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한 조각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00)

 

 토마토 한 조각 

 

언젠가부터 교우 가정을 찾아가 예배를 드리는 심방을 할 때면 몇 가지 지키는 원칙이 있다. 감사헌금을 할 이는 교회에 하도록 권한다. 심방을 감사하여 헌금을 드리는 것은 좋으나, 심방을 받는 상에 올려놓는 모습이 썩 흔쾌하게 여겨지질 않거니와, 혹 헌금을 드릴 수 없는 형편에 있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마음이 힘든 일일까 싶기 때문이다. 헌금을 드릴 마음이 있는 이들은 교회 예배시간에 드릴 것을 권한다.


또 하나, 최소 인원으로 찾아간다. 마음속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기 위해서이다. 어렵게 나눈 기도제목이 금방 소문으로 번지는 일은 드물지 않다. 어렵게 마음속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게 소문으로 번지면 어느 누가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지키는 원칙 중에는 음식의 간소화도 있다. 냉수 한 잔도 좋거니와 차릴 거라면 최소한의 것으로 차리시라 권한다. 대부분의 교우들은 간단한 음료나 다과, 약간의 과일 등을 준비한다.

 

심방 중 혼자 사시는 권사님 댁을 찾았을 때였다. 예배를 드린 후 권사님이 조심스럽게 물으신다.


“식혜를 좋아하세요?”


아주 좋아한다고 말씀을 드리자 권사님은 손수 만든 식혜를 가지고 왔다. 무더운 날씨에 시원하게 마시라고 냉장고에 얼렸다가 알맞게 녹인 식혜였다. 얼마나 많은 정성과 생각이 담긴 식혜인가, 달게 마시자 권사님이 한 잔을 더 권하신다.


식혜를 모두 마셨을 때 권사님이 한 가지 더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토마토였다. 토마토 한 개를 내놓는 권사님의 표정에 즐거움이 넘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집 앞 화분에 토마토를 심었고 토마토 알이 올망졸망 달렸는데, 권사님 마음이 조급했던 것은 심방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서 익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날짜를 못 맞추겠다 싶었던 것이다. 혹시나 싶어 심방을 받던 날 아침 일찍 나가보았더니 마침 한 개가 붉은 빛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권사님은 내놓으신 토마토는 토마토가 매단 첫 열매였던 것이다.


토마토를 네 조각으로 나누어 한 조각씩을 먹었다. 풋풋한 맛이 배인, 풋풋한 믿음이 배인 참으로 귀한 토마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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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와 순례로서의 독서를 실천한 옛사람의 숨결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19. 7. 23. 13:24

구도와 순례로서의 독서를 실천한 옛사람의 숨결

 

1.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시편>의 한두 편을 외우거나 아니면 몇 구절이라도 암송하는 구절이 있을 듯합니다. 저도 어린 시절 교회에서 시편 1편과 23편을 외우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시편󰡕은 제게 어떤 불편함과 곤혹감을 안겨주는 책이 되었고, 그래서 멀리한 적도 있습니다. 까닭은 시인의 탄식과 원망 속에 선인/악인,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타인을 향한 분노와 상대방을 적대하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기 때문입니다.(<시편>의 표층만을 본 사람의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2.

그러나 어느 날, <시편>을 한 편 한 편 다시 읽어나갔습니다. 무겁고 지친 마음 때문일까, 󰡔시편󰡕이 제 마음을 그대로 대신 말해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시편>에 이끌리어 책을 찾다 C.S. 루이스의 󰡔시편사색󰡕과 김기석 목사님의 시편묵상이 담긴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를 만났습니다. 김기석 목사님의 시편묵상을 읽어가는 동안  <시편>은 제 마음의 강으로 점점 흘러 들어왔고, 인간의 정직한 아픔과 호소,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자, 바닥으로 내려간 자의 절절한 탄식이자 기도로 다가왔습니다.

 

3.

