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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꽃비라 하고

신동숙의 하루 한 생각(126)


누구는 꽃비라 하고




누구는 꽃비라 하고
누구는 꽃눈이라 하고
누구는 눈꽃이라 해도


알겠다
알아듣겠다
귀를 열어서


하늘 가득 춤추는
자유로운 꽃바람이나
바람꽃이나


보인다
집에서도 보인다

눈을 감아도


내 안에 펼쳐진 풍경이

푸르른 하늘인 걸


벚님들 

말 한 마디에


마음에도
꽃이 피고 지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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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염치와 파렴치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48)


몰염치와 파렴치


모든 언어는 자기 안에 시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자기 앞에 슬그머니 다른 말 하나 놓으면 뜻이 달라진다. 전혀 다른 뜻이 되기도 하고, 스스로 가지고 있던 뜻이 깊어지거나 새로워지기도 한다. 



몰염치(沒廉恥)와 파렴치(破廉恥)도 그 중의 하나다. ‘염치’라는 말 앞에 ‘가라앉을 몰’(沒)이나 ‘깨뜨릴 파’(破)가 붙으면 뜻이 달라진다. 몰염치란 염치가 가라앉는 것으로 염치를 모르는 것이고, 파렴치란 염치를 깨뜨리는 것으로 염치와는 상관없는 뻔뻔스러움을 나타낸다.


누구의 손을 잡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우리의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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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틋한 봄이다

신동숙의 글밭(125)


애틋한 봄이다




봄이구나 싶어
바라보면
마른풀이 보인다


꽃이구나 싶어
바라보면
굳은살이 보인다


봄바람은
마른풀을 달래고


봄햇살은
굳은살을 품는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어울려 꽃을 피우는
애틋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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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하나의 무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47)


 깃털 하나의 무게


우연히 본 영상이었다. 입고 있는 옷이나 배경음악으로 볼 때 남미 쪽 어떤 나라 아닐까 싶었다. 재능을 겨루는 방송에 출연한 한 여성은 정신을 집중한 채 깃털 하나를 막대기 위에 올려놓았다. 깃털 하나를 올려놓는데 저렇게 정신을 집중해야 하나 싶어, 조금은 어색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깃털을 올린 막대기를 다른 막대기가 받았다. 중심에 중심을 잡는 일이었는데, 그러기를 꽤 여러 번 반복했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동안 어떤 막대기도, 처음 막대기에 올린 깃털도 떨어뜨리지를 않았다. 가느다란 막대기 위로 계속해서 무게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동작 하나하나가 신기함을 넘어 신비롭게 다가왔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숨을 멎게 하는 행동이 오래 이어졌다. 준비한 막대기를 통해 중심잡기를 모두 마쳤을 때 만들어진 형상은 기이했다. 마치 거대한 고래의 갈비뼈를 떠올리게 했다. 


아슬아슬한 손끝에서 빚어진 놀라운 광경, 복잡한 구조물이 서로를 의지한 채 중심을 잡고 서자 박수가 쏟아졌다. 박수소리에 중심을 잃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견뎌냈다.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한 공연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공연의 전부가 아니었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었을 때, 여인은 생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맨 처음 막대기에 올려둔 깃털을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동작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그야말로 정중동(靜中動)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깃털을 들어 올리는 순간 중심을 잡고 서 있던 모든 것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깃털 하나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 싶은데, 깃털 하나를 덜어내자 모든 것의 무게중심이 흐트러지고 만 것이었다. 깃털 하나는 모든 것이 중심을 잡는데 꼭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세상에 사소한 것은 없다. 사소해 보이는 것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 곁을 찾아온 예수가 삶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 있다면 그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사소한 것이 따로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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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꽃밭을 찾는 이유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46)


새들이 꽃밭을 찾는 이유


예배당 앞 공터를 꽃밭으로 만든 이후, 공터는 새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비둘기며 참새, 까치 등이 찾아와 시간을 보낸다.


새들도 꽃을 좋아하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새들이 꽃밭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꽃밭을 만들며 방앗간을 하는 장로님이 깻묵을 몇 자루 가져왔다. 깻묵을 뿌려 땅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새들이 꽃밭을 찾은 이유는 바로 깻묵에 있었다.


