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86)

 

이제 우리 웃자고

 

도대체 웃을 일이 없어, 그보다 쓸쓸한 말이 어디 있을까. 쓸쓸한 말이 어디 한둘일까만, 그보다 더 쓸쓸한 말이 무엇일지 모르겠다.


도무지 웃을 일이 없던 한 사람이 있었다. 다 늙도록 아기를 낳지 못한 사람이었다. 이제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생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아기가 없다는 것이 웃음을 잃어버린 이유의 전부가 아니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이유라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숨은 이유도 있다. 내게 주셨던 주님의 약속이 소용없어지고 만 것이다. 너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알처럼, 밤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겠다고 했던 빛나는 약속이었다. 모래알은커녕, 별들은커녕 단 한 명의 자녀도 태어나지를 않았던 것이다. 기대도, 가능성도, 어쩌면 믿음까지도 닫히고 말았다. 무얼 더 바란단 말인가. 더 이상은 웃을 일이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앞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극진한 대접을 받곤 고맙다는 인사치고는 과한 인사를 한다. 내년 이맘 때 아들을 낳을 것이라니. 장막 어귀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사라는 웃고 만다. “풉!” 하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년 뒤 사라는 정말로 아기를 낳는다. 거짓말처럼 할머니가 아기를 낳은 것이다. 아기에게는 이삭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이삭이란 웃음, 기쁨이란 뜻이다.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기가 막혀 웃었던 사라가 정말로 좋아서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세기 21:6) 그렇게 말하며 웃는 사라는 분명 입이 귀에 걸렸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불임의 시간이 있다. 꿈도, 선한 마음도, 신뢰도 닫히고 마는 불임의 시간이 있다. 불임의 시간은 웃음을 빼앗아 간다. 불임의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생명의 탄생이다. 탄생은 태의 문이 열림으로 가능하다. 태는 긍휼이다. 인간의 몫이 아니다. 불임의 시간이 탄생의 시간으로 바뀔 때 비로소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게 된다.

 

새로운 달 7월을 맞는 첫 새벽기도 시간, 이제 우리 불임의 시간을 끝내자고, 허리가 휘도록 목젖이 다 보이도록 맘껏 웃자고, 그 은총을 구하자고, 말씀에 기대 마음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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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24)

 

경외심을 잃을 때

 

이것이 너희가 그렇게 좋아하던 도성 두로냐? 그토록 오랜 역사를 가지고 저 먼 곳에까지 가서 식민지를 세우던 도성이냐? 빛나는 왕관을 쓰고 있던 두로, 그 상인들은 귀족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이 우러러보던 사람들이었는데, 두로를 두고 누가 이런 일을 계획하였겠느냐? 그 일을 계획하신 분은 만군의 주님이시다. 온갖 영화를 누리며 으스대던 교만한 자들을 비천하게 만드시고, 이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자들을 보잘 것 없이 만드시려고, 이런 계획을 세우셨다. 스페인의 딸아, 너의 땅으로 돌아가서 땅이나 갈아라. 이제 너에게는 항구가 없다. 주님께서 바다 위에 팔을 펴셔서, 왕국들을 뒤흔드시고, 베니게의 요새들을 허물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처녀, 딸 시돈아, 너는 망했다. 네가 다시는 우쭐대지 못할 것이다. 일어나서 키프로스로 건너가 보아라. 그러나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하지 못할 것이다.”(이사야 63:7-12)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빈곤과 주택난, 그리고 전쟁이 사람들의 마음에 입힌 상처와 그에 따른 허무주의 등을 다루고 있다. 서른여덟 살의 캐테는 세 아이를 데리고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남편인 프레드는 가족들을 사랑했지만 자기의 무능력 때문에 그들이 상처 입는 것이 싫어서 가출했다. 이 가엾은 부부는 한 달에 한 번씩 더러운 여인숙에서 만나곤 했다. 어느 날 캐테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시다'고 탄식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한다. 가난과 생의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남편의 늙은 얼굴을 보며 캐테는 말한다. “당신은 기도를 해야 해요. 정말 그래야 해요. 기도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걸 당신은 왜 외면하는 거예요?” 남편은 맥없이 대답한다. “당신이 날 위해 기도해 줘. 나는 기도하는 법을 일어버렸어.” 아내는 다급하게 말한다. “연습이 필요해요. 끈질기게 해야 해요. 계속해서 다시 시작해 봐요. 술 마시는 건 소용없어요.” 남편은 자조적인 미소를 띠고 말한다. “취하면 어떤 때 기도가 아주 잘 돼.” 캐테는 안타까워하며 말한다. “그건 소용없어요, 프레드. 기도는 정신이 맑은 사람이 하는 거예요.”

 

 

 

 

삶이 힘겨워 기도조차 할 수 없는 때, 하나님조차 너무 멀리 계신 것 같아 암담할 때, 나 홀로 섬처럼 외로울 때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꿈조차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데, 꿈조차 빼앗긴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세가 그러했다. 그들은 낯선 땅의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하늘을 올려보아도 하늘은 그저 무심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탄식한다. “하늘로부터 굽어 살펴 주십시오. 주님이 계시는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곳에서 굽어보아 주십시오. 주님의 열성과 권능은 이제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나에게는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쳤습니다.”(이사야 63:15) 

 

조상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고, 그들을 찾아오시어 출애굽의 대업을 이루신 하나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반석에서 샘물을 내신 그 하나님, 우렛소리와 우박으로 적들을 물리치신 그 하나님의 기세가 지금은 어디에 계신가?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 버린 것일까? 하나님은 깊은 침묵 속에 계실 뿐 응답하실 마음조차 없으신 것 같다. 기쁨도 감격도 없는 삶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주님의 다스림을 전혀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으며,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하는 자같이 되었습니다.”(이사야 63:19) 

 

이것은 분명 비극적 상황이다.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주님의 길에서 떠나고, 마음이 굳어져 하나님을 경외치 않았기 때문이다. 삶의 가장 큰 전락은 가난도 아니고, 질병의 고통도 아니고, 명예를 잃거나, 어떤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경외심을 잃는 것이다. 본(本)이 바로 서야 말(末)이 누추하지 않은 법이다. 