이렇게  <시편>과의 만남이 이어지는 동안, 무더위가 찾아오는 계절, 귀한 손님을 만났습니다. 다름 아닌 송대선 목사님의 옮김과 풀이가 담긴 오경웅(吳經熊) 선생의 <<시편사색>>입니다. 출간 소식을 듣자 먼저 기쁨과 반가움이 겹쳤습니다. 학부시절, 목사로서 동양철학을 가르치셨던 현재(鉉齋) 김흥호(金興浩) 선생님의 ‘선(禪)과 현대철학’이란 과목에서 읽은 책이 오경웅 선생의 󰡔선(禪)의 황금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선생의 자서전 󰡔동서의 피안󰡕도 졸업을 앞두고 읽으면서 그분 영혼 속에 스며든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향기가 어떻게 고백되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4.

오경웅 선생은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아이”(<<동서의 피안>>)라고 고백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백이 있기까지 겉으로 드러난 삶과 달리 그의 이면의 삶은 가파른 고개들을 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겉사람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의 속사람이 썩어 감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5.

시는 마음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오경웅 선생이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시편>속에서 들은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공자는 '시(詩)'(<<시경>>) 삼백 편을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思無邪)는 한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인간의 솔직한 속내를 담은 노래에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귀하게 여긴 그였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것이라 봅니다. 전통시대 동양의 문인과 철학자들이 모두 시를 쓰고, 현실의 세계에 이루지 못한 꿈과 열망, 한과 고통, 속절없는 삶의 허망을 시를 통해 드러낸 까닭도 이러한 공자의 마음에 잇닿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6.

<<시편사색>>을 펼치면, 동양의 전통학문과 서학(西學)의 세례를 고루 받은 오경웅 선생의 정신에 동양고전의 세계가 얼마나 깊게 배어있는가, 그 온축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는 동양고전의 세계, 유불도 삼교를 받아들이면서도, 그리스도교는 ‘동서(東西)와 신구(新舊)를 초월’하고, 그리스도께서 “내 생활의 통일을 이루어주시는 본질”이라고 고백합니다.(<<동서의 피안>>) 그런 그가 신의 은총을 입은 자만이 옮길 수 있는 언어로 <시편>을 한 자 한 자 한문으로 옮기고 새겨 넣었습니다. 하여 선생의 학문과 신앙의 깊이가 오롯한 <<시편사색>>에는 동양의 방대한 고전들이 녹아있습니다. 그것을 풀어놓지 않으면 󰡔시편사색󰡕의 의미가 드러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사색>>의 출전과 관련 고전들을 역자 송대선 목사님이 빠짐없이 찾아내어 제시하였고, 아울러 당신의 사색의 고갱이를 곳곳에 실어놓았습니다. 목사님의 해설을 읽는 동안, 오래 묵히고 삭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글임을 책의 어느 쪽을 펼쳐보아도 쉬이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7.

부족하나 저는 10여 년 째 신학대학에서 동양철학과 고전을 강의해오면서 어떻게 하면 동양의 언어로 하느님의 뜻과 말씀, 은총을 표현할 수 있을까를 모색해왔습니다. 동양철학자로서 목회자가 될 제자들, 목회자, 넓게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들을 구상해왔습니다. 동양고전의 세계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다리를 놓아 제자들 중 깊이 있는 목회자들이 나오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람에서 제자들에게 성경 옆에 󰡔논어󰡕나 <<노자>>, <<주역>> 등 동양고전을 늘 곁에 두고 반복낭독, 음미하길 권유하곤 했습니다. 언젠가 <<논어>>를 성경 곁에 두고 읽으며 묵상한다는 제자들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시편사색>>을 읽어가는 동안 미력이나 쓰고 싶었던 책의 한 모습을 미리 보는 듯해 신기하고, 저자와 역자에게 부러움과 존경의 염도 교차했습니다.

 

8.

그리스도인이자 동양철학자인 제가 받는 물음 중 하나는 그리스도교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란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그러한 질문을 주신 분들은 동양, 특히 유학에서는 수신과 수양을 강조하지 않는가, 자기의 변화를 자신 밖에서 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니 기도가 강조되는 것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답을 하곤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제게 인간의 유한함을 깊이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9.

