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를 꿈꾸는 딸에게 딴지를 거는 나쁜 엄마

신동숙의 글밭(110)

 

검사를 꿈꾸는 딸에게 딴지를 거는 나쁜 엄마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딸아이가 다니던 초등학교 체육관 졸업식장에선 진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준비하신 졸업생들을 위한 고별 인사가 참석한 모두에게 감동을 안겨준 사연입니다. 특이하게도 졸업생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하면, 한 명씩 강단에 오릅니다.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졸업장을 받고,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하는 의식입니다. 그때 커다란 스크린에 띄운 배경 화면은 한 학생의 꿈입니다. 화면 왼편으로 학생의 인물 사진과 이름 그리고 꿈이 커다랗게 적혀 있는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진 학부모들도 있었습니다. 마치 졸업식장을 가득 메운 졸업생들과 배웅을 나온 5학년 후배들과 모든 선생님들과 학부모들 앞에서 선서라도 하듯, 미래의 꿈을 다짐이라도 하듯, 그렇게 졸업생들의 꿈이 날개를 펼치듯 펼쳐졌습니다. 마지막 반에 한 명의 졸업생에게까지 교장선생님의 고별 인사는 시냇물처럼 길게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교장선생님은 졸업생 한 명 한 명의 손을 다잡아 주시며, 중학생이라는 더 넓은 물줄기로 나아가는 어린 꿈들을 응원해 주셨습니다.

 

졸업생들의 꿈은 다양한 듯했지만, 비교적 인기 있는 직업군들이 눈에 띄기도 했습니다. 유행에 따라서 컴퓨터 프로게이머, 아이돌 가수, 디자이너 등. 제 딸아이의 꿈은 흔치 않은 '검사'였습니다. 그 꿈은 이미 그전부터 딸아이의 입에서 심심하면 나오던 그런 꿈이었습니다. 딸아이의 입에서 '검사'라는 단어가 튀어 나올 때마다, 엄마는 가슴이 뜨끔뜨끔해지곤 했습니다. 솔찍한 엄마의 심정으론 딸아이가 '검사'가 되고 싶다고 할 때마다 뜯어 말리고 싶었습니다. 상대해야 하는 사회적 관계가 주로 범법자와 범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가 얼마나 머리 무겁고 마음을 슬어내려야 하는 일들이 많을까 싶은 마음에, 겁없이 '검사, 검사' 멋진 노래를 부르듯 되뇌이는 딸아이의 모습이 내심 못마땅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직업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감이라는 무게가 가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가슴을 눌러오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딸아이를 6학년이 될 때까지 그 흔한 영·수 학원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문제집을 풀게 하지만, 비교적 자율에 맡기다 보니 허술한 곳이 많았습니다. 잠시 잠깐씩 시켜본 학습지도 그저 그랬습니다. 그 대신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접고 피아노 개인 레슨을 받게 한 것과 합기도가 유일한 사교육이었습니다. 6학년 첫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서,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하는 말이, 자기가 학원을 다 알아봐뒀으니, 엄마는 가서 등록만 해주면 된다면서, 더는 느린 엄마를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엄마의 손목을 붙잡고 끌고 가다시피 딸아이가 앞장 서서 찾은 걸음이, 처음으로 학원에 입성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날 마침 피아노 레슨이 있던 시각이라 레슨 선생님은 영문도 모른채 바람을 맞으셔야 했고, 엄마는 죄송하다는 인사를 거듭 드려야했습니다.