우리가 예배당을 찾는 이유가, 예수를 찾는 이유가 딴 데 있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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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중보자 예수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8)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 19 우리의 중보자 예수


 

마태 수난곡 134~35

마태복음 26:51~56

음악듣기 : https://youtu.be/54jonxBMC8s

34(28)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51. Und siehe, einer aus denen, die mit Jesu waren, reckete die Hand aus und schlug des Hohenpriesters Knecht und hieb ihm ein Ohr ab. 52. Da sprach Jesus zu ihm: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대사

예수

52. Stecke dein Schwert an seinen Ort; denn wer das Schwert nimmt, der soll durchs Schwert umkommen. 53. Oder meinest du, daß ich nicht könnte meinen Vater bitten, daß er mir zuschickte mehr denn zwölf Legion Engel! 54. Wie würde aber die Schrift erfüllet! Es muß also gehen.

52.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55. Zu der Stund' sprach Jesus zu den Scharen: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대사

예수

55. Ihr seid ausgegangen als zu einem Mörder, mit Schwerten und mir Stangen, mich zu fahen; bin ich doch täglich bei euch gesessen und habe gelehret im Tempel, und ihr habt mich nicht gegriffen. 56. Aber das ist alles geschehen, daß erfüllet würden die Schriften der Propheten.

55.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56. Da verließen ihn alle Jünger, und flohen.

56.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35(29)

코멘트

코랄 판타지아

O Mensch bewein' dein Sünde groß;

Darum Christus sein's Vaters Schoß

Äußert und kam auf Erden;

 

Von einer Jungfrau rein und zart

Für uns er hie geboren ward,

Er wollt der MittIer werden.

 

Den Toten er das Leben gab,

Und legt' dabei all' Krankheit ab,

Bis sich die Zeit herdrange,

Daß er für uns geopfert würd,

Trüg' unser Sünden schwere Bürd'

Wohl an dem Kreuze lange.

오 인간들아, 너희의 죄 인해 크게 슬퍼하라.

그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이 땅에 오셨음이라

 

우리의 중보자 되시려

순결하고 온화한

동정녀에게서 나셨도다.

 

죽은 자에게 생명주시고

모든 질고를 쫓아 내셨건만

이제는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실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구나.

우리의 죄, 무거운 짐 몸소 지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시려 하신다.

 


1부와 2부 사이

 

마태 수난곡 1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마태 수난곡은 총 연주 시간이 세 시간에 육박하는 대작입니다. 청중들뿐만 아니라 연주자들을 위해서라도 쉬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바흐 역시 이 장대한 이야기를 부분으로 나누기 위해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바흐의 성격상 그는 아마 처음에는 세 부분으로 나누길 원했을 것입니다. 성경 본문을 기준으로 볼 때, 마태복음 261절부터 겟세마네 장면인 2656절 까지가 1, 가야바의 집에서부터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으신 2726절 까지가 2,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지시고 무덤의 돌이 닫히기 까지를 3부로 나누면 내용이나 분량 적으로 적당했을 것입니다. 마치 1700년 후에 바흐에 의해 수난곡으로 작곡될 것을 염두 한 마태복음 저자의 의도처럼 예수 수난 이야기는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실재로 마태수난곡의 전곡 음반은 세 장의 CD에 나뉘어 실려야 하어야 하는데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거의 모든 음반이 이런 식으로 나누어집니다.

 

저 역시 사순절의 날짜 수에 맞춘 40회에 걸친 연재를 계획하며 처음에는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이 역시 너무나도 무난하게 나눌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마치 수난곡으로 작곡 되고 40일 동안 이 이야기를 묵상하라는 듯 마태복음의 수난 이야기는 크게는 세 부분으로, 작게는 40일의 여정으로 말끔하게 나누어집니다.

 

하지만 바흐는 마태 수난곡을 세 부분으로 나누지 않고 두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세 부분으로 나눌 때 첫 번째 부분을 1(Erster Teil)로 정했고 나머지 두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을 합하여 2(Zweiter Teil)로 정했습니다. 분량을 생각해도 2부가 1부 보다 두 배 정도 더 깁니다. 그런데 바흐와 피칸더는 왜 그렇게 나누었을까요?

