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33)

 

풍요로움이라는 시험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전하여 주는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이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지라도, 또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당신들의 재산이 늘어날지라도,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당신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신명기 8:11-14)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계의 말씀을 전하신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경고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후대에 기록되었음을 감안할 때 이 말씀의 삶의 자리는 출애굽 공동체가 아니라 정착생활에 익숙해진 백성들의 삶이라 할 수 있다. 12절부터 14절까지의 문장 구조는 “Ⓐ 할지라도 Ⓑ 하지 말라”가 된다. Ⓐ에 들어갈 말은 다양하다. ‘배불리 먹다’,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다’, ‘소와 양이 번성하다’, ‘은과 금이 많아져서 재산이 늘어나다’ 등이 그것이다. 그에 비해 Ⓑ에 들어갈 말은 하나이다. “하나님을 잊지 말라”가 그것이다. 이런 경고가 주어진 까닭은 하나님을 잊는 일이 현실 속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잊은 것은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신학자는 사람은 삶을 위한 도구를 바꿀 때 하나님까지 바꾼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고통의 시험보다 더 이기기 어려운 것이 풍요의 시험이다. 텍스트를 꼼꼼히 살펴보면 Ⓐ와 Ⓑ를 매개하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교만한 마음’이다.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여전히 유통되는 것은 이런 현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능력, 경험, 판단, 결단을 자랑한다. 말은 겸손해도 그 얼굴에 깃든 득의의 표정이 그의 교만함을 드러낼 때가 많다. 믿음이 좋아 보이는 이들 가운데는 자기 자랑을 하나님의 은혜로 덧칠하는 이들도 있다. 교만한 마음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무시한다. 그 때문에 그가 있는 곳에서는 불화가 끊이질 않는다. 그 불화 속에 하나님의 자리는 없다. 

 

 

 

 

존 웨슬리는 수입이 늘어도 생활비 지출은 늘이지 않았다고 한다. 청빈한 마음은 청빈한 삶에서 비롯된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지바고가 하얗게 성에 낀 창문 아래서 촛불을 밝혀놓고, 손가락을 잘라낸 장갑을 낀 채 손을 호호 불며 시를 쓰던 장면이다. 세상에는 그렇게 정신의 칼날을 서늘하게 세우며 사는 이들이 있다. 

 

신명기 사가는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잊을 때 욕망의 지배가 시작되고 영혼의 전락이 가시화된다. 히브리인들을 종살이 하던 땅에서 이끌어내 자유의 새 삶으로 이끄신 해방자 하나님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을 미워하신다. 스탠리 머피(Stanley Murphy) 신부의 말은 그런 점에서 시사 하는 바가 많다. “누구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어떤 상황에서든 신성한 실재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순간 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거의 무한하게 커진다.”(존 하워드 그리핀, 『블랙 라이크 미』에서 재인용) 하나님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죄의 심연에 이끌린다.

 

*기도*

 

하나님, 삶이 곤고할 때면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절박함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삶이 평안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잊곤 합니다. 하나님을 잊기에 이웃들의 절박한 소리에도 귀를 닫고 삽니다. 좋은 집에 살고,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풍요로움이 하나님을 잊는 빌미가 된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화입니다. 주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마음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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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93)

 

조선적(朝鮮籍) 

 

파주 출판단지 안에 있는 도서관 <지혜의 숲>에 다녀왔다.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열리는 ‘윤동주 시와 함께 하는 한일교류 한글 서예축제’를 보기 위해서였다. 홍순관 집사님의 작품과 일본 오카야마 조선학교 학생들의 서예 작품을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글씨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이 무얼 알까만 홍 집사님의 한글 글씨 속엔 자유로움과 멋이 그럴 듯이 깃들어 있지 싶다. 언뜻언뜻 장일순도 보이고, 추사도 느껴진다. 어느덧 자연스러움에 가까워져 글씨가 곧 사물을 담아낸다. 글씨와 사물의 경계가 지워져 하나로 만나는 지점에 가깝다 싶다.

 

 


 

 

이번에 전시되고 있는 ‘나무’라는 글씨를 봐도 그랬다. 내 방에도 걸려 있는 ‘나무’라는 글씨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나무’다. 나무 한 두 그루가 서로 어울려 서 있다. 조금만 눈여겨보면 그것이 ‘나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가 있다. 하지만 이번 전시회에 걸린 ‘나무’는 조금 달랐다. 옹이 지고 뒤틀린, 투박하고 거친 나무였다. 상처를 얼마든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 ‘나무’의 진면목을 제대로 담았지 싶었다.

 

 

 

 

조금 늦게 합류한 김기석 형과 한종호 목사님과 함께 홍 집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작품을 둘러본 뒤, 한쪽에서 상영되고 있는 영상을 보았다. 홍집사님이 일본 조선학교를 다녀올 때 찍은 영상이었다. 학생들의 표정과 몸가짐이 더없이 해맑았다.


