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24)
다말, 당신의 위험천만하고 대담한 행동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불편한 이야기들이 종종 눈에 띤다.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입에 올리기 거북한 가정사 중 하나다. 38장의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이야기를 누군가는 근친상간의 스캔들로 끝내는가하면, 누군가는 “가족관계증명서”로 읽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증명서 발급자가 다말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시아버지 유다가 주인공이 아니라 다말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창세기 38장은 유다,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말, 그녀의 이야기다. 물론 이 말에 불편할 독자도 있겠다.
그동안 창세기 전체에서 38장은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미디안 사람들에게 팔아넘긴 사건(37장)과 요셉이 이집트 바로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된 사건(39장) 사이에 생뚱맞게 위치하여 해석자들의 관심거리였다. 더욱이 유다는 도덕적인 흠결이 있음에도 아버지 족장 야곱으로부터 가장 큰 축복을 받았다(49:8-12).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국가로 발돋움한 후 유다지파 공동체의 조상으로서 다윗왕국을 수립하는 유력한 인물의 조상 아닌가. 이 때문에 38장은 다말의 관점보다는 유다의 관점에서 읽혔다. 여성이 이야기의 주인공 되기 어려운 남성중심 사회의 한계 안에 다말이 살았지만, 다말의 관점에서 읽어보면 어떨까.
이야기는 “그 후에”로 시작한다(36:1). 야곱의 아들들이 유다의 제안대로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고 난 후였을 테다(36:25-36). 유다가 어쩌다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게 되어 세 명의 아들을 얻었다. 아들들의 이름은 엘(Er), 오난, 셀라였다(1-6절). 유다의 할아버지 이삭과 리브가는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을 반대했었다.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조상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가나안 사람의 멸망을 미리 알리셨던 것에(15:13-16) 근거한 것일 테다. 그런데 유다가 가나안 여자와 결혼했으니 불길한 징조다. 아니나 다를까.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해 다말(Tamar)이라는 여인과 결혼시켰는데, 엘이 죽고 말았다. 이유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기 때문이었다(6-7절). 엘의 히브리 발음 “에르”를 뒤집으면 ‘악’이라는 뜻의 히브리말 “라”가 된다. 죽을 만큼의 악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알려지진 않았다.
이때 유다는 당대의 풍습을 따라 둘째 아들 오난을 형수 다말에게 보내 죽은 형제의 의무를 이행하게 했다(8절). 형의 대를 잇는 ‘계대결혼’이다. 이것은 남편 없이, 아들 없이 살아가는 고대 여성의 생존의 위태로움과 안위를 고려한 일종의 사회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오난은 자신에게 별 이로움이 없다고 생각하고, 죽은 형과 남겨진 형수를 위한 것이라 여겨 잠자리에서 정자를 흘려버렸다(9절). 이것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고, 여호와가 그도 죽이셨다(10절). ‘계대결혼이’ 가족의 의무로서 법적 강제성은 없지만, 결혼했다면 책임수행이 뒤따른다. 오난은 무책임했다. 이때 유다의 행동 역시 돌출된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말한다.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이렇게 말한 유다의 속내는 곧 해설자의 목소리로 폭로된다. 유다는 막내 셀라도 그 형들처럼 죽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11절). 유다의 행동 역시 자신의 둘째 아들 오난만큼 이기적이고 무책임했다. 아들들의 죽음이 필시 며느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이즈음 이름도 없이 수아의 딸로만 소개된 유다의 아내이자 다말의 시어머니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채, 죽었다는 보고만 있을 뿐이다. 유다는 슬픔의 시간을 보내고 자기 양들의 털을 깎는 사람들이 있는 딤나로 내려갔다(12절). 삼손 이야기에도 언급되는(사사기14:1-2) 딤나의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위치보다 중요한 것은 친정으로 돌아간 다말의 행동이다. 그녀는 시아버지가 딤나에 올라왔다는 말을 전해 듣고,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는 에나임 길에 앉았다(13-14절). 에나임의 위치도 확실히 알려지지 않지만, 신체기관의 하나인 “눈들”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시아버지가 “눈들”이 있는 거리에서 자기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창녀’(히브리말, “조나”)로 여겼다니(14-15절), 장소적인 역설에 익살스러움이 더해졌다.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다가가 하룻밤 동침을 요청하자 다말은 그 대가로 무엇을 줄 것인지 묻는다. 유다는 염소 새끼 한 마리로 흥정했다. 유다에게 당장 현물이 없었던지 다말은 담보물로 도장과 도장을 묶는 끈, 지팡이를 요청하여 받았다. 이것으로 하룻밤의 잠자리가 성사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했다(17-18절). 이야기는 신속하게 전개되었다. 다말은 이후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다시 입었다(19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가 유다로부터 받은 도장, 도장을 묶어 목에 메는 끈, 그리고 권위를 상징한다는 지팡이, 모두 값비싼 물건은 아니어도 누구의 것인지를 식별하는 사적인 물건들이다. 다말은 이 일을 위해 주도면밀했다.
