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36)
설교(說敎)인가 썰~교(敎)인가
- 소 모 씨의 설교를 감상하고 정신이 확 깨서 쓴다 -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사도바울
1.
월요일 산책하며 주제를 정한다. 화요일 농사를 지으며 생각을 정리 메모한다. 수요일 운동을 하면서 자료를 참고하여 거칠게 초고를 쓴다. 목요일 치료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끝까지 다 쓴다. 금요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문장의 맥락을 가다듬어 정리한다. 금요일 밤에서 토요일 새벽사이. 클럽에 전문을 업데이트한다. 토요일 놀면서 아내에게 리허설을 한다. 아내가 통과를 시켜주면 영화 한편 보고 기대하며 잘 수 있다. 그러나 오늘처럼 내 리허설의 맥락은 따라잡지 못하고 날 바라보는 얼굴만 점점 예뻐지면 그때는 비상이다. 토요일 밤에서 일요일 새벽사이.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 현장에서 벌어질 관념과 현실의 갭을 줄여본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알아듣기 쉽게 전체를 새로 쓰기도 한다.
원고 매수는 목회 초기 A4 20장에서 줄고 줄어 10년에 이른 지금은 7장까지 줄었다.(오늘 처음 8장에서 1장을 더 줄이는데 성공했다.) 목표는 4장,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멀다. 설교 시간은 처음 2시간 정도 소요됐던 것이 줄고 줄어 한 시간을 못 미쳐 지금은 50분 부근을 눈치 보며 오락가락하고 있다. 교우들의 기대는 내 설교가 부디 40분을 넘기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일단 원고는 4장, 그동안의 의리로 봐줘도 5장, 주의 은혜로 용서해 주어도 6장 이상은 절대 넘지 말아야한다. 설교 중간에 갑자기 바다가 그립다고 삼천포 쪽으로 가서도 안 되며 새로 개발한 개인기가 아까워 요건 꼭 한번 시전하고 싶다는 유혹이 있더라도 징검다리 건너듯 훌쩍 건너뛰며 눈을 딱 감을 줄 알아야한다.
내 청중은 지난 10년간 가장 많았을 때가 30여명, 가장 적었을 때가 5,6명, 평균 15명 정도다. 거기엔 은혜가 넘치게도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 5명이 기본 출석으로 포함된다. 나에겐 단 한 번의 주일예배가 목사로서의 직임을 다할 유일한 기회이므로, 이것은 일주일을 꼬박 바친 설교를 들어줄 청중들이 지난 10년간 평균 15여명이었다는 사실과 그들을 위해 내 설교가 바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수끼리 ‘숫자가 무슨 중요하냐’거나, 은혜가 책상만큼도 없이 ‘차라리 때려치우는 게 낫지 않느냐’는 따위의 권면은 하지 말아 달라. 그건 나를 위한 위로도 내 분투를 향한 애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2.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변명을 하자면 나는 이것을 자발적으로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중이다. 자발은 내가 스스로 원함이요 어쩔 수 없음은 내 사명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동의가 안 된다면 나를 이대로 놔두면 된다. 기록되었으되 사도 바울의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린도전서 9:17)하는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여겨주시라.(주께서 임의로 행하는 내게 상을 주시기를!) 그러나 나는 사도 바울 만은 못하여 새로운 방문자(요즘엔 신자가 오는 게 아니다)가 올 때면 늘 ‘여기 모인 인원이 전부가 아니며 우리는 번차례로 나온다’고, ‘이런 말이 궁색하진 않겠지’하는 부끄런 맘으로 순전히 방문자에 대한 배려가 아닌 나와 우리 성도들을 위한 자백을 한다.