<<시편사색>>은 인간의 유한함, 하느님의 무한함이 드러납니다. 이 간극을 어떠한 언어로 채워 넣을 수 있을까.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존재. <<시편사색>>의 책장을 넘기면서 하느님 없는 인간의 비참을 토로하면서도 ‘생각하는 갈대’로서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준 파스칼. 과학의 천재이자 압도적인 지성의 소유자였으나 하느님을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회심한 파스칼이 떠올랐습니다.

 

10.

성서의 뜻을 밝히고자 동양고전을 맥락 없이 끌어와 현학을 면치 못한 책을 더러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사색>>은 저의 염려가 기우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해주었습니다. 오경웅의 시편 번역이 방대한 동양고전의 세계에 출전과 전고를 두고 있음을 또렷하게 보여주면서, 앞에서도 비쳤듯이, 무엇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송 목사님이 동양고전의 알짬을 깊이 풀어낸 대목들을 만나며 놀랐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다보니 책장을 넘기다 밑줄을 그은 대목들도 여럿입니다. 오경웅 선생의 고심을 드러내면서 송대선 목사님의 사색을 겹쳐놓은 대목들에도 공명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시편사색>>을 오경웅 선생과 송대선 목사님의 공저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저의 경우 송대선 목사님이 동양적 사유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신 부분을 특히 주목하게 되었는데요, 다소 길지만 직접 음미해보시면 좋을 듯하여 아래에 옮겨보았습니다.(저로서는 이러한 동양적 사유와의 비교가 단순한 비교로 그치지 않고, 송 목사님의 안목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더욱 드러내었다고 생각합니다. 관견이나, 이 점이 󰡔시편사색󰡕이 가진 여러 미덕들 중 가장 귀한 점이 아닐까 합니다.)

 

“주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그것을 되새기며 온전히 주의 뜻대로 행하게 되는 것! 이것이 믿음의 길이고 성장이다. 유학의 공부론과 비교해보자. 유학의 공부는 널리 배우고, 의심이 가는 부분을 자세히 물으며, 배워서 아는 것을 반성해서 그 생각에 신실하려 하며, 잘 분별하여 더 이상 의혹이 없게 되고, 독실히 힘써 실천하는 것, 즉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 이 다섯을 공부라 한다.”(227쪽)

 

“7절에서 오경웅은 하느님을 지성(至誠)이라 읊었다… 동양적 사유의 장점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면서 사람이 능히 그려볼 수 있고 닮아갈 수 있는 언어를 찾고자 힘쓴 것인데 그 가운데 소중한 언어가 성(誠)이라 하겠다. 성(誠)은 충(忠, 이때의 충은 충성스러움보다 그 마음의 중심의 마음을 뜻하는 정직과 가깝다)과 정직이기에 그 근본에 거짓이 전혀 없음이다.”(290쪽)

 

“히브리 시 80편은 유독 ‘만군(萬軍)의 주님’이라는 호칭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오경웅은 이 호칭을 피하고 있다. 고대 히브리적인 호칭이어서일까” 그가 믿고 의뢰하는 하느님을 전쟁의 신이라 부르는 것에 거리낌이 있어서인가? 그가 체험한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든, 그의 토양이 된 동양적 사유 안에서든 만군의 주님이라는 호칭이 자리 잡기 어려워 보인다. 하늘과 땅의 자연스런 이치로 모든 만물을 생하게 하고 잘 기르며, 인생을 잘 교화하여 바르지 못한 것들을 버리고 참된 이치에 따라 살도록 돕는 것이 성인의 길이요 하늘의 길이라 여기는 사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목민족의 사유와 농경민족의 사유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살아온 역사적 경험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425쪽)

 

“히브리 시인이 하느님의 의(義)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오경웅은 그러하신 하느님을 따르는 인생의 길을 안내한다. 유학의 사유에서 인(仁)은 언제나 거할 집(宅)으로 비유되고 의(義)는 걸어야 할 길(路)로 비유되곤 해서 안택정로(安宅正路)라고 하기도 한다… 히브리 시인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청하는데 오경웅은 이를 방택(芳澤)과 춘풍(春風)으로 번역하여 동양적 정서의 맛을 더한다.”(445쪽)