 

또래 친구들에 비해서 3~4년은 늦게 학원에 들어간 딸아이는, 그동안 학습에 대한 굶주림이 컸던지 무섭도록 흡수를 했습니다. 이후로 중학교 2학년, 전과목 올 A 등급을 받았다는 점수도, 겨울 방학이 끝나갈 무렵에야 엄마는 성적표를 보고서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에 받은 표창장에 이어서, 중학교 1학년에 올라가서도 반대표로 표창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엄마는 너무나 게으른 엄마입니다. 중학교 영·수 학원을 알아보는 일도, 딸아이는 친구들과 셋이서 여러 친구들에게 물어본 후, 적합한 곳을 선택한 후 엄마에겐 결재만 부탁했으니까요. 그렇게 딸아이에게 '검사'라는 꿈은 초등학교 4~5학년 무렵부터 3년이 넘는 제법 긴 기간 동안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엄마로써 딸아이를 길들이는 방법이 딱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럴거면, 학원 가지마! 공부하지마!" 이 말이 유일한 벌이자 브레이크가 됩니다. 어디까지나 인성의 터전을 다지기 위함입니다.

 

평점 90점이 넘지 않을 거면 학원에 가지 말고, 집에서 공부해도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딸아이는 학원을 다니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는 듯 보이기까지 했으니까요. 학원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함께 하는 공부가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딸아이가 학원보다 더욱 좋아하는 곳은 학교였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이후 단 한 번도 학교에 가기 싫단 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까요. 심지어는 아침잠을 깨워본 적도 거의 없답니다. 딸아이는 엄마보다 항상 먼저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왔다갔다 하곤 합니다. 단 중학생이 되고 밤10시까지 다니는 학원을 쉬게 된 토요일에 "엄마, 토요일이 왜 좋은 줄 알겠어. 쉴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또 그런 말을 하는 자신이 재미난 듯 웃습니다.

 

 

 

 

초등학교에선 일년에 두 차례, 학교 전체 공개 상담 기간이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교실에서 담임선생님과 마주앉게 됩니다. 늘 담임선생님들로부터 고맙다며 좋은 인사를 들어오곤 했습니다. 5학년 담임 선생님께서는 학부모인 저를 보시자마자 허리를 90도로 굽히시면서 "따님을 잘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정중히 인사를 하시는 바람에, 몸둘바를 몰라하는 저에게 자리에 앉으시라며, 살뜰한 인사를 해오시기도 하셨습니다. "원이는 남자친구들하고도 잘 놀고, 여자친구들하고도 잘 놀고, 모듬 수업에선 늘 리더를 잘 합니다." 딸아이는 학원을 다니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시간이 남다 보니, 학원으로 바쁜 친구들을 대신해서 과제들을 꼼꼼이 챙기곤 했으니까요. 딸아이는 그렇게 늘 사회적 평판을 후하게 받곤 했습니다. 미술상, 글짓기상, 시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과학의 날 행사에선 2인 1조 학교 대표로 나가서 장려상을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사교육 경험이 없이요.) 그동안 받은 상장을 벽지로 붙이면 ㄱ자로 다 붙일 정도입니다. 자꾸만 자녀 자랑으로 흘러가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어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맨 마지막에 있습니다.

 

