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

마태 수난곡 No. 5 에반겔리스트의 아니리

by 한종호 2017. 3. 8.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5)


BWV 244 Matthäus-Passion

마태 수난곡 No. 5 에반겔리스트의 아니리


장대한 코랄 판타지아 합창이 끝나면 잠시 적막이 흐른 후 예수 수난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감상하실 부분은 마태 수난곡 2번부터 5번곡이며 이에 해당하는 마태복음 본문은 26장 1절부터 5절입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라는 예수의 말씀에 반응하는 코멘트, 성도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코랄입니다. 바로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입니다.


‘오, 사랑의 예수시여…

대체 무슨 죄를,

어떤 잘못을 범하셨단 말입니까?’


장면이 바뀌고 가야바의 관정에 모인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는 모습은 합창으로 표현됩니다.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성경에서 ‘민란’에 해당하는 독일어 단어는 ‘Aufruhr’인데 ‘격동, 혼란’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의 대사를 표현하는 여기저기에서 떠들어 대는 듯한 합창을 들어보면 정작 혼란스럽고 소요하는 것은 바로 예수를 죽이려 하는 그들의 마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수난곡 1부 2번~5번

내러티브

EVANGELIST

1. Da Jesus diese Rede vollendet hatte, sprach er zu seinen Jüngern: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대 사

JESUS

2. Ihr wisset, daß nach zween Tagen Ostern wird, und des Menschen Sohn wird überantwortet werden, daß er gekreuziget werde.

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코멘트

CHORAL

Herzliebster Jesu, was hast du verbrochen,

Daß man ein solch scharf Urteil hat gesprochen! Was ist die Schuld, in was für Missetaten bist du geraten!

오, 사랑의 예수시여 당신이 무슨 죄를 지셨기에 그토록 엄한 판결을 받으시나이까? 대체 무슨 죄를, 어떤 잘못을 범하셨단 말입니까?

내러티브

EVANGELIST

3. Da versammleten sich die Hohenpriester und Schriftgelehrten und die Ältesten im Volk in den Palast des Hohenpriesters, der da hieß Kaiphas. 4. Und hielten Rat, wie sie Jesum mit Listen griffen und töteten. 5. Sie sprachen aber: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의 아전에 모여 4.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대 사

CHOR

5. Ja nicht auf das Fest, auf daß nicht ein Aufruhr werde im Volk.

5.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에반겔리스트의 아니리

서곡의 역할을 하는 코랄 판타지아에 이어 이야기의 문을 여는 것은 에반겔리스트입니다. 에반겔리스트의 가사는 루터판 독일어 성경 마태복음 본문의 내러티브의 가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실 복음서를 성경으로 읽을 때 우리는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 부분을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보석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하나로 연결하는 줄이기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복음서의 내러티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복음서가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과 같은 예수 어록의 형태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하나의 이야기로 발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내러티브의 역할 때문입니다. 특히 마태복음 26장 이후는 단편적인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매우 극적인 전개가 시간 순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내러티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쩌면 복음서가 예수 어록의 형태에서 오늘날의 내러티브와 대사로 구성된 복음서로 발전하게 된 것은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이라는 드라마틱한 이야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수난-십자가-부활이라는 드라마틱하고 긴박한 이야기를 전하자니 내러티브가 필요했고 전체적인 통일성을 위해 복음서 전체에 내러티브가 삽입되었다고 말입니다. 실재적으로 복음서의 초기 형태인 도마복음에는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내러티브의 역할은 복음서 자체에서 보다 마태 수난곡에서 조금 더 부각됩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마태 수난곡은 우리의 판소리와 아주 닮아 있습니다. 판소리의 구성요소가 창(소리) 아니리(사설, 말) 발림(혹은 너름새, 몸짓)인데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는 이 중 아니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지요. 판소리를 실재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리 듯이 수난곡 연주에서 가장 중요하고 힘든 역할이 에반겔리스트입니다.


에반겔리스트를 위한 테너, 에른스트 헤플리거

판소리의 아니리에 해당하는 에반겔리스트 역할은 선율적인 아름다움은 없지만 곡의 시종을 이끌어야 하며 너무 감정에 몰입되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너무 건조하거나 가창에만 신경 써서도 안 되는 역할입니다. 노래하기도 매우 까다롭고 가사를 완전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영적 전달자의 역할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테너가수 한 명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면서 이 중요한 부분을 전부 다 감당해야 한다니 에반겔리스트의 중요성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수난곡에서는 지휘자도 중요하지만 에반겔리스트가 누구인가에 따라 전체적인 곡 해석과 분위기 그리고 몰입도가 달라집니다.


일전에 설명 드린 대로 칼 리히터는 1958년, 1971년, 그리고 1979년 총 세 번에 거쳐서 마태 수난곡 음반을 남겼는데 첫 번째로 녹음된 1958년 음반이 가장 명연주로 손꼽히는 이유는 전쟁 직후라는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에반겔리스트를 노래한 에른스트 헤플리거 때문입니다.


헤플리거의 노래에는 그 누구와도 비할 수 없는 깊은 영성과 떨림이 담겨 있습니다. 마치, 그의 에반겔리스트는 오래된 어머니의 성경책으로 성경을 읽는 느낌이 듭니다.