 

*기도*

 

하나님, 든든한 줄만 알았던 삶의 토대가 흔들릴 때면 우리는 어찌할 줄 몰라 허둥거립니다. 내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홀연히 사라지고 나면 허무가 그 빈자리를 채웁니다. 삶이 온통 뒤죽박죽으로 변할 때 근본을 성찰할 수 있는 용기와 여백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삶의 꼴을 새롭게 가다듬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새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주님이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눈 먼 사람처럼 더듬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든든히 붙잡아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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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85)

 

밝아진 눈

 

사고라고 했다. 주물공장에서 일하다가 입은 사고라 했다. 사고를 직감하고 현장으로 달려갈 때 하필이면 뜨거운 주물이 눈으로 튀었다는 것이다. 한창 젊은 나이에, 한순간에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이자 상실감일까. 단지 두 눈의 시력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빼앗기는, 자칫 영혼의 시력까지 빼앗아가는 난폭하고 거친 상실이었을 것이다.
 
연합성회를 앞두고 후배 목사는 그 교우에게 참석을 권하며 강사에 대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고 한다. 시를 쓰는 목사라고. 자신의 인생에 느닷없이 찾아온 절망을 문학적인 관심으로 이겨내려는 그에게는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집회에 별 관심이 없었던 그가 참석을 했다. 진한 선글라스를 끼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아내지 싶은 분의 어깨에 손을 얹은 그는 예배 시간마다 언덕을 오르고는 했다. 새벽 낮 저녁으로 이어지는 총 10번의 집회 중 그가 보이지 않았던 시간은 따로 없었지 싶다. 맨 앞쪽에 앉아 한결같이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이따금 던지는 질문의 핵심을 그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사랑해’의 반대말을 물었을 때 ‘사랑했어’라 대답을 한 이도 바로 그였다.

 

집회를 모두 마친 시간, 마당은 예배당에서 나오는 교우들과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차량으로 번잡했다. 하지만 나는 한 눈에 그를 알아보고 그에게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 그도 반가운 마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담임 목사님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회 기간 성도님을 보면서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벗이라는 뜻이지요.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을 했다.


“말씀을 들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참 밝아졌습니다. 다음에 꼭 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그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남긴 인사는 마음에 남았다. 맞다, 세상을 바라보는 진정한 눈은 마음의 눈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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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23)

 

멍에까지 메라구요?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28-30)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을 부르신다. 물론 복음서의 맥락에서 보자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율법이라는 그물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에게 생은 선물이 아니라 부담이다. 명령과 금령이 마치 촘촘한 거미줄처럼 그들을 얽어맨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들을 자유와 해방의 길로 이끌기 위함이지만, 권위자들에게 장악된 율법은 오히려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삶의 장애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안식일의 조문에 매어 있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용서받기 어려운 도발이었다.

 

지금 율법의 멍에를 메지 않고 있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삶이 참 무겁다. 어깨에 얹힌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비틀거릴 때마다 그 짐으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하게 살 수 있기를 꿈꾼다. 그러나 그런 홀가분한 자유는 여간해선 허용되지 않는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바람을 타는 일인진대 인생의 짐에 짓눌리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때로는 포기하고 싶고, 때로는 달아나고 싶지만, 그래도 그 짐을 지고 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세상에서 유력한 이들은 자기 짐을 남에게 떠맡기는 일에 익숙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짐을 지고 살아야 한다. 짐이 무겁기에 우리는 될 수 있으면 속히 그 짐을 벗고 싶어 한다. 오래 전에 방영되었던 오락 프로그램 중에 부풀어 오르는 풍선을 주고받으면서 제시된 상황에 맞는 말을 하는 게임이 있었다. 처음에는 다들 여유게 말을 하지만 풍선이 커질수록 상황은 달라진다. 사람들의 얼굴은 긴장되고 말은 빨라지고 논리는 사라지고 오직 떠넘기자는 생각밖에 없다. 우리 삶이 꼭 그렇지 않던가? 예수님은 이처럼 전전긍긍하는 우리를 부르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어깨에서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이는 격 아닌가? 짐이 무거워 비틀거리는 이에게 주님의 멍에까지 메라니 너무 가혹한 요구 아닌가? 주님의 멍에는 다른 이를 복되게 하기 위해 자기 안일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바로 이 요구야말로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는 통로이다.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주님의 멍에를 메려 할 때 우리 짐이 오히려 가벼워진다. 이것은 이론도 논리도 아니다.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진실이다. 바울 사도는 이 놀라운 신비를 경험했기에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9:19)라고 고백했다. 믿음 안에서 무거움과 가벼움은 이렇게 홀연히 자리를 바꾸고 있다.

 

*기도*

 

하나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참 달콤했습니다. 우리는 상처투성이인 몸과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 응석받이처럼 위로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십니다. 울고 싶을 때 뺨 때려주는 격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힘겹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지긋지긋한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겠습니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는 권고를 따르겠습니다. 그 길 위에서 낙심하거나 지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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