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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

소똥령 마을

by 한종호 2017. 7. 19.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12)


소똥령 마을


소똥령이라는 이름이 주는 낭만적인 기대와는 달리 소똥령 마을로 향하는 길은 매우 단조롭고 밋밋했다. 아침부터 쏟아지는 뙤약볕을 고스란히 맞으며 자동차들이 내달리는 46번 국도를 걸어 올라야 했다. 아스팔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열기가 담겨 숨을 마음대로 쉬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길 어디에도 소들은 보이지 않았고, 소똥 냄새는 물론 소 모는 아이들 소리나, 소 방울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길을 걸어보니 알겠다. 급경사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급경사는 얼마 동안만 참고 견디면 된다. 오히려 더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은 완만한 경사 길을 계속해서 걷는 일이었다. 완만한 경사는 당장 느끼기는 어려웠지만 언젠지도 모르게 체력과 정신력을 바닥나게 만들고는 했다.


이름부터 정겨운 소똥령 마을. 어디선가 풀을 뜯는 소떼들과 소를 모는 소년들의 모습이 보일 것도 같았고, 소 방울 소리도 들려올 것 같았다.


소똥령 마을까지가 오전 일정, 진부령을 넘어야 하는 오후를 위해서는 힘을 비축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도 소똥령 마을에 이르렀을 때쯤엔 온통 땀범벅, 몸이 축 처지고 말았다. 태백산맥을 넘어야 하니 점심을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고 로드맵에는 적혀 있었지만, 흔할 것으로 짐작했던 식당은 어디에도 보이지를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경사진 길을 가리키며 계곡 아래로 가면 밥을 먹을 수 있을 거라 일러준다.


계곡 아래엔 넓은 캠핑장이 있었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캠핑장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식당을 찾아가니 마침 단체 손님들이 모임을 갖고 있었다. 무슨 거창한 모임인지 축사와 인사말이 계속 이어졌고, 순서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쳤다.


누구에게 주문을 해야 하나 기웃거리는데도 누가 따로 맞아주는 사람도 없고, 관심을 갖는 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식당 주방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마을 부녀회 대표가 식당을 맡고 있는 것 같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단체 손님을 받았기 때문에 개인 손님은 받을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인근에 다른 식당이 있는 지를 물었지만, 없단다.


난감했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어도 진부령은 만만치가 않을 터인데 점심을 굶고 큰 고개를 넘게 생겼으니, 기가 막혔다. 소똥령 마을에 오면 말린 소똥으로 구운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는 건가 했던 것은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낭만적인 기대였다. 점심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하는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점심을 안 먹으면 나도 안 돼요.”


단체손님 때문에 손이 바쁜 아주머니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걸어서 진부령을 넘어야 하는데 뭐라도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러니 밥하고 김치만이라도 달라고 했다.


소똥령 마을에 가면 말린 소똥으로 구운 스테이크를 먹나 싶었는데, 너무 낭만적인 기대였다.


걸어서 진부령을 넘겠다는 말을 듣고는 내가 딱했는지 기특했는지 주방 한쪽 구석에 의자를 갖다 주며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잠시 후 쟁반에 밥과 반찬 두어 가지를 담아왔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싶어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이번엔 펄펄 끓는 탕 한 그릇을 가져다준다.


염소탕이라고 했다. 아마 단체 손님들의 주 메뉴가 염소탕인 모양이었다. 한 그릇을 잠깐 사이에 비우자 이번에는 수박과 토마토도 가져다주었다. 길을 걷는 나를 격려하려는 마음이 느껴졌다.


“얼마를 드리면 되지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값을 물었다. 걸식하듯 밥을 먹었지만 그래도 동네에서 운영하는 식당, 혹시라도 실수할까 싶었다.


“만원만 주세요.”


묻기를 얼마나 잘했던가. 배려를 가벼운 호의로만 받았다면 아주머니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생각지 않은 곳에서 점심을, 그것도 염소탕을, 그것도 만원에 먹었으니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주방 밖으로 나서며 인사를 하자 아주머니도 인사를 한다.


“염소탕을 먹었으니 진부령도 염소처럼 가볍게 넘으세요!”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래야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일이 진부령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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