 

“시인은 하느님 앞에서 그의 마음속 슬픔과 분노를 토해놓는다. 그는 이 모든 시련을 다 견뎌내면서도 남을 미워하지 않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그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 나약한 인생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속을 다 꺼내놓으면서 그는 점차 미워할 사람에게서 자비를 베푸시고 신원(伸冤)하시는 하느님께로 옮겨간다. 자신이 겪은 시련과 고난의 감정에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손길로 눈길이 옮겨가는 것이 기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가장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시간이 되고 은혜의 공간이 된다. 그에 반해 동양적 전통에서는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진술이기도 하다. 오히려 도리에 맞지 않는 사람과 관계를 끊을 때 그 사람의 허물을 꺼내지 않고 덮는 것을 마땅히 여겼다. 시편의 기도가 하느님께 드리는 고발과 탄원이라면 동양적 기저에는 침묵 가운데 스스로 소화함이 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 할 수 없으니 잘 새길 일이다.”(578쪽)

 

“오경웅은 5절과 7절에서 먼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위가 하나(知行合一)이신 분임을 역설하고 있다. …송대 신유학에서 지식인이 배우고 아는 바대로 행하거나 살아내지 못하는 괴리와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큰 논쟁거리였다… 유학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논의된 주제를 오경웅은 신앙 안에서 풀어간다. 그는 이 시편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으로 즉 행하고서야 비로소 앎이 있다고 말한다.(能行始有知)”(585쪽)

 

“도덕경적 사유가 유한한 것을 절대화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유혹에 깨어있고자 한다면 성서적 사유는 그분의 거룩한 이름과 말씀에 오롯이 뛰어들어 그분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전자가 유한한 인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런 인간이기에 오롯이 투신할 영원을 사모할 수밖에 없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둘은 서로 멀리 있지 않다. 그렇게 오경웅은 이 시편의 제목을 그분의 이름과 말씀이라고 제목을 붙여 머뭇거리는 인생을 초대하였다.”(737쪽)

 

“동양적 사유에서는 마땅한 결과로서 인과(因果)를 말하지만 오경웅은 이 시편의 이야기를 통해 인과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에 다름 아니다. 눈앞의 왜곡된 현실이나 시인이 겪는 아픔에 휘둘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끝내 바로잡으시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인과로 표현하고 있다.”(748쪽)

 

“동양적 사유에서 숙명에 대한 사유는 인생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적지 않다. 그러나 오경웅은 이 숙명을 그러한 수동적 사유보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뜻과 장차 이루실 역사로 풀고자 한다. 하느님의 계획이며 섭리이시다.”(786쪽)

 

12.

마지막으로 󰡔시편사색󰡕을 읽어가는 동안, 동양의 전통적인 독서법이 체득된 책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경웅 선생님과 송대선 목사님의 음미(吟味), 우유(優游), 함영(涵泳), 저작(咀嚼), 잠심(潛心), 숙독(熟讀), 완색(玩索)… 책을 읽는 내내 성현의 마음을 읽기 위한 구도와 순례로서의 독서를 실천한 옛사람의 숨결을 경험했습니다. 책장을 덮고, 읽고 난 후의 소회를 정리하며, 책을 책상머리에 놓아두었습니다. <<시편사색>>이 그리스도의 향기이자 편지로서 살아가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귀한 신앙의 선물이 되길 바라며, 향기와 깊이를 잃어버린 오늘 한국 그리스도교에 오래도록 널리 읽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임종수/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성균관대학교에서 동양철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동양철학과 고전, 종교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종교속의 철학 철학속의 종교>>(공저),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만든 역사 1>>(공저), <<21세기 보편영성으로서 誠과 孝>>(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로 <<중국미학사中國美學史:선진시대에서 명청시대까지>>(공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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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여짐에 대한 거부

김기석의 새로봄(138)

 