조선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듣다가 처음 듣게 된 말이 있었다.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는 남한 국적의 학생들도 있고 북한 국적의 학생들도 있는데, 그들 중에는 ‘조선적’(朝鮮籍)을 가진 학생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적’이라는 말은 낯설게 다가왔다. 정치적으로든 이념적으로든 어느 한쪽에 속하거나 기울지 않은 채 어떤 것으로도 나뉠 수 없는 우리 본래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이들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어떤 혜택이나 보호를 받을 수가 없음에도 고집스레 ‘조선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믿음의 길을 걷는다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끝내 버릴 수 없는 적(籍)을 고집하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살면서도, 손해와 외로움을 감수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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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32)

 

영적인 듯 보이나 육적인 사람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마가복음 3:1-6)

 

어느 안식일에 벌어진 일이다. 예수님이 들어가신 회당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그를 고쳐주실 것인지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남의 허물을 찾기 위해 몰래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은 얼마나 병적인가? 그들의 눈에는 병자가 겪고 있는 고통이나 사회적인 불편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현실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에 몰두하는 이들에게 다른 이들이 겪는 구체적인 아픔은 늘 남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통을 해석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다만 그들의 동행이 되고 돌보아 주셨을 뿐이다. 이것이 당시의 종교인들과 예수님의 차이였다.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자기 의’이다. 거짓 종교의 특색은 우리의 자아를 부풀려 준다는 것이다.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느끼도록 한다는 말이다. 거짓된 자아를 강화하는 데 종교처럼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남을 정죄하는 데 재빠르고, 편협하고 공격적인 이들이 많다. 외적으로 보면 그들은 좋은 신자이다. 집회에 빠지는 법이 없고, 헌금생활도 열심히 하고, 전도에도 열심이다. 하지만 그런 열정이 ‘사랑과 온유와 겸손’에 기초하지 않을 때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은 영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육적인 사람들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가 이웃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를 보면 된다. 

 

체로키 족 인디언인 ‘Little Tree’는 할머니로부터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가려내는 방법을 배운다. 육적인 생각에 집착하는 사람의 영혼은 완두콩 크기만큼 줄어들거나 아예 사라져버리기도 한다면서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죽은 인간들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여자를 볼 때도 추잡한 것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타인을 볼 때도 나쁜 면밖에 볼 줄 모르고, 나무를 볼 때도 아름다움을 잊은 채 목재나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이득밖에 볼 줄 모르게 된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세상을 걸어다니지만 사실은 죽은 인간들이다.”(시애틀 추장 외,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80쪽)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하신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살았던 그가 난생 처음으로 주목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물으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마가복음 3:4) 이 질문에 직면하여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이들이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주님은 그 병자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심으로 그를 고쳐주셨다. 안식일의 의미가 실체화되는 순간이었다.

 

*기도*

 

하나님,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보면서 우리는 때때로 아파하지만, 대부분의 순간 덤덤하게 그런 일들을 바라보곤 합니다. 고통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다가는 스스로 견딜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딱딱한 껍질로 자기의 여린 속을 보호하려는 갑각류처럼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추기보다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석하려 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모든 아픔에 다 반응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의 신음에는 응답하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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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92)

 

대척점 

 

정해진 성서일과를 따라 지난 주일에 나눴던 말씀은 누가복음서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였다. 몇 가지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신앙생활을 한 뒤로 오늘 이 본문에 관한 말씀을 우리는 몇 번이나 들었을까요? 수십 번, 수백 번 아닐까요? 그런데도 어찌 우리 삶은 이 말씀과의 거리를 여전히 좁히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교단에서 발행하고 있는 자료집 <강단과 목회>를 보니 위의 본문을 두고 ‘신앙인과 종교인’이라는 제목으로 자료를 담고 있었다. 어떤 지점에서는 생각이 비슷한가 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본문을 생각할 때면 같은 제목이 떠오르곤 했다.


신앙인과 종교인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단어가 갖는 의미로 보자면 사소한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의 결이나 느낌은 매우 다르게 다가온다. 신앙과 삶이 유리된, 신앙을 가졌다 하면서도 신앙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을 ‘종교인’이라 부른다면 말이다.

 

“어쩌면 신앙인과 종교인은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설교문에 쓰고는, 혹시 대척점이라는 말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사전을 찾아보았다. 사전에서는 ‘대척점’(對蹠點)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지구 중심을 사이에 둔 지구상의 반대편 지점을 말하는 것으로, 계절 및 낮과 밤이 서로 반대이다. 우리나라의 대척점은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 남동 해상(38°S, 52.5°W)이다.>


<지구의 어떤 지점의 반대 지점을 대척점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반드시 지구의 중심을 지나는 반대 지점이어야 한다. 따라서 대척점의 수리적 위치를 찾을 때는 위도의 경우 적도를 기준으로 반대에 위치하므로 북위는 남위로, 남위는 북위로 바꾸면 된다. 또한 경도는 본초 자오선을 기준으로 반대에 위치하므로 동경은 서경으로, 서경은 동경으로 바꾸고 180°에서 그곳의 경도를 빼면 된다.


어떤 지점과 그 지점의 대척점은 시간과 계절이 정반대이다. 지구는 자전축이 기울어진 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므로 계절 변화가 발생하는데, 북반구와 남반구의 계절은 서로 반대가 된다. 또한 대척점은 시간상으로 정확히 12시간의 차이가 나는 곳이기 때문에 어떤 지점이 밤이면 대척점은 낮, 낮이면 밤이 된다.>

 

대척점의 의미를 확인하니 더욱 분명해진다. 맞다, 신앙인과 종교인은 약간 다른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계절이 정반대인 대척점처럼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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