큼 불편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춘부 라합은 후대 신앙의 세대에 의해 칭송받는 믿음과 행함의 영웅이었다(히브리서 11:31; 야고보서 2:25).
정탐꾼들이 비밀리에 창녀의 집에 들어왔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파이로 잠입해 들어온 사실을 여리고 왕이 듣게 되었다(2절). 어떻게 이 사실이 알려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된 채로 여리고 왕의 부하들이 라합의 집에 들이닥쳐 스파이들을 끌어내라고 명령할 때는 이미 늦었다. 라합이 두 사람을 숨긴 뒤였다. 그리고 라합은 정탐꾼의 행방을 묻는 자들에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거니와 이미 떠났고, 성문 닫을 때쯤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라합은 그쯤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에게 서둘러 뒤따라가라며 따돌리기까지 한다(3-5절). 그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탐꾼 뒤를 추적하며 요단강 나루까지 갔고, 성문은 닫혔다(7절).
스파이를 쫒는 여리고 왕의 사람들은 성문 밖으로 나간 상황, 쫒기는 자들은 성문 안쪽 라합의 집 지붕에 숨었다(6절). 왕의 사람들을 따돌린 라합이 지붕으로 올라왔다(8절). 가나안 지역 대부분의 집들은 지붕이 평평하여 곡식을 말리거나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하니 몸을 숨길만한 곡식 자루들이 있을 법하다. 이때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고백한다.
“나는 주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당신들 때문에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이 땅의 주민들은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습니다.”(2:9, 새번역)
그녀의 말은 두 명의 정탐꾼도 놀랄 일이었지만, 독자도 놀랄만한 일이다. 이 말은 홍해를 건넌 후 하나님을 찬양한 모세의 노래에 담긴 내용 일부처럼 들리니 말이다(출애굽기 15:15-16). 그녀의 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홍해를 가르고 아모리 사람의 왕 시혼과 옥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듣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고 말하지 않는가(10절). 라합의 말의 강조점은 가나안 주민이 이스라엘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녀의 결정적인 고백은 남달랐다. 이스라엘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믿음의 고백이며 증언이었다.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위에서, 과연 주 당신들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2:11)
그런데 라합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서 재빨리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람처럼 정탐꾼들에게 확답과 맹세를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내가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제 당신들도 내 아버지의 집안에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주님 앞에서 맹세를 하시고, 그것을 지키겠다는 확실한 징표를 나에게 주십시오. 그리고 나의 부모와 형제자매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식구들을 살려주시고, 죽지 않도록 우리를 구하여 주십시오.”(2:12-13)
라합의 요구는 구체적이고 강력했다. 그녀의 말에서 그동안의 삶의 고단함과 절실함이 묻어난다. “나의 아버지의 집”과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식구들”로 표현된 가족의 범위는 친척들까지 포함한 구원요청이었다. 라합 집안의 운명이 집안을 대표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오로지 그녀에게 달렸다. 그녀의 요청이 수락된다면, 불가피하게 원하지 않은 딸의 매춘으로 비참한 삶의 결핍을 보충했을 가족은 미천한 딸에 의해 다시 생명 보존의 기회를 얻게 된다. 적어도 그녀의 말에서 가부장적인 집안의 위계질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타파되고 있는 셈이다.
라합은 이집트 제국의 억압아래 노예의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후손도 아니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었다. 오직 귀로 들은 하나님의 구원 사실만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라합은 혈통적인 정체성과 지리적 경계를 뛰어넘는 이방인의 믿음을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강도 높은 라합의 요구만큼이나 라합에 의해 위기를 모면한 정탐꾼들 역시 목숨을 내놓고라도 약속을 지키겠다는 강력한 답변을 내놓았다. 그들은 여호와가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친절과 성실”(새번역; 히브리말, “헤쎄드”와 “에메트”)을 다해 대우할 것을 약속한다(14절). “친절”에 상응하는 “헤쎄드”는 언약적인 충성을 뜻한다. 라합과 정탐꾼들 사이에 신실하게 수행해야 할 계약관계가 수립된 것이다. 무엇보다 “헤쎄드”와 “에메트”는 구약에서 짝꿍 단어로 자주 사용되는데, 하나님의 견고한 사랑과 신실함 곧 지속적인 돌봄을 표현한 개념이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자비로운 행위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이렇게 라합은 자기 가족과 친척들의 안전과 보호를 보장받고 성벽에 붙은 창밖으로 정탐꾼들을 탈출시킨다(15절). 그녀의 집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성벽 사이에 거주한다는 것만으로도 변방의 소외된 신분이라는 상징성이 농후하다. 라합은 정탐꾼들을 내려 보내면서 3일 동안 산에 숨었다가 추적자들을 따돌린 후에 돌아갈 것을 당부한다(16절). 라합의 도움으로 탈출하게 된 정탐꾼들 역시 그녀에게 마지막 당부를 한다. 그들은 라합에게 홍색 줄을 건네고 이스라엘 백성이 진군해 오는 날 창문에 매달아 두면, 이 홍색 줄은 라합과 그녀의 가족, 그리고 모든 친척들에게 희망이 될 것을 약속한다. 단, 누구도 라합의 집밖으로 나가면 안 되고 비밀은 지켜져야 한다(18-20절). 라합은 정탐꾼들의 말대로 “홍색의 희망”을 묶었다(21절).
그리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던 날, 라합이 요구한대로 그녀의 아버지 집안과 그녀에게 속한 모든 가족들은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이스라엘에 거주하게 되었다(6:25)라는 라합의 “홍색의 희망”과 구원 드라마는 ‘지금여기’ 우리에게 왜 전해져야 했을까?
하나님 백성의 일원으로 편입되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태생적 근거는 라합에게 유효하지 않았다. 매춘부라는 직업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었지만 라합의 드라마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히브리서 기자의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을 영접하여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히브리서 11:31)라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전리품을 챙긴 불순종 때문에 ‘진멸’당한 아간과 그의 자녀들 이야기를(여호수아 7장) 대비시킨다. 이뿐 아니라 야고보 사도는 “행함으로” 라합이 의롭다함을 받았다(야고보서2:25)라고 칭송했다. 신약의 두 본문이 믿음과 행함의 강조점의 차이로 보이지만, 믿음과 행위 중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서로를 보충한 것이다.
그리고 라합의 드라마는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최고 민족으로 부추겨 자칫 승리주의적인 역사관에 매몰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구원 목적과 범위를 깨닫게 한다.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남성의 성적 욕구해소의 도구였기에 가나안 사회에서도 소외되고 유린당했을 라합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닿았다. 이후 먼 훗날 라합은 온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은총을 입는다. 그렇게 라합은 낮고 비천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역사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작은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지금여기’ 기록된 말씀을 듣는 믿음과 행함의 치우침 없는 실행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생산되어 확장되고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약자가 교회공동체 안에서 환대받고 있는가. 중산층의 교회를 열망하는 아니 이미 중산층의 교회가 된 한국 교회는 낮은 곳을 향한 연민을 잊은 듯하다. 이 땅의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하지만 전리품에 눈멀어 불순종했던 아간의 진멸과 같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김순영/구약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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