5학년엔 친구들과 다함께 놀러간 친구집에서 친구들이 딸아이에게 금지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책 읽기 금지령' 그러면서 딸아이는 한바탕 웃습니다. 딸아이는 스마트폰을 얻기 위해서 아빠가 제안한 2년 동안의 약속을 다 이행하기도 했습니다. 잠언 암송과 성경 읽기입니다. 4학년이던 11월부터 5학년이 되던 2월까지 성경을 4독을 한 것입니다. 제대로 읽었는지 물어보면 읽었다고 대답을 합니다. 하기야 신학을 전공한 박사님들도 성경을 수차례 읽으셨다고 해도, 그 이해의 깊이는 주시는 만큼의 은혜 외에는, 더 깨칠 수 없는 책이 성경이기에 그쯤에서 읽기 이해의 확인을 그치기로 했습니다. 성경 읽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는데, 언제 읽었느냐고 물으니, 주일날 어른들 대예배 시간에 아빠 옆에 앉아서 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짜투리 시간을 합해서 4개월 동안 성경 4독을 하게 된 것입니다. 딸아이의 정직성은 저도 신뢰를 하는 입장이라서 더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만하면 충분하니 그만 읽어도 된다고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교만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그 당시에 교회 주보에는 전교인의 성경 읽은 횟수를 공개적으로 기록을 했었는데, 혹시나 어른들과 자신을 비교해서 자칫 어린 나이에 교만해질 것이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딸아이가 꿈이 검사라고 얘기할 때마다, 저는 결코 그 꿈을 추켜 세우지 않습니다. 검사라는 직업이 어떤 일인지 저도 잘 모르는 입장에서, 아무리 헤아린대도 결코 가볍지 않은 직업의 무게감과 사회적 책임감과 인생 전체를 둔 행복만족감에서 딱히 뭐라고 장담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딸아이가 검사라는 꿈 얘기를 해올 때면, 엄마는 언제나 딴지를 거는 입장입니다. 간혹 말투에서 또래들 사이의 거친 은어가 튀어 나온다든지, 별로 친하지 않다는 이유로 또래 친구 누군가를 좋지 않게 얘기를 한다든지, 인사를 제때 안한다든지, 딴지를 거는 이유는 그야말로 사소하지만, 인성의 기본 밑바탕이 되는 씨앗 같은 점들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학업 점수엔 별관심도 안두면서, 그런 사소한 인성 부분에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인성의 꼬투리를 잡을만한 낌새가 보일 때마다, 걸고 넘어지는 엄마가 거는 딴지의 한 마디는, "그럴거면 공부하지마! 공부는 인성이 기본이 된 사람이 하는 거다. 그렇지 않고 만약 자기 욕심에 공부를 잘해서, 중요한 공직자나 법조인이라는 직업을 갖게 된다면, 엄마는 자기 자식을 괴물로 키우는 거다. 엄마는 내 자식이 무식하면 무식했지, 괴물이 되어서 남들 괴롭히는 꼴은 못 본다!"

 

다행인지 딸아이는 청개구리 기질을 타고난 듯합니다. 유년기에 유일한 벌은 "책 읽지마!"였습니다. 놀이터에서 한창 재미나게 놀다가 모처럼 앉아서 책을 1시간 넘게 보고 있으면, "딸아 제발, 책 좀 그만 읽고 집에 가자아." 그러면 딸아이는 그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책 속으로 뛰어 들어갈 기세가 됩니다. 잠자리에선 "이것만 읽고 자야해에." 그러면 딸아이는 눈에 불을 켭니다. 딸아이의 놀이터였던,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구해온 새책을 두고서 "엄마가 잠시 갔다올 동안에 읽으면 안돼에." 그렇게 부드럽게 말해 놓으면, 딸아이는 여지없이 책 앞에서 안달을 합니다. 그 방법이 딸아이에겐 제법 효과가 있었기에, 동생에게도 그대로 적용을 시켜 보았지만, 동생은 언제나 엄마의 말을 곧이 곧대로 순종을 하는 순둥이였습니다. 그걸 뒤늦게 깨닫고서는 아차 싶었으니까요.

 

그렇게 엄마는 딸아이가 중 2학년이 될 때까지도 검사라는 꿈에 대해 끊임없이 딴지를 걸곤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잠언 한 절부터 시작된 암송이 점점 그 암송력이 늘어나서, 일년이 지나니 단숨에 20절을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늦은 학원 입성에도 불구하고 영어단어 외우기에서 언제나 일등으로 마쳐서 일년도 안되어 상급반에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딸아이는 그렇게 승부욕과 두뇌 회전이 빨라서 늘 엄마를 긴장하게 만드는 자녀였습니다.

 