에른스트 헤플리거(Ernst Haefliger ,1919~2007)는 스위스 테너입니다. 그는 저에게 성악가는 소리로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음사이의 여백을 느끼며 심지어 침묵으로도 노래할 수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해 준 진정한 예술가이며 리트와 오라토리오뿐만 아니라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정통한 대가입니다. 그의 노래에는 숨결이 담겨 있습니다. 독일을 대표하는 테너인 슈라이어나 분덜리히처럼 영롱한 음색은 아니지만 좋은 발성에서 나오는 풍부함과 자연이 만들어 낸 듯 엷은 스크래치가 서려있는 음색은 깊은 영성과 떨림 그리고 애잔함을 품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음악적 해석은 매우 뛰어납니다. 그가 부르는 슈만의 ‘Der Nussbaum Op 25 N3(호두나무)’을 가사와 함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https://youtu.be/E2KBpTbJxtU


그가 부르는 리트(독일가곡)를 듣노라면 이것이 시를 읊는 것인지 노래를 하는 것인지 혼동될 정도로 진정 시와 음악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예술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스위스인이지만 그의 노래는 역사상 누구보다 가장 독일적인 테너의 연주를 들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인들이 사랑하는 덕목인 자연주의, 꾸밈없는 소박함, 경건함, 진실함이 그의 노래에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데뷔 무대는 바흐의 요한수난곡의 에반겔리스트였는데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서인지 헤플리거는 평생에 걸쳐서 바흐 음악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56년 마태수난곡 녹음을 진행하던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칸토르인 귄터 라민이 갑자기 사망했습니다. 토마스 칸토르라는 직책은 바흐의 적통 후계자로서 지휘는 물론이고 여러 악기와 작곡에도 정통해야 하는 개신교 음악가에 있어서 최고의 명예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그 프로젝트에 에반겔리스트로 참여했던 에른스트 헤플리거는 귄터 라민의 후계자로 칼 리히터를 꼽았고 비록 칼 리히터는 장고 끝에 뮌헨에서의 교수직과 자신이 만든 합창단을 위해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마태수난곡 녹음 프로젝트는 승계하여 결국 58년 음반이라는 명반을 낳게 된 것입니다. 결국 58년 음반은 그 프로젝트를 완성해 내고 최고의 에반겔리스트로 참여한 헤플리거에게 숨은 공로가 있습니다.


헤플리거 노래의 명장면들

헤플리거 노래의 진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리히터음반 58년 녹음의 겟세마네 장면을 들어보셔야 합니다. ‘Da kam Jesus mit ihnen zu einem Hofe, der hieß Gethsemane, und sprach zu seinen Jüngern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로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라고 부탁하신 후 에반겔리스트는 ‘Und nahm zu sich Petrum und die zween Söhne Zebedäi,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 Da sprach Jesus zu ihnen /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때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라고 노래합니다.


이 부분에서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 / 고민하고 슬퍼하시기 시작하사’ 를 주목해 들어 보십시오. 물론 그렇게 작곡한 바흐에게 일차적인 찬사가 돌아가야 할 것이지만 헤플리거가 부르는 ‘고민하다’이라는 의미의 ‘trauern'과 ’슬퍼하다‘라는 의미의 ’zagen'이라는 단어에는 주님의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합니다. 임방울의 ‘쑥대머리 구신형용’에 버금가는 성악 예술의 백미가 바로 이 부분에 담겨 있습니다.https://youtu.be/3icLbxogeV4 (49분47초에 시작)


헤플리거는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와 더불어 음악을 위해 자기 자신마저 내려놓을 줄 아는 성악가입니다. 성악가로서 가장 높은 경지라고 할 수 있지요. 앞서 제가 그의 노래에는 여백이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 관객을 바라보며 자기의 목소리로 수많은 관객의 시선을 압도해야만 하고 주어진 시간을 자신의 소리로 채워야 하는 성악가에게 자기 자신을 비우는 일 그리고 여백을 느끼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의 노래를 듣노라면 어느 새 극과 음악마저 넘어 성경 속으로 들어 가 버리곤 합니다. 이 장면에 관한 수많은 설교를 듣고 겟세마네의 기도를 담은 많은 그림을 보았지만 58년 녹음의 이 부분만큼의 감동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이어지는 테너 솔로의 ‘기도’와 합창의 ‘코멘트’로 이루어진 ‘O Schmerz! Hier zittert das gequälte Herz! ...Ich will bei meinem Jesu wachen’은 마태수난곡에서 가장 극적으로 아름다운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또 하나, 헤플리거의 노래에서 도무지 빼뜨릴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미리 소개드립니다. 바로 동일한 음반에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장면입니다. ‘Und ging heraus, und weinete bitterlich /그리고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니라’ 이 부분을 헤플리거와 같이 표현할 수 있는 테너가 과연 또 다시 있을까요? 베드로의 찢어지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마태 수난곡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Erbarme dich Mein Gott um meiner Zähren willen ’바로 앞에 나옵니다. 즉 이 유명한 알토 아리아는 베드로의 통곡에 대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이올린 선율이 너무나도 애달프고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고 이어서 알토가 ‘주여 나의 눈물을 보아서라도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바이올린 선율과 교차하며 노래합니다. 알토 성악가 헤르타 퇴퍼 (Hertha Töpper) 의 노래도 흠잡을 데 없지만 바이올린의 연주도 일품입니다. 우리의 죄를 눈물로 다 토해 내고 주님의 사랑으로 정화되는 느낌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 곡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바이올린 솔로 곡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기도 하고 독창회의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마태수난곡의 일부로서 베드로의 통곡에 이어지는 ‘기도’로서 이 노래를 들을 때 가장 감동이 됩니다. https://youtu.be/qP3RF6KrzII (38분 40초에 시작)


때로 마태 수난곡의 에반겔리스트가 옛 시절 변사와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변사의 톤을 잠시 빌려서 말씀드리자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노래와 이야기’가 바로 58년 음반의 헤플리거의 노래에 담겨 있습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