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여, 복이 네게 기대어 있구나

김기석의 새로봄(103)

 

화여, 복이 네게 기대어 있구나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아브람은 장막을 거두어서, 헤브론의 마므레, 곧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았다. 거기에서도 그는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창세기 13:14-18)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던 아브람은 큰 부자가 되어 벧엘 인근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곳은 아브람이 처음으로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곳이다. 그런데 한 가지 곤란한 문제가 생겼다. 조카인 롯도 역시 재산이 늘어서, 삼촌과 조카가 함께 거주하기에는 그 땅이 비좁았던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추수를 끝낸 여름 들판에서 방목을 하는 유목민들이었는데, 풀밭을 확보하고 가축에게 먹일 물을 확보하는 것은 각 집단의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였기에 목자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아브람은 해결책을 모색한다. 문제가 있는 것을 없는 양 덮어두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갈등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악화될 수 있는 갈등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당사자들이 힘들더라도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그래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아브람은 목자들 사이의 다툼이 자칫하면 숙질(叔姪)간의 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알았기에 조카 롯을 부른다. 그리고 ‘혈육 간에는 다투면 안 된다’는 대전제 아래, 둘 사이의 갈등을 피하는 길은 서로 독립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브람은 롯에게 선택권을 준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사람들은 여기서 아브람의 인간성을 보지만 사실은 가속을 책임진 사람이 취해야 할 책임성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롯은 삼촌의 말이 합당하다고 여겨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하여 마침 주님의 동산 같아 보였고, 이집트 땅과도 같아 보였다. 그는 주저없이 그곳을 택한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식의 미담을 기대하는 우리에게 롯의 선택은 매우 유감스럽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요단 들을 바라보는 롯의 시선을 선악과를 바라보는 하와의 시선에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성서 기자는 롯의 선택이 그다지 현명한 것이 아니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아직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이었다”는 말이 그것이다.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노자는 “화여, 복이 너에게 기대어 있구나. 복이여, 화가 네 속에 엎드려 있구나. 누가 그 끝을 알리요?”〔禍兮(화혜)여 福所倚(복소여)요 福兮(복혜)여 禍所伏(화소복)이니 孰知其極(숙지기극)이리요, 『도덕경』 58章〕 하고 탄식했다. 복과 화가 뿌리부터 뒤엉켜 있는 것이라면 복을 구하는 것도 화를 피하는 것도 어찌 보면 부질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다.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눈길이 닿는 모든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아주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람이 머물러 살게 된 그 땅은 ‘헤브론’이었다. 헤브론은 ‘하나님의 친구의 도시’라는 뜻이다.

 

*기도*

 

하나님,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이익이 걸린 문제 앞에서 등을 돌리는 일이 많습니다.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마음이 인간관계를 규정지을 때 우정은 가뭇없이 스러지고 맙니다. 롯은 철부지였을지 모르지만 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일쑤 그런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면서도 원망에 빠지지 않는 사람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음을 압니다. 주님, 우리 속에서 생명과 평화의 꿈이 소멸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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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5)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

 

원로 장로님 한 분과 이야기를 하며 그분이 장로로 세워질 때의 이야기를 들었다. 30대 후반, 나이며 신앙이며 당신은 자격이 없다고 피했지만 담임목사님이 몇 번인가를 찾아와 설득하며 권했다고 한다. 새벽에도 밤중에도 찾아왔다니 교회나 목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겠다 싶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요즘의 세태로 이어졌다. 자격 없다 싶은 이들이 자리를 탐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믿음도 믿음이지만 많은 이들을 이끌려면 성품이 중요한데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자리에 욕심을 내고, 그 직분을 얻기 위해 애를 쓸 때가 있다. 그 결과로 빚어지는 일은 본인은 물론 교회나 다른 이들에게도 불행한 모습으로 나타나고는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장로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내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불환무위, 환소이립’(不患無位, 患所以立)이라는 말로, ‘자리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지를 걱정하라’는 뜻이다.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없는 자는 자리를 탐하고, 마땅히 그 자리에 서야 할 자는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으니, 참으로 기이한 세상이다. 세상은 자리를 탐하고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애를 쓰지만, 정말로 걱정할 일은 따로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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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가 익는 계절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4)

 

오디가 익는 계절

 

피기도 전에 잘리는 담배 꽃 이야기를 듣고는 담배 꽃엔 예수님의 십자가와 어머니의 희생이 담겨 있는 것 같다며 아직 본 적이 없다는 꽃을 보기 위해 시골을 찾았을 때, 담배 밭 초입에 선 뽕나무에는 오디가 잔뜩 달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까만 오디가 종알종알 가지마다 가득했다.

 

바닥에도 떨어진 것이 까맣게 널려 있었으니 오디는 익을 대로 익은 것이었다. 보기로 한 담배 꽃은 뒷전, 우리는 오디를 따먹기 시작했다. 손과 입이 금방 까맣게 변했는데, 그런 서로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 같이 웃어댔다.

 

 

 

 

오디를 따먹다 보니 어릴 적 소리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소리가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오더니 물었다.


“아빠, 뽕나무를 보지 않고도 오디가 익은 줄 어떻게 아는지 알아요?”


오디가 익었는지를 확인하려면 뽕나무를 보는 일이 당연한 일, 나무를 보지 않고도 오디 익은 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 궁금했다.


“새똥을 보면 알아요, 새똥이 까매지면 오디가 익은 거예요.”


오디를 따먹은 새가 똥을 누면 새똥의 색깔이 오디 빛깔, 새똥만 살펴도 오디 익은 걸 알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관찰하며 자라는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다시 한 번 오디의 계절이 왔다. 오디가 달린 뽕나무 앞에서는 내남없이 모두가 아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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