딸아이에게 가장 많이 들려주는 법조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효봉스님입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으로써 법복을 입은 수재, 한국인 최초의 판사입니다. 그는 자신이 내린 판결 중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온 청년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형 판결의 자리에서 그 자신을 쳐다보던, 그 청년의 마지막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한 청년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가!" 그 후로 그는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판사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걸인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니다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상좌를 받지 않기로 유명한 노승은 딱 두 명의 제자를 받습니다. 시인이 된 고 은과 법정스님입니다. 그 후로 고 은 시인은 파계승이 되어서 세상으로부터 최고의 찬사까지 받았지만, 알 수 없는 일로 더이상 매스컴에서 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존경하던 시인이었기에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 거의 딸아이에 대해서 간략하게 다 적었습니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칭찬과 상장과 사랑을 참 많이도  받아온 것 같습니다. 게으른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학교와 선생님들에 대한 햇살 같은 신뢰 뿐이었다고 할 만큼 뒷바라지라곤 없었으니까요. 사실 제 하루를 사색으로 채우기에도 저는 늘 부족합니다. 그리고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괜한 자식 자랑이 되었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재주가 인성을 넘어선 안된다는 입장입니다. 알 수는 없지만, 만약에 딸아이가 상위 1프로의 수재라고 해도 그 재주가 인성을 넘어선 안된다는 점입니다. 만약에 검사라는 사회적 책임이 무거운 자리에 앉은 자녀에게 일수록, 그 재주나 욕심이 지나쳐 양심과 정의를 넘어서는 일에 대해선, 극히 경계하고 또 경계하려는 부모의 입장은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초등학생 때부터 3년이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자녀의 검사라는 꿈 앞에서 엄마로써 늘 당당하게 딴지를 걸 수 있는 이유입니다. 엄마 말고는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만약에 있다면, 그건 자녀 내면에 있는 양심일 겁니다. 제가 초점을 맞추는 곳은 겉으로 드러난 자녀의 재주, 뛰어남이 우선이 아닙니다. 물론 잘하면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으로 들어가 따져 보려고 합니다. 언제나 깨어서 살피는 곳은 자녀의 내면에 보이지 않는 양심입니다.

 

성철스님에게 제자가 되려고 찾아온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제자가 되려면 한 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제자가 들은 단 한 마디의 말씀은, "자기를 속이지 마라". 성경을 읽은 저에게 양심은 곧 성령이 됩니다. 진리의 영입니다. 예수가 하늘로 가시며 공평하게 주신 선물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이방인에게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신 양심이 있어서, 어느 누구도 자기의 내면에 빛나는 양심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던 딸아이도 스마트폰과 단단히 유착이 되고부터는, 이제는 가끔 검사라는 꿈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아이돌 가수가 부럽다고도 합니다. 그런 와중에도 게으른 엄마지만, 늘 지켜보는 것은 공부가 첫째가 아닙니다. 잔재주도 부리면 좋지만 언제나 그 다음입니다. 첫번째 조건은 딸아이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직업에 책임윤리가 뒷받침이 되어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양심과 책임감과 정의를 우선에 두어야 하는 법조인의 자리에서, 만약에 제 자녀가 사리사욕을 챙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도둑질이 되고, 엄연한 범법자와 법죄자가 되는 길입니다. 당연히 엄마로써 가슴을 치면서 회초리를 들고서 종아리를 쳐서라도 법복을 벗겨야 하는 경우가 됩니다.

 

세상을 속이는 일도 죄가 되지만, 자기 스스로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일, 공직자가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야말로 그 인생은 추하게 추락한 인생이 되니까요. 자자손손 그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만약에 내 자식이 그렇다면 당장에, "너! 검사하지마! 당장 옷 벗어!"라고 말해야지요. 유아기에 조막손에서 책을 뺏듯이, 중2의 2학기 기말고사 전날 밤에 '그럴거면, 공부하지마!'라는 말로 딸자식의 눈에서 눈물을 쏙 빼놓았듯이, 그렇게 법복을 벗길 일입니다. 그것이 내 사랑하는 자녀의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건물이 뭐라고, 땅이 뭐라고, 세상을 속이는 것보다 더 나쁜 죄, 양심과 정의를 지켜야할 공직이자 법조인의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속이느냐면서요. 결혼을 한 후에는 딸이라면 시어른,  아들의 경우에는 장인과 장모도 다같은 부모가 될 테지요.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복음 10장 26~33절 )

posted by

일어나라 함께 가자!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6)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17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마태수난곡 1부 30번~32번

마태복음 26:40~46

음악듣기 : https://youtu.be/sAKUNyWOkc0

30(24)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40. Und er kam zu seinen Jüngern, und fand sie schlafend. und sprach zu ihnen:

