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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

행복한 육군

by 한종호 2017. 7. 23.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14)


행복한 육군


자주 혹은 정기적으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기회가 될 때면 함장로님께 소식을 전했다. 로드맵을 만들어주신 뒤 그 길을 잘 걷고 있는지, 생각지 못한 어려움을 만난 건 아닌지 누구보다 걱정이 많을 것 같아서였다.


첫날 일정을 모두 마치고 숙소에 들어 장로님께 소식을 전했더니 장로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주무시면서 꾀를 내세요. 응원군을 불러 물도 간식도 챙기고 잠자리를 구하게 하는 것도 한 가지 꾑니다. 걷는 것 이상으로 그런 일이 더 힘든 겁니다. 


육군 행군 훈련은 먹고 자는 것은 지원부대가 따로 해주기 때문에 걷기만 하면 됩니다. 해병대는 그것까지 스스로 해결합니다. 해병대에서 육군으로 소속변경하시는 것을 강추!! 저만 알고 있을게요. 


‘하나님 우리 목사님 흉흉한 이 세상에 당신의 종이 된 저 깊은 속을 위로하세요. 아멘.’


요일 별로 담긴 비타민과 영양제. 그것을 먹을 때마다 우린 당신을 응원합니다 하는, 따뜻한 격려로 와닿았다.


다음날 소똥령 마을을 향해 오르다 잠시 도로 옆 나무 그늘에 들어 쉬는 시간, 장로님께 답장을 드렸다.


“진부령으로 가는 길, 잠시 그늘 아래에 앉았습니다. 전해주신 로드맵이 큰 도움이 됩니다. 군 생활은 육군에서 했지만, 걷기는 해병대를 택하고 싶습니다.


그렇잖아도 지원군을 자청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필요하면 이야기 하겠노라 했습니다. 불확실성을 마주하는 것도 유익한 경험이다 싶습니다.


아침에 대대리를 지나며 대대교회에 들렀습니다. 먼저 소천한 친구 목사가 목회하던 교회였지요.


저 멀리 병풍 같은 산이 보입니다. 어서 오라 팔을 벌리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걸어야겠어요.”


막 일어서려는데 장로님이 답장을 보내왔다.


“대대리를 지났으면 오늘 길은 헷갈릴 데가 없습니다. 다만 오늘 숙박이 문제, 진부령에 감리교회 기억하시죠? 원래 해병대가 멋있지요. 멋지세요.”


해병대와 육군, 재미난 표현이었다. 단어 하나에 내가 갖는 시간의 의미와 성격과 빛깔이 오롯이 담긴다 싶었다. 군더더기를 버린다면 짧은 말 한 마디에도 충분한 의미가 담길 수 있는 법이다.


먹는 것이 부실하면 쓰러진다며 먼 길을 찾아와 토종닭 백숙을 사주신 분도 있었다.


실은 길을 떠나기 전에 몇 가지 고마운 제안들이 있었다. 하루나 이틀 정도 같이 길을 걷고 싶다는 이들이 있었다. 행여 부담을 끼치거나 번거롭게 할까 싶어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같이 걷자고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먼저 동행자가 되겠다는 말은 더없이 고마운 마음이었다.


얼마든지 그러자고 했지만 결국은 혼자 걷게 되었다. 마음과는 달리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이도 있었고, 생각지 않은 일로 병원에 입원을 하기도 했고,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혼자 걷기로 한 내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고 물러선 이도 있었다.


동행하겠다는 말도, 동행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마음도, 배려하는 마음으로 포기하는 모습도 모두가 고마웠다.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 언제든지 한걸음에 달려가겠다고 한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떠난 길이었기에 모든 일정을 ‘해병대’로 마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내 생각대로 된 것은 아니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고마운 만남, 고마운 일들이 참으로 많았다. 거미줄에 걸린 이슬이 아침 햇살에 영롱하게 반짝이듯 걷는 기도의 시간을 의미 있게 해 준 소중한 사람들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해병대’에서 벗어나 ‘행복한 육군’이 되고는 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1. 걷는 기도를 시작하며http://fzari.tistory.com/956

2. 떠날 준비 http://fzari.com/958

3. 더는 힘들지 않으려고http://fzari.com/959

4. 배낭 챙기기 http://fzari.com/960

5. 챙기지 않은 것 http://fzari.com/961

6. 길을 떠나니 길 떠난 자를 만나고 http://fzari.com/964

7. 따뜻한 기억과 든든한 연대 http://fzari.com/966
8. 가장 좋은 지도 http://fzari.com/967
9. 길을 잘 일러주는 사람 http://fzari.com/969
10. 사람은 가도 남는 것 http://fzari.com/971
11.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http://fzari.com/973
12. 소똥령 마을 http://fzari.com/974
13. 아, 진부령! http://fzari.com/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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