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관의 노래 신학(5)
나는 내 숨을 쉰다
홍순관 글 / 백창우 곡
- 2002년 만듦,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지’ 음반수록 -
숨 쉰다 숨을 쉰다
꽃은 꽃 숨을 쉬고
나무는 나무 숨을 쉰다
숨 쉰다 숨을 쉰다
아침은 아침 숨을 쉬고
저녁은 저녁 숨을 쉰다
나는 내 숨을 신다 내 숨을
숨 쉰다 숨을 쉰다
별은 별 숨을 쉬고
해는 해 숨을 쉰다
숨 쉰다 숨을 쉰다
바람은 지나가는 숨을 쉬고
신은 침묵의 숨을 쉰다
나는 내 숨을 쉰다 내 숨을
‘숨’은 인간에겐 영원한 테마요, 화두입니다. 숨처럼 강하고 고운 것도 없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강요받으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숨 쉴 것이다. 누가 강한지는 두고 보도록 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 불복종》에 나오는 글입니다. 사람뿐 아니라, ‘제 숨’을 쉬며 사는 생명이 가장 평화요, 가장 강한 것입니다. 제 숨을 쉬어야 건강하고 당당한 것이니까요.
어른 때문에 아이가, 학교 때문에 학생이, 남자 때문에 여자가, 정부 때문에 백성이, 강대국가 때문에 약소국가가 제 숨을 쉬지 못한다면 평화는 아닙니다. 과거 때문에 지금이, 지금 우리가 산 것 때문에 내일(미래)이, 사람 때문에 자연이 제 숨을 쉬지 못한다면 평화는 어렵습니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굳세게 서라’는 성경의 말씀(갈라디아서 5:1)은, ‘숨’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숨보다 자유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숨을 쉬기 위해서는 ‘다른 이’도 숨을 쉬어야 됩니다. 나의 숨과 너의 숨은 따로가 아닙니다.
종교의 숨이 거짓이 되면 세상은 깊은 상처를 받고 심각한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신자의 숨이 가식假飾이 되면 이웃은 멀어지고 하나님은 세상에 통로를 그만큼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의 프로필은 84년 ‘해프닝(happening 또는, performance art)으로 시작합니다. 그 행위미술의 제목은 ‘이용하는 것과 이용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당돌한 미대생의 행위는 무대와 객석, 모두에게 낯선 것이었습니다.
당시 대학가에 즐비하게 들어서있던 ‘복사 가게’를 연상하며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한 집 걸러 보이던 복사 가게는 80년대 초. ‘무엇’이든 ‘복사’하여 살던 시대의 상징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제는 확연합니다. 그것은 ‘제 숨(자기 색깔)’없이 만들어 내놓는 미술, 노래, 광고, 시, 건축, 드라마, 영화를 보며 천박한 카피를 비판했던 것이지요. 80년대 즈음, 유럽 쪽에 유학 갔던 학생들에게 특이한 아르바이트가 있었답니다. 그 나라에서 방영되는 CF(광고)를 녹화(복사)하여 그 일을 부탁한 방송국(혹은, PD)에 보내는 일입니다.
베껴먹는 일이 예사가 되면, 거짓은 중독이 됩니다. 대학에서는 베낀 논문이 통과되고, 예술가들은 카피를 심지어 기술로 여기게 됩니다. 창작을 뒤로하게 되지요. 숨처럼 깊은 번민은 사라집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체면도 사라집니다. 그런 세상은 내 것 네 것이 없고, 국경이 없어지고, 경계가 사라지고, 소유가 무의미해지는 천국이 아니라, 거짓과 음모와 술수가 설치는 이성을 잃은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제 숨’이란, 진지한 삶과 성실한 일상에서 우러나오는 ‘산제사’ 같은 겁니다. 정직하게 일하고 땀 흘리는 삶입니다.
아, ‘숨’이란 얼마나 좋은 것인가요. ‘숨’은 곧, 목숨입니다. 이토록 아름답고 귀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요. 깨끗한 숨을 쉴 수 있는 맑은 공기가 없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런 고백은 계절의 풍요에서 그치는 감상이 아니요, 시인의 감성도 아닌 공멸로 떨어지는 지구를 향한 절실한 연민이요, 통회痛悔입니다.
꽃이 시들면 “꽃이 진다!”고 하고, 사람도 목숨이 다하면 ‘숨진다!’고 합니다. 숨과 더불어 함께하지 못하고 지는 것입니다. 자연이 숨지면 사람도 숨집니다. 나무가 숨을 쉬어야 사람도 숨을 쉽니다. 우주가 숨을 쉬어야 지구도 자연도 사람도 숨 쉴 수 있습니다.
묘혈墓穴로 빠져드는 문명을 바라보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류의 문명이 무덤으로 바뀌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바람은 지나가는 숨을 쉬고 하나님은 침묵의 숨을 쉬기 때문일까요?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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