물론 우리 교회는 창립 이래 전도를 위한 뭔가를 계획해 본 적이 없다. 나도 그렇지만 우리 교우들도 전도를 잘 못한다. 나도 못하는 걸 남에게 하랄 수 없어 강조하지 않았더니 용불용설(用不用說)이 돼버린 건지 전도들을 못한다. 게다가 가끔 가는 소풍 말고는 성경공부나 제자훈련이나 또 뭣이냐 수련회 부흥회 같은 일체의 프로그램이 없다. 수요일 성서학당은 인원이 너무 적어 그만 두었고 수련회는 청년들이 취직을 하니 자연 못 가게 됐다. 대략 지금까지 한 2~300여명이 방문자로 혹은 단기 체류자로 교회를 거쳐 갔는데 대부분은 이 아무 일 없는 교회에 적응하질 못한 것이다. 그들의 이동의 원인은 가장 많게는 큰 교회의 활발한 프로그램들이 아쉬워서이고, 그 다음은 담임목사의 정치적 성향(극우파는 오지 마시라), 그 다음은 결혼의 편리(?), 그 다음은 개인적 사소한 일들, 그 다음은 정말 아무 말도 없이 어느 날 사라져버린 경우들이라 나는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른다.
참고로 나는 심방을 거의 다니지 않고(물론 장례 같은 필수사항은 제외하고라도 원하면 가지만) 정히 가려면 입원이나 개업 특별한 가족사적 필요와 원함이 있을 때만 간다. 그 외에는 각자 알아서 잘 살자고 다짐을 둔다. 오해는 마시라. 내가 이기적이라거나 냉담한 목사는 아니니까. 나도 성도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할 줄 누구 못지않게 아는 사람이니까.
3.
내가 가장 염두에 두는 건 설교다. 이건 나의 할 본분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나는 교회에서 어떤 본분을 맡아 해야 할 일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가령 재정을 관리한다거나, 주보를 만든다거나, 피아노를 친다거나, 찬양을 인도한다거나, 반찬을 만들어 온다거나, 설거지를 한다거나 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외에 누군가 교회에서 달리 해야 할 본분이 있는 걸까? 있어야하는 걸까? 나는 그런 의구심이 든다. 그런 건 내가 생각하는 교회의 범주를 넘어가는 일이다. 성도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말도 아니고 교회가 마냥 우리 자유인 교회 같이 작아서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어야한다는 말도 아니다. 뜻있는 본분은 (내가 교회에서 하듯)각자 자기의 세계에서 감당해야할 일이고, 교회는 그들이 각자 자기의 분야에서 본분을 다하도록 교회에 매어두지 말아야 한다. 사찰 같은(암자였던가?) 교회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런 개념? 혹은 사도 바울의 두란노서원처럼 학원 같은 교회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성도가 사회의 각 부분에서 본분을 다하지 못하도록 매어 놓고 추구해야할 일과 사업과 본분이 교회에게 있을까? 난 없다고 본다. 내가 설교에 매진하고 그것에 나를 바치는 것은 오로지 교회에서 내가 제일 나간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하는 것처럼 각 사람이 자기의 영역에서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사회참여의 방식이다. 이런데도 내가 과격한가. 급진적인가. 나는 헌금도 교회가 운영되고 유지할 정도면 충분하다고 가르친다. 물론 아직 그게 안 된다. 그러나 억지로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 성도들은 이제 각기 알아서 자기의 할 일들을 찾아 각종 자발적 본분과 사명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4.
이 작은 교회에 모여 뭔가를 해보자고 성도를 쥐어짜는 것과 비교해 어떤가. 교회가 한다면 또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정부가 세금으로 선행을 하듯 헌금으로 선행을 할 것인가. 아니다. 선행은 반드시 자기가 자발로 현장성 있게 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교회가 자기의 고유한 욕망을 갖는 것을 반대한다. 자기 확대의 야망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것으로 치장하여 벌이는 사업들과 프로그램들을, 경영주와 자본가의 팽창 욕망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교회는 자유를 획득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말씀의 공동체이지 모여서 뭔가 회사나 관청처럼 공적 서류를 자꾸 늘리고 불리고 쌓고 세워가는 데가 아니다. 그렇게 하면 성도 자신은 못 서고 목사들의 목만 세운다. 그러니 목사들이 세습을 하지 않는가. 세습할 게 없어야 세습은 사라질 것이다.
