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11)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DMZ를 따라 열하루를 걷다보니 위험한 길들이 참 많았다. 지뢰나 낭떠러지, 무서운 동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차도와 인도가 구분이 되어 있지 않은 길이 의외로 많았다. 도로에 차도만 있지 인도가 따로 없었다. 인도가 없는 길은 자동차를 타고서만 지나갈 수 있다는 뜻인지, 차가 없다면 돌아서 혹은 날아서 가라는 것인지, 도로를 만들 당시의 규정을 따른 것이겠지만 길을 만든 이들의 심사가 무심하게 여겨졌다.


어쩔 수 없이 도로 가장자리를 걷는 수밖에 없었다. 차들이 달리는 길을 걷는 것은 그 자체가 위험하기도 하고, 늘 상황을 예의주시해야 하니 기도를 드리거나 마음을 집중하기에도 좋을 것이 없었다.



길을 걸어보니 위험한 길이 의외로 많았다. 무엇보다 인도가 따로 없는 길들이 위험했다.


대개는 마주 오는 차를 마주보며 걸었다. 하나를 가지고 떠난 스틱을 오른손에 잡았던 것은 그래도 위험을 줄이려는 생각이었다. 뭐라도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 운전하는 이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도로 위를 걷고 있는 나를 두고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차들이 있었다. 얼마간 거리를 두고 지나가면 좋겠는데 마치 왜 도로 위를 걷고 있느냐는 투로 바싹 가까이 지나가는 차들이 있었다. 실은 대부분의 차들이 그랬는데, 덩치가 큰 트럭이 그렇게 지나갈 때는 아찔하곤 했다.


길을 걷는 나를 보고는 속도를 줄여 다가오고, 나와 간격을 두고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차들도 있었는데 그 잠깐의 순간이 참 고마웠다.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따뜻하고 충분한 배려로 전해졌다.


그런 모습을 보며 사람도 다를 것이 없겠다 싶었다. 누군가의 곁을 함부로 지나가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닐 것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 곁을 지나간다 해도 내가 지나치는 사람을 충분히 배려하며 지나가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시인 이성선은 <다리>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그러고 보면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리를 지나가는 누군가를 위태하게 만드는 사람이기도 한 것이었다.



오천 터널을 빠져나와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저 앞에서 훈련 중인 군인 트럭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프 차량이 앞장을 섰고 그 뒤를 군인들을 태운 여러 대의 트럭이 줄을 지어 달려오고 있었는데, 그 때 갑자기 생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군인 트럭 사이에 있던 승합차 한 대가 느닷없이 트럭을 추월한 것인데, 승합차는 내 곁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한적한 길이라 괜찮다고 생각을 했던 것인지 하필이면 커브 길에 추월을 나왔다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를 급히 피한 것인데, 황급히 핸들을 돌려 다시 트럭 사이로 끼어든다는 것이 내 곁을 스치듯이 지나간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아뜩하고 아찔한 순간이었다.


승합차 운전자는 저도 놀랐는지 나머지 트럭들도 추월을 하더니 꽁지가 빠져라 내달렸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돌아서서는 “이런! 이런! 이런!” 달려가는 승합차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놀라기도 했거니와 화도 났다. 하긴, 종일 혼자 길을 걸으며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터에 모처럼 말을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도망을 치듯 내달리는 승합차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소리를 치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무례한 것은 난폭한 것이구나! 무례한 것은 그냥 무례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무례하게 행한 이는 짐작을 못하거나 자신이 한 일을 가볍게 여길지 몰라도 상대방에게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난폭함이 되는 것이었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할 때 또 하나 이어지는 생각이 있었다. 길을 걷는 동안 나를 그냥 지나친 모든 차들이 새삼 고마웠다. 방금 전 아찔하게 스쳐간 승합차처럼 얼마든지 나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내 곁을 지나가 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싶었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나를 지나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든지 나를 공격하고 쓰러뜨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그냥 지나간 많은 사람들, 그들에 대해서도 고마워해야 할 것이었다.


맞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 중에는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도 있고, 다리를 위태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다리 지날 때마다 우리는 다리를 다리답게 해야 할 것이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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