40.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대사

예수

40. Könnet ihr denn nicht eine Stunde mit mir wachen? 41. Wachet und betet, daß ihr nicht in Anfechtung fallet. Der Geist ist willig, aber das Fleisch ist schwach

40.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42. Zum andern Mal ging er hin, betete und sprach: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대사

예수

42. Mein Vater, ist's nicht möglich, daß dieser Kelch von mir gehe, ich trinke ihn denn; so geschehe dein Wille.

42.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31(25)

코멘트

코랄

Was mein Gott will, das g'scheh' allzeit,

Sein Will', der ist der beste,

Zu helfen den'n er ist bereit,

Die an ihn glauben feste,

Er hilft aus Not, der fromme Gott,

Und züchtiget mit Maßen.

Wer Gott vertraut, fest auf ihn baut,

Den will er nicht verlassen.

나의 하나님의 뜻이 항상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최선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도우시기 위해

항상 예비하고 계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에서 구하시고

알맞게 바로잡아 주시는 분이시니.

하나님을 믿고 그 위에 굳건히 서는 이를

그는 결코 버리시지 않습니다.

32(26)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43. Und er kam und fand sie aber schlafend, und ihre Augen waren voll Schlaf's. 44. Und er ließ sie, und ging abermals hin und betete zum drittenmal, und redete dieselbigen Worte. 45. Da kam er zu seinen Jüngern und sprach zu ihnen:

43.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대사

예수

45. Ach! wollt ihr nun schlafen und ruhen! Siehe, die Stunde ist hier, daß des Menschen Sohn in der Sünder Hände überantwortet wird. 46. Stehet auf, lasset uns gehen; siehe, er ist da, der mich verrät.

45.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Wachet und betet/깨어 기도해다오!

 

예수는 기도를 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아가사 같은 내용으로 또 다시 기도하셨습니다. 이러기를 세 번 하셨는데 왜 그러셨을까 궁금합니다. 미리 말씀드리건대, 정답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정답이 아닌 상황들을 먼저 추려내어 보면 어떨까요? 그러다 보면 예수께서 왜 그러셨는지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기도하는지 자는지 제자들을 감시하고 지적하기 위함은 아니셨을 것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께서 마치 야간 자율학습을 감사하는 당직 선생님처럼 행동하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다음은 보다 일반적인 해석인데, 바로 제자들의 영적 안일함을 일깨워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하는 기도의 능력을 덧입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이것이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거니와 이와 같은 권위자들의 해석에 대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마태 수난곡을 통해 예수를 보다 가까이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예수의 마음에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이런 해석 역시 틀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참 이기적인 것이, 그는 지금 고난의 수렁으로 던져지며 땀이 피처럼 흐르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그 순간에서 조차 우리는 예수를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는 분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 예수 앞에 놓인 십자가와 쓴 잔이 그가 감당하기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던가요.

 

예수의 마음

 

어제 현역 군인이신 권사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하관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설교를 하신 부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어머니를 항상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고 희생하는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한 때 온 가족의 기쁨이 되는 아기였고, 꿈에 부풀어 올라 늘 설레 했던 십대 소녀였으며, 아름다운 사랑과 행복을 꿈꾸던 아가씨였으며, 곱게 차려입고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고 싶어 했던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당연한 사실을 잘 모릅니다...” 평소 강직하기 그지없는 천상 군인이요 충성된 청지기의 모습으로만 보였던 권사님은 설교 후에 어머니의 관 위에 흙 한줌을 뿌리면서 ‘엄마’라고 부르며 어린 아이처럼 울먹이셨습니다. 그 모습에 저 또한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주시기만 하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왜 그의 마음에는 그토록 관심이 없단 말입니까? 우리는 교리에 얽매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만 붙드느라 ‘한 사람’ 나사렛 예수를 외면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우리는 이 물음을 신학적으로 분석하느라 단순하게 예수께서 사랑하는 베드로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듣고 싶어서 물어 보셨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아무튼, 예수의 마음, 예수께서 지금 당하고 있는 고민과 슬픔, 그리고 십자가의 수난이 임박한 상황을 생각하면 제자들의 영적 안일함을 일깨워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하는 기도의 능력을 덧입게 하려고 세 번 제자들을 찾아 오셨다는 것 역시 가능성이 적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으로 좁혀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기도하는 도중에 제자들을 찾아 다시 오셨다고 말입니다.

