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기지 않은 것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5)


챙기지 않은 것


배낭에 이런저런 짐들을 챙기며 일부러 까지는 아니라도 굳이 따로 챙기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지도였다. 지도를 챙기지 않는 일은 누가 봐도 무모한 일이었다. DMZ을 따라 걷는 길은 짧지도 않고 단순한 길도 아닐 것이다. 거의 모든 길이 낯설 것이었다. 길과 지명과 하천과 산과 고개 등이 상세하게 적힌 지도가 어느 때보다도 필요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를 알아보지 않았고, 구하지 않았고, 챙기지 않았다. 성격이 꼼꼼하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생각지 않은 곳에서 느닷없이 다가오는 불확실성과 한계를 직접 경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미리 챙기지 않은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는데, 숙박 장소였다. 열하루의 일정이니 열흘은 어디선가 잠을 자야 한다. 걷다가 날이 저물거나 걸음을 더 옮길 수가 없게 되면 그곳이 어디라도 잠을 자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숙소를 확인하고 정하는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일 수 없었다.


너덜너덜해진 로드맵. 그래도 길을 걷는 내게는 가장 좋은 지도였다.


하루 종일 걸었으니 씻기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다음날 떠날 준비도 해야 할 것이었다. (막상 걷다보니 숙소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몸을 챙기는 일이었다. 발가락과 발바닥에 생긴 물집을 처치하는 일 하나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런데도 어디에 어떤 숙박 시설이 있는지를 알아보지 않았고, 당연히 예약을 한 것도 아니었다. 혹시라도 한뎃잠을 자는 경우가 생기는 것 아닐까 싶어 배낭 바닥에 조금 두툼한 겉옷 하나를 챙겨 넣었을 뿐이었다.


거동이 수상한 자로 신고가 되어 자주 군부대에 끌려가게 될 것 같다고 농 반 진 반으로 걱정을 하는 친구에게, 그것은 걱정이 안 되는데 갑자기 멧돼지 떼가 검문을 하자고 길을 가로막지는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 된다고 농 삼아 대답을 하기도 했다.


알면서도 허술하게 떠나려고 했던 데에는 한 가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함광복 장로님이 적어준 로드맵이었다. 열하루 동안의 일정이 적힌 로드맵에는 내가 걸어가야 할 동네와 동네의 이름, 동네에서 동네로 이어지는 길, 어디쯤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지 잠을 자야 하는지, 이따금씩은 어떤 식당이 맛이 있는지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것을 신뢰하기로 했다. 프린트한 로드맵만을 들고 낯선 길을 장시간 걷는 것이 무모하다 싶으면서도 그것만을 의지해서 걸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DMZ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 혼자 걷는 나를 위한 세심한 배려가 담긴 코스와 일정, 그보다 좋은 지도가 어디에 있을까 싶었다.


종이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로드맵을 손에 들고 길을 걷다가 문득 마음에 드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 삶에도 로드맵이 있다면 과연 그 로드맵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었다.


얼마든지 각자가 다르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당연히 성경이 로드맵이 아닐까 싶었다. 삶의 걸음을 이끄는 로드맵이 되기에 충분하겠다 싶었다. 그런 생각은 이내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로드맵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일까?


아름다운 것은 위태한 것, 맨 몸으로 맨 끝에 서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크리스천 학부모 그룹과 넌 크리스천 학부모 그룹을 나눈 뒤 그들이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크리스천 학부모 그룹이 바라는 것이 넌 크리스천 학부모 그룹이 바라는 것보다 도덕과 윤리적인 면에서 볼 때 훨씬 세속적인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믿음 생활을 하는 부모들이 믿음 생활을 하지 않는 부모들보다도 실제적으로는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을 로드맵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 내 욕심을 따라 살면서, 그것을 정당화해주고 실현시켜 주는 도구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었다.


걷기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이들 중에는 함 장로님이 작성한 로드맵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았다.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아까운 자료, 혹 다음번 같은 길을 걸을 누군가에게 도움 되지 않을까 싶어 장로님께 말씀을 드리니 그리 꼼꼼한 자료가 아니라면서도 필요하면 얼마든지 그러라 하신다. 평생 기자의 길을 걸어오며 누구보다 분단의 그 땅을 많이 밟으신 장로님, 그 또한 장로님의 백발과 호방한 웃음과 잘 어울리는 일이다 싶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1. 걷는 기도를 시작하며http://fzari.tistory.com/956

2. 떠날 준비 http://fzari.com/958

3. 더는 힘들지 않으려고http://fzari.com/959

4. 배낭 챙기기 http://fzari.com/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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