길들여짐에 대한 거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를 교육하여, 경건하지 않음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소망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건져내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대는 권위를 가지고 이것들을 말하고, 사람들을 권하고 책망하십시오. 아무도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디도서 2:11-15)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경건하지 않음과 세속적인 열정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하게(to say ‘No’) 하고,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게 한다. 거룩한 삶은 우리를 길들이려는 일체의 것들, 우리가 영적인 존재임을 망각하게 하려는 온갖 유혹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신앙생활은 ‘맞섬’이고 ‘대듦’이고 ‘길들여지는 것에 대한 거부’이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은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고, 불의에 맞서라고 말한다. 우리 속의 어두운 열정은 ‘내 코가 석 자’라고 말한다. 성령은 사랑과 평화와 온유와 절제를 택하라고 말한다. 정욕은 우리에게 ‘분노’와 ‘욕심’을 부추긴다. 믿음의 사람은 남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와 싸워 이기는 사람이다. 동양의 현인은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고 자기를 아는 자는 밝으며,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있고 자기를 이기는 자야 말로 뜻이 굳세다’(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지인자지, 자지자명, 승인자유력, 자승자강.〕 『노자』 33장)고 했다. 말이 쉽지 나와 싸워 이긴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제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라고 노래했다. 은혜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은혜는 우리를 교육하여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해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수 있을까?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집중’이란 단어는 ‘모을 집(集)’과 ‘가운데 중(中)’ 자를 쓸 때는 ‘한 곳으로 모은다’는 뜻이 되지만, ‘잡을 집(執)’과 ‘가운데 중(中)’ 자를 쓸 때는 ‘과부족이나 치우침이 없이 마땅하고 떳떳한 도리를 굳게 붙잡는다’는 뜻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후자, 즉 삶의 모든 순간에 주님을 우리의 중심으로 굳게 붙잡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사람은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고 고백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도 달콤하기 때문이다.  

 

삶이 힘겨워도 예수의 길에서 떠나지 말아야 한다. 구즉통(久則通)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을 오래 하다보면 절로 통하게 된다는 말이다. 한 자리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 즉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모아 흔들리지 않는(主一無適) 근기가 필요하다. 예수를 일단 길로 삼았으면 유불리를 따지거나 상황의 좋고 나쁨을 떠나 그 길로 줄기차게 나아가야 한다.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건져내시고, 깨끗하게 하신 까닭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교리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불법에서 건져내심’은 의롭다 인정하심 곧 칭의(justification)에 해당하고, ‘깨끗하게 하심’은 성화(sanctification)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를 이끌어 선한 일에 열심을 내게 하신다. 우리 속에 있는 선한 열심이 곧 은총의 증거이다.

 

*기도*

 

하나님, 뜻을 정하고 사는 이들은 언제나 당당합니다.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가야 할 곳을 알고 가는 이들의 발걸음은 씩씩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아도 그들은 지향을 놓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람에 흔들리는 부평초처럼 우리는 늘 흔들립니다. 아무리 삶이 힘겨워도 뜻과 지향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세찬 바람이 불 때면 그 바람을 타고 연처럼 높이 솟아오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믿음 없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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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98)

 

 빨랫줄

 

<동심언어사전>에 담긴 이정록 시인의 ‘빨랫줄’을 설교 시간에 인용했다. 글을 읽으며 피식피식 웃음이 났던 글이었다.

 

빨랫줄은 얼마큼 굵으면 될까요?
- 네가 오줌 싼 이불을 버틸 만한 힘줄이면 되지.

 

 

 

전봇대는 얼마큼 굵으면 될까요?
- 네가 오줌 쌀 때, 고추를 감출 만한 굵기면 되지.

 

철로는 얼마큼 굵으면 될까요?
- 네가 엿 바꿔 먹으려 할 때, 둘러멜 수 없는 무게면 되지.

 

‘빨랫줄’을 소개하며 운율은 맞지 않지만, 질문 하나와 대답 하나를 보탰다.

 

우리의 믿음은 얼마나 무거우면 될까요?
- 헛된 욕심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무거우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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