자유인교회가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이유는 다른 게 없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찬을 하기 위해 함께 밥을 먹기 위해서이다.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교회이기 때문에 내 설교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번 설교하는 건 그 한 번의 설교로 충분하다는 이유 외엔 없다. 매주 돌아오는 속도에 비하면 그 한 번의 소비가 아까울 정도다. 하나를 소화하는데도 버거운데 거기에 또 뭘 더한다면 그건 낭비에 불과하지 않은가. 내가 하는 일이니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 외에는 중요한 것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있어야 그 다음 성찬도 밥도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로 모일 이유가 없다. 나에게 교회에 있어 설교는 그렇게 중요하다.
나는 한 주일에 서너 번씩 설교를 하고 주일이면 몇 부에 걸쳐 강단에 재 등판을 거듭하고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설교로 불려 다니는 목사님들을 대단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설교뿐 아니라 경영도 하고 사업도 하고 건축도 하고 당회도 하고 수련회도 하고 부흥회도 하고 기도원도 가고 금식도 하고 광화문에도 모여 태극기를 흔들기도 하고 무슨무슨 사랑에 반대하는 이상한 사랑의 집회도 가고 심지어 건강을 위해 골프도 치러 다니지 않는가.
나로서는 상상이 안 된다. 특히 설교는. 누군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앵무새가 아닌가. 말쟁이가 아닌가. 무당(巫堂)이 굿을 하더라도 신명(神明)을 유지해야 작두에 오르는 것처럼 목사도 영감을 유지해야 설교를 할 것 아닌가. 영감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차분하고 침착하고 조용한 침묵과 독서와 명상과 기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다못해 몇 줄의 편지를 쓰더라도 종이를 몇 장은 버려야 한다. 하물며 설교를. 그렇게 많이. 그렇게 유창하게. 해대는 것은 스스로가 앵무새 말쟁이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구나 1부의 그 시간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쏟아낸 목사가 2부 3부의 그 시간에 똑같이 눈물을 흘리며 하루 대여섯 번씩이나 자기표절의 감격에 떠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연하고 오연하다 못해 오싹해진다. 그들의 설교 자체는 차치하고라도. 나는 일단 적은 횟수가 성실하고 정직한 설교를 낳는다고 믿는다. 많은 묵상과 퇴고가 좋은 설교를 낳는다고 믿는다. 그것은 손님을 초대한 잔치집의 밥상과 같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다고. 오늘날 한국교회는 말쟁이 변설가들 한국교회 10대 혹은 20대 설교가라 떠받들여 진 목사들이 다 물 흐려 놓은 것 아닌가. 그들을 정말 시대를 대표할 설교자라고 할 수 있는가.
5.
폐일 언. 자신이 작성하지 않은 설교를 하는 목사들을 강단에서 우선 퇴출시키자. 남의 설교를 작성해주는 부목사들이나 전도사들은 회개하고 양심선언을 하길 바란다. 교회개혁은 설교회복이어야 한다. (케리그마의 선포로서 설교도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설교 이외에 목회를 목사는 꿈꿔선 안 된다. 그러려면 목사가 되지 말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게 여러모로 더 낫다. 교회는 목사들의 자아를 실현하는 욕망의 각축장이 아니다.
표절이 문제가 아니다. 설교가 실종하고 말쟁이들의 말잔치가 된 강단에서 그 말쟁이들을 내쫓고 진실한 설교자를 세우는 일. 그게 개혁의 시작이다. 어디부터일까? 내가 아는가. 여러분이 잘 알 터. 사단이 사단을 내쫓는 법이 없듯 목사가 목사를 내쫓을 법이 없다면 개혁은 목사로는 안 되는 것이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고린도전서 6:2). 행동을 개시하라. 이것이 진정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도행전 29가 아닌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랑의 희망 (0) | 2017.12.15 |
---|---|
가뭄의 의미 (0) | 2017.06.05 |
순복음 포수(捕囚)의 종언(終焉) (2) | 2017.05.03 |
성탄 메시지, 카이사르냐 그리스도냐 (0) | 2016.12.25 |
종교개혁은 종교회복이다 (0) | 2016.10.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