 

완전한 사랑이신 예수

 

영적으로 무지했고 육신은 연약했지만 함께 한 제자들은 예수께서 깊이 사랑하신 사람들이었고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앞에 놓인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동역자들의 기도를 필요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기도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기도의 사람 예수는 그 누구보다 더 중보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고난의 길에서 함께 해 주기를(Compassion)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기도는 가장 강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는 ‘소망’을 현실로 초대하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십자를 앞에 두고 예수는 너무나 외로우셨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버림받고 배신당할 것이 예수의 가장 큰 아픔이었습니다. 배신감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단절 때문에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는 사랑이셨습니다. 완전히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주는 것도 사랑이요 받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완전한 사랑의 일부로서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단절은 그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두 번이나 찾아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십자가 위에서의 마지막 외침도 육신의 아픔에 의한 절규가 아니라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향한 절규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셨음에도 완전한 사랑이셨던 그분에게 사랑하는 이와의 단절은 너무나도 큰 괴로움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사랑하는 이들이 가장 깊은 사랑의 대화인 기도의 방식으로 당신과 함께 해 주길 원하셨고 그래서 두 번 씩이나 제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사랑을 모릅니다. 너무나 모릅니다. 고난당하신 예수의 마음도 우린 너무나 모릅니다. 그는 사랑이셨습니다. 그래서 목숨 다해 사랑하셨고, 그래서 사랑 받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예수의 사랑도 다 알 수 없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알 만큼 안다고,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여러분의 신앙은 멈추고 퇴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모든 사랑을 끌어들입니다. 사랑하는 예수와 함께 계십시오. 사랑한다고 속삭이십시오. 늘 예수와 연결되어 사십시오. 그것이 그의 고난과 함께하는 길, 그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함께 부르는 코랄

 

두 번째 기도가 끝나고 코랄이 울려 퍼집니다. 이 코랄은 바흐의 시대에 많이 불렸던 것으로 원곡의 텍스트 1절이 그대로 마태수난곡에 실렸습니다. 아마 모든 청중들이 함께 이 익숙한 코랄을 부르면서 겟세마네 기도의 깊은 의미를 감격적으로 되새겼을 것입니다. 이역만리 외국에서 함께 아리랑 부른다거나 독도에서 홀로아리랑을 부를 때처럼 같은 노래도 부르는 곳에 따라 느낌이 달라집니다. 아마 마태수난곡을 듣는 중에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에서 부르는 이 코랄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매우 특별한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코랄은 루터교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작곡가 클로뎅 드 세르미시(Claudin de Sermisy; 1490~1562)의 선율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이 곡이 루터교에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곡의 찬송시를 쓴 알브레히트 공작 때문입니다.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 공작(Albrecht Herzog von Preußen, 1490-1568)은 초대 프로이센 공작이었습니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지지했으며 1525년 로마 가톨릭에서 루터교로 개종하였고 결국 루터교를 국교로 삼은 최초의 국가 군주가 되었습니다. 루터와 종교개혁의 수호자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루터교 신자들은 루터만큼이나 알브레히트 공작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가 쓴 찬송시를 코랄로 노래하면서 그를 기억했습니다. 그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났고 루터교는 이제 독일 전역에서 뿌리를 내려 종교, 문화적인 황금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바흐라는 위대한 음악가가 그 전통 속에서 등장하였고 신앙의 선조들이 깔아 놓은 신앙적 문화적 토양 위에 서양 음악사의 가장 위대했던 순간들을 펼쳐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바로 마태수난곡이 놓여 있습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코랄은 모든 청중들이 함께 불렀습니다. 그래서 저와 이 여정을 함께 하는 우리 모두 잠간 읽기를 멈추고 우리말로 코랄을 불러 보겠습니다. 최대한 내용을 살리되 음악과 어우러지고 라임을 맞춰 번역해 보았습니다. 자 이제 맨 처음 표에 있는 유튜브 링크로 들어가셔서 코랄이 시작할 때 함께 우리말로 불러 보시겠습니다. 코랄은 1분 40초부터 시작합니다.

