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이 좀 봐

홍순관의 '노래 신학' 2015. 1. 14. 10:24

홍순관의 노래 신학(3)

저 아이 좀 봐

홍순관 글 / 백창우 곡
- 2003년 만듦,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지’ 음반수록 -

 

디디담담 디디담담∼

저 새들 좀 봐
자유로이 하나님도 볼 수 있겠네
저 흐르는 강을 봐
너무 깊어 하나님도 건널 수 없겠네
저 나무를 봐
빛깔 고운 과일을 태어나게 하네

저 아이 좀 봐
이 세상을 넘어 가네
꽃과 말하며 신神과 말하며 생명을 말하며
쉬운 말 툭툭 던지며
쉽게도 넘어 가네
어지런 세상 참 쉽게도 넘어 가네

디디담담 디디담담∼

“저 강은 너무 깊어 하나님도 건널 수 없겠네!” 어느 날 아빠는 일기를 쓰다 잠든 딸, ‘소리’의 일기를 봅니다. 이 조그만 아이가 시골 목사로 사는 아빠가 힘들게 보인 겁니다. 집 앞에 내(川)가 흐르고 있는데 그걸 보고 강江으로 압니다. 아이의 일기에 흐르는 강과 아빠가 겹쳐진 겁니다.

단강이라는 곳에서 목회를 했던 한희철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농촌 목회이니 가난한 살림이었을 테지요. ‘소리’는 타고난 시인입니다. ‘강이 너무 깊다니’ 그래서 하나님도 ‘건널 수 없다니’ 기막힌 표현이요, 이입移入입니다. 어떤 시인도 가난한 목회 사정을 이보다 깔끔하고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할 겁니다.

 

 

얼마 후, 신기하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어린 아이들이 통했는지, 같은 시기에 이런 말을 동시에 들려줍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 여덟 살 다빈이가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새들은 날면서 하나님도 볼 수 있겠다. 그치?”
동생인 여섯 살 다솔이는 덩달아 호기심 많은 눈으로 열매열린 나무를 보며,
“아빠, 아빠, 저 과일은 나무가 태어나게 하지?” 그럽니다.

아둔한 세상에 급했나봅니다. 하늘의 언어들이 비처럼 나립니다. 주워 담기도 벅찹니다. 어김없이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입니다. 어렵게 말을 꾸며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난 것을 그대로 말하니, ‘제 말’이 되고 ‘제 세상’이 됩니다.

쉬우니 통합니다. 누굴 속이려면 꾀를 부리고, 편법便法을 쓰니 어렵고 복잡해집니다.


예수는 죽음을 향해 정면으로 걸었습니다.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비뚤어진 세상에게 조금도 숨기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다시 들여다보니 예수에게는 광야도 쉬웠고, 물 위도 쉬웠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지도 않았고, 언덕에서 뛰어내리지도 않았고, 뭘 준다고 받지도 않았습니다. 가만히 있었습니다. 구주 예수의 완성은 그랬습니다. 싱겁도록 쉬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쉬운 것은 어려움을 넘어 있습니다. 가만히 서있는 나무가 그렇고, 흐르는 시간이 그렇습니다.

하늘의 길은 이 땅에서의 번민과 갈등도 쉽게 만드는 신비가 있습니다. 광야도 버티고, 물 위도 걸으며, 뱃머리에서도 잠들 수 있습니다.

어울려 사는 세상에 옳은 말하기 어렵고, 남들 가는 쉬운 길 버리기가 어렵습니다. 신자라면 마음과 영혼이 흐려지는 길은 걷지 말아야 합니다. 절로, 쉬운 길이 옳은 길이 되어야 합니다.

바늘구멍을 어떻게 쉽게 들어가며, 저 너머의 세상을 어떻게 가뿐히 건너갈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처럼 꽃과 말하고 하나님과 말하며 생명과 말하고 자연과 말한다면 천국은 쉬운 것이 되겠지요.

“저 아이를 좀 보라”는 것은, 아이가 바라보는 자연과 세상을 보라는 것이요, 아이 속에 숨어있는 신비한 언어를 들으라는 것이요,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천국을 보라는 것입니다.

아이처럼 되라는 것은 순진하게 되라는 것만 아니요, 이 세상을 넘어 있으라는 말씀이겠지요. 복잡한 세상에 잡혀 살지 말고 훌훌 털어 쉽게 살라는 말씀일 겁니다.

홍순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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