그렇게 며느리와의 하룻밤을 보낸 유다는 친구에게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보내 담보물을 찾아오려고 했지만, 그 여인을 찾을 수 없었다(20절). 이 남자는 사람들에게 에나임 길에 있던 ‘신전창녀’(히브리말, “케데샤”)를 수소문하지만, 거기에는 신전창녀가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21절). 유다는 자신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창녀’라고 했는데, 왜 친구는 ‘신전창녀’를 수소문한 것일까. 신전창녀와의 성관계는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가나안 문화의 종교적 관행이었다. 관행에 기대 수치와 책임감을 조금이라도 면피하려는 의도였을까?
친구는 유다에게 그곳에 ‘신전창녀’가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자 유다는 부끄러움 당할지 모르니 그냥 두라며,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을 짚어주며 사건을 종결하려고 했다(22절). 그러나 삼 개월 후 며느리가 “행음하였고(잔타), 그 행음함으로(리제누님)”(23절) 임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 강조점은 유다의 친구가 사용했던 ‘신전창녀’와 관련된 어휘가 아니다. 유다가 사용한 ‘창녀’(조나)라는 말의 어근 동사의 반복 활용이 매우 의도적이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유다는 그녀를 끌어내 불태우라고 한다. 유다의 분노는 며느리를 불태워 죽이고 싶을 만큼 컸을 테다. 하지만 이 말을 전한 익명의 어떤 사람은 유다가 말한 ‘창녀’와 관련된 어휘를 사용하고 있으니, 유다를 고발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마치 며느리를 향한 분노가 부당하다고 증언하는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러나 결국 다말이 끌려 나올 때, 그녀는 시아버지에게 말을 전한다.
“이 물건의 주인 때문에 내가 임신하였습니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입니까.”(25절)
공개적인 자리로 끌려나왔을 다말의 결정적 한 마디는 아마도 유다를 당혹스럽게 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의 마음 상태를 알리는 묘사는 없다. 유다는 담담하게 담보물들을 알아보고 말했다.
“그녀가 나 보다 더 옳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26절)
불편한 이야기 끝에 이르러 다말의 행동이 단지 성적인 일탈행위가 아니었음을 유다의 입을 통해 발설되었다. 유다를 통해 다말은 신의성실을 다해 자신의 결혼의무를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이후 유다는 다시는 더 이상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26절)라고 강조하는 해설과 함께 며느리와 시아버지와의 불편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이야기의 흐름을 면밀히 살피면, 저자는 ‘창녀’와 ‘신전창기’라는 말을 교묘히 교차 사용하면서 유다의 잘못을 고발하고 강조한 셈이다. 그리고서 끝내 다말이 낳은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27-30절)의 이름에서 밝혀질 중요한 사실 하나를 여운처럼 남긴 채 38장은 끝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베레스는 룻의 남편이 될 보아스의 조상이 되고,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먼 조상이 된다(룻기 4:21-22).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12-50장)의 큰 주제는 후손을 통해 약속의 계보를 이어가는 일이다. 이 약속의 성취 맥락에서,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언약의 계보를 이어가는 연속적인 책임수행을 족장 야곱의 아들 유다가 아니라 다말이 그 역할을 이행했음을 보여주었다.
유다와 다말의 시대로 돌아가 생략된 다말의 마음을 꼼꼼히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다윗 왕의 여자 조상으로서(룻기4:21-22) 예수님의 족보에(마태복음1:1-6) 올랐으니 그녀 없이는 보아스와 다윗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여기’ 거룩한 말씀의 행간을 오가는 신앙의 독자로서 다말에게 말하고 싶다.
‘종려나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다말, 당신의 위험천만하고 대담한 행동이 끝내 메시아 약속의 계보를 잇는 일이 되었군요. 그러나 그때 두렵지 않던가요? 당신은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의 손에 들려졌던 유다의 지팡이, 슬픈 얼굴의 여자 족장을 상상해봤어요. 결국 당신의 시아버지 유다와 당신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신비 안에서 숨은 뜻을 이해하고 깨닫기까지 더딘 걸음일 수밖에 없음을 다시금 고백하게 합니다.
김순영(구약학/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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