 

 

어떠신가요? 아마 음반을 들으면서 직접 불러보신 분들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리히터 음반에서 소년들을 비롯한 모든 합창 단원들이 얼마나 깊은 감격과 정성과 열심으로 찬송을 부르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축구도 국가대표 경기를 TV로 볼 때는 그렇게 선수들을 욕하다가 막상 조기축구회서라도 직접 공을 차보면 국가대표급 선수라면 무조건 그 실력을 존중 아니, 존경해야 함을 깨닫게 되지요. 부디 여러분들의 예배 가운데서도 그렇게 힘차고 정성스러운 찬송가가 늘 울려 퍼지기를 원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여러분들에게 그런 마음이 드셨다면 성경과 따로 구분된 찬송가 한 권을 꼭 마련하시기를 권합니다. 성경과 합본된 찬송가는 무거워서라도 들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발성적으로나 마음가짐으로서나 찬송가는 손에 들고 목을 세운 자세로 가슴과 입을 활짝 열고 불러야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빛으로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합니다. 구원의 감격과, 예배의 기쁨이 어린 눈빛,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 예수와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들과 나의 생명과 나의 삶을 향한 ‘사랑의 눈빛’ 말입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43절입니다. 두 번째 기도를 마치고 다시 오셨는데 그들이 또다시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굳이 변명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두시고 다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예수는 다시 오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바로 깨우진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오셔서 제자들을 깨우신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던 것 같습니다. 잠 잘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놓고 ‘이제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시진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수께서는 앞으로 제자들이 겪어야 할 일들을 생각하시며 사랑과 애잔함과 슬픈 눈으로 잠들어 있는 세 제자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파울 들라로슈(1797-1856)作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종이에 연필)

 

 

얼마나 지났을까요? 비비적거리며 제자들이 하나둘씩 눈을 뜨고 일어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Ach! wollt ihr nun schlafen und ruhen!” 독일어를 아시는 분들은 눈치를 채셨겠지만 우리말 개역개정과 루터성경은 이 구절을 정 반대로 읽고 있습니다.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은 ‘이제는 자고 쉬라’로, 루터번역 독일어 성경은 ‘아! 너희가 지금 자고 싶고 쉬고 싶더냐!’로 번역했습니다. 작은 차이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뜻의 문장입니다. 이는 격변화로 인해 어순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헬라어의 특징과 여러 원문에 딸린 문장부호가 통일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성경이 이렇게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말 새번역과, 킹제임스 성경은 전자와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공동번역과 NIV, NASB, CEV, MSG 등은 독일어 루터번역과 같은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전체적인 문맥이나 바로 이어지는 46절에서 “일어나라”는 명령이 45절의 “자고 쉬라”는 명령과 모순됨을 들어 그들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굳이 저의 생각을 고집할 마음은 없습니다만, 성서학적인 해석이 아니라 마태수난곡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되었고 지금가지 이 순례의 여정을 통해 함께 해 온 예수의 마음을 통해서 해석하자면, ‘이제는 자고 쉬라’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차차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

 