 

바흐 당시의 루터교 예배를 생각하면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마태수난곡은 연주회장의 공연을 위한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위한 음악이었지요. 그 당시에는 대중적인 공연장조차 없었습니다. 세속음악(secular music)은 주로 왕실이나 귀족들의 저택의 커다란 방(chamber)에서 연주되었습니다. 그렇게 발전한 음악의 장르가 바로 실내악(chamber music)입니다. 그 무렵 산업혁명이 태동한 영국에서는 바흐의 시대부터 일반인들을 위한 대중공연이 활성화 된 반면 독일에서의 대중적 음악 공연은 50년 쯤 지나 중산층이 성장하게 된 모차르트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활성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음악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곳은 교회 외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음악사에서 바흐시대의 독일은 최고의 전성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성가대는 매 주일 3~5분 정도의 작곡된 성가를 부르는 정도이지만 바흐시대의 교회에서는 매주 30분 정도의 칸타타를 작곡하여 오케스트라와 합창과 솔로를 연습하여 올렸으니 그 음악적 수준과 찬양을 향한 정성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바흐는 교회력에 따라 1년을 한 사이클로 하여 세 개의 사이클의 칸타타를 작곡할 계획이었는데 그중에서 현재 200여 곡이 남아 있고 안타깝게도 수십여 작품은 유실되었습니다.

 

마태 수난곡은 사순절의 마지막 날, 성금요일에 열리는 예배를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예배 중에는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며 성찬식이 열렸는데 일 년 중에 가장 의미 깊은 성찬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배이기 때문에 말씀 중심의 루터교에서 설교가 빠질 수 없겠지요. 바로 마태수난곡의 1부와 2부 사이에 설교가 자리했던 것입니다. 오늘 만나실 부분의 마지막 곡 코랄판타지아가 끝나면 설교가 이어졌을 것이고 그렇게 1부가 마무리 됩니다. 설교의 분량을 고려하면 1부와 2부의 균형이 잡히는 것이지요.

   

귀가 잘린 말고

 

34번곡은 예수의 대사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의 대사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은 폭력을 써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제자에 대한 꾸지람이며 뒷부분은 잡으러 온 무리들의 떳떳치 못한 행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이루려 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이사야 53:12)


병행 본문인 요한복음 1810절에 의하면 칼을 가진 제자는 베드로였으며 귀가 잘린 대제사장의 종의 이름은 말고였습니다. 종의 귀를 자른 이야기는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 원문과 독일어 성경에서는 지난 시간 유다가 등장할 때처럼 이 부분에서 보라!//siehe!'라는 감탄사가 사용됩니다. 어떤 장면을 향해 주위를 환기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우리말 성경에서는 번역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었지요. 게다가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그의 귀를 만져 났게 하셨다는 기록도 추가 되어 있습니다.

 

저의 상상이긴 하지만 그 사건이 모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고 그 이름과 치유 사건이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말고는 그 때로부터 십자가에 달릴 때 까지 예수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자신의 귀를 어루만지신 예수의 손길을 기억하며 예수를 믿었을 것 같습니다. 구레네 시몬과 그의 아들 루포의 경우처럼 말입니다.(마태복음 27:32, 마가복음 15:21, 로마서 16:13) 조금 더 상상력을 펼쳐서 말고가 자신의 귀를 자른 장본인인 사도 베드로 밑에서 초대교회의 종지기와 같은 역할을 하며 평생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 듣는 사람이 되었다면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겠지요. 예수의 손길을 직접 느꼈기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 모두를 방관자가 아니라 새로운 십자가의 주인공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이건 종지기이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각자의 모양대로 예수를 따르는 삶이 우리 인생을 가장 가치 있고 충만하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 곁의 빈자리

 

1부는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1부를 마무리 하는 에반겔리스트의 마지막 내러티브를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Da verließen ihn alle Jünger, und flohen/그 때 모든 제자들이 그를 버렸고 도망갔다라고 증언하는 에반겔리스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묵직하게 들리며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와 오르간의 마무리는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라고 선언하는 재판정의 망치 소리처럼 단호하게 들립니다. 그 소리 후에 1부의 마지막 코랄이 시작하기까지 짧은 적막이 흐릅니다. 홀로 남겨진 예수 곁의 빈자리가 느껴지는 적막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했던 바로 그 빈자리 말입니다


 

두쵸(Duccio), 잡혀가는 예수, 시에나 대성당 제단화(Maesta)의 일부, 1310년 경



우리의 중보자(der Mittler) 예수

 

이어지는 코랄 판타지아는 1부의 마지막 곡입니다. 코랄 판타지아는 코랄선율을 기본으로 하여 작곡가가 음악적인 상상력을 발휘해서 좀 더 다채롭고 장대하게 펼쳐낸 합창곡을 말합니다. 마태수난곡의 시작곡도 코랄 판타지아였지요. 전체의 마지막 곡도 코랄 판타지아는 아니지만 세 개의 합창단과 솔리스트가 함께 부르는 장대한 합창곡으로 마무리됩니다.

 

앞서 이 1부의 마지막 곡 후에 설교가 이어진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므로 이 코랄은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설교 전에 올리는 성가대의 찬양곡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역할에 걸맞게 이곡은 십자가의 의미를 함축시킨 음악적 설교처럼 들립니다. 이 코랄의 가사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와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Er wollt der MittIer werden/그는 우리의 중보자가 되려하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혹여 이 코랄의 가사 내용을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셔서 대충 넘겨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합창단 소년들이 정성스럽게 노래하는 한 구절 한 구절을 마음에 새겨가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목사님들의 설교 또한 성도들이 복음의 정수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전제로 전달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복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한번 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복음은 삶의 방식입니다. 매일 지속되는 삶을 이끄는 삶의 방식 우리의 새로운 존재를 재정립시켜 주는 새로운 원리로서 날마다 우리 삶에 새롭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번 원고를 쓰면서 이 합창곡의 가사를 다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코랄 멜로디에 얹어 부를 수 있도록 노래가사로 도 만들었습니다. 이 멜로디로 펼쳐낸 바흐의 오르간 전주곡을 들으며 번역을 하는데 마치 이 복음의 내용을 새롭게 듣는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특히 이 합창곡의 마지막 소절이 겟세마네에서 끌려 내려가시는 예수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죽은 자에게 생명주시고

모든 질고를 쫓아 내셨건만

이제는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실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구나.

우리의 죄, 무거운 짐 몸소 지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시려 하신다.

 

이 코랄의 가사는 1530년 제발트 헤이든(Sebald Heyden, 1499~1561)이 썼습니다. 바흐는 이 코랄을 깊이 사랑하여 마태수난곡에서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코랄 모음곡집(BWV 402)46곡의 코랄 전주곡이 담긴 오르겔 뷔힐라인(Orgelbüchlein, BWV622)에도 이 멜로디를 사용했습니다. BWV 402번 코랄 멜로디를 들으시면서 아래에 노래용으로 번역한 가사를 붙여서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코랄 BWV 402 듣기 : https://youtu.be/q3lXCPxlmq8

 

부디 늘 새롭게 성육신과 십자가의 은혜를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노래로 부르고 또 불러도, 듣고 또 들어도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것이 바로 복음,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입니다



오 슬퍼하라 너의 죄악을

아버지 품을 떠나서

이 땅에 내려 오셨네.

 

동정녀에게서 나시고

우리를 위해 오셔서

중보자 되어 주셨네.

 

죽은 자 살려 주시고

아픈 자 고쳐 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사

피흘려 죽으셨도다

무거운 죄짐 지시고

십자가 지셨도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이천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며 중앙연회 사모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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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발자국에 고인 물처럼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45)


소 발자국에 고인 물처럼


최근에 교우 장례가 두 번 있었다. 목회를 하며 교우 장례를 치르는 것이야 늘 있는 일이지만, 이번엔 남달랐다. 두 장례 모두 생각하지 못한 장례였기 때문이다.  


한 교우는 67세, 건강하게 잘 지내던 권사님이었다. 생각지 않은 곳에서 쓰러진 권사님을 너무 늦게야 발견한 것이 문제였다. 결국 권사님은 장기 기증을 선택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또 한 사람은 집사님의 남편이었다. 40세, 믿어지지 않는 나이였다. 특별한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데, 갑자기 심장에 마비가 왔다. 눈물만 흘릴 뿐 가족들은 모두 일어난 일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분의 장례를 치르며 내내 떠올랐던 것은 조선시대 시인 박은의 시였다. 평생 농사를 지으면 살자고 약속한 아내가 25살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슬픔을 노래한 시의 한 구절이었다.
 
'인명기능구, 이갈여우잠'(人命豈能久, 亦碣如牛暫) 


'사람의 목숨이란 게 어찌 오래 가랴, 소 발자국에 고인 물처럼 쉬 마를 테지' 하는 뜻이다. 


소나기가 쏟아지면 뚜벅뚜벅 걸어간 소 발자국에도 물이 고인다. 이내 소나기 그치고 볕이 쨍하고 나면 소 발자국에 고였던 물은 이내 마르고 만다. 시인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아프다. 우리의 삶이란 그렇게도 덧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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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새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44)


꽃과 새





예배당 앞 작은 정원에 자목련이 피었다. 키 낮은 나무지만 자태가 곱다.


어떻게 알았는지 직박구리가 날아와 꽃잎을 먹는다. 멋있게도 먹는다. 우리가 밥을 먹듯 꽃을 먹는 새가 있구나.


새에게도 먹을 것을 주어 자목련이 저리 예쁜가.
꽃을 