기도를 마치시고 다시 오신 예수는 안타까움과 사랑의 눈으로 제자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이미 그의 기도는 끝났습니다. 그는 수없이 자신을 굴복시키는 기도와 하나님과 인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품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의 기도와 그 마침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하나님과 사랑하는 이들과의 단절 앞에서 그토록 몸부림 쳤던 것이지 결코 자신을 팔고 잡고 죽이려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담대하고 평안하게, 자고 쉬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또 하나, 인지상정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면 보통 ‘좀 더 자’라고 속삭이며 이불을 다시 덮어 줍니다. 저는 요즘 사랑하는 가족들과 떨어져서 지내고 있습니다. 365일 5시 새벽기도를 지키는 전통 있는 교회에서 사역하는데 기도 시간의 은혜가 너무나도 귀합니다. 월요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올라가 쉬는 날을 보내고 화요일 새벽 3시 30분에는 다시 교회로 출발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가족과 있고 싶고 고속도로 통행료를 절약하고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함이지요. 그 시간이 되면 맞벌이를 하는 아내가 피곤함을 무릅쓰고 알람을 맞추고 함께 일어나 저를 배웅합니다. 처음 몇 주를 그렇게 하다가 늘 잠이 모자란 아내를 깨우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미안해서 울리기가 무섭게 알람을 얼른 꺼 주고 조용히 나갑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기도할 때와 기도를 살아낼 때

 

이미 예수는 기도로 승리하셨습니다. 육신으로는 여전히 두려웠지만 영으로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셨습니다. 깨어 기도할 시간은 지금이 아니라 아까 함께 깨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실 때였습니다.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기도를 간절히 해야 할 때가 있고 마음과 영으로 품어서 삶 가운데로 나갈 때가 있습니다. 기도가 끝났고 영접이 되었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들고 다시금 기도를 마음에 녹여내어 삶으로 행동으로 의연하게 나아가야합니다.

 

 

모든 번역본과 마찬가지로 헬라어 원문에도 ‘이제는’라는 의미의 ‘로이폰’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제는(nun)’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함께 깨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셨다면 ‘이제는’ ‘기도가 끝났으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의연함과 평안함 가운데 잠자고 쉬듯 십자가의 길, 인간 구원의 길로 나아가자’ 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이유를 통해 저는 루터나 공동번역의 번역보다는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을 지지합니다. 이는 물론 성서학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못한 저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루터성경과 공동번역 성경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번역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마다 루터성경으로 본문을 비교하고 특히 공동번역 성경의 시가서 부분을 너무나 사랑하지요. 감히 훌륭한 성서학자들과 루터의 뜻을 반박하는 것 같아 민망한 마음이지만 마태수난곡을 통해 알게 된 나의 예수는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지금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Stehet auf, lasset uns gehen! 일어나라, 함께 가자!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마 저 멀리 아래에서 횃불 여러 개가 줄지어, 마치 한 마리 커다란 뱀이 꿈틀대듯 올라오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치 전쟁터에 선봉으로 서는 장수처럼 예수는 일어나 말씀하십니다. 이는 십자가와 구원의 길의 동행자요 증인으로서 제자들을 초청하신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삶의 무게가 너무나도 고단하여 지치고 쓰러질 때, 내 삶의 자리에서 신앙을 지켜 내기가 너무나도 버거울 때,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예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한 채 폄훼하고 죽이려하는 무리들의 행렬을 마주할 때, 예수의 이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Stehet auf, lasset uns gehen!’

 

 

posted by

생활의 예배화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26)

 

생활의 예배화

 

<교회·사찰에 가야만 신앙생활인가…코로나19가 던진 ‘빅 퀘스천’>, 오늘 한 일간신문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종교계에 미칠 영향도 크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는데, 공감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이유로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무너진 이 때, 많은 것들이 재정립 될 수밖에 없을 터인데 그 중에는 신앙생활 혹은 신앙생활의 행태도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 목회를 하던 중 한국을 찾으면 그 중 많이 받았던 질문이 있었다. 독일 예배당이 빈 것을 지적하며 독일교회는 성령이 떠난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대답을 했던 것이 있다. 한국교회는 예배의 생활화는 자리를 잡았지만 생활의 예배화는 숙제로 남아 있다, 반면 독일교회는 생활의 예배화가 자리를 잡았지 싶다,는 대답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시작된 교회에서의 주일예배금지가 오랫동안 익숙했던 예배의 생활화에 금이 가는 아픔으로 다가오지만, 그럴수록 생활의 예배화로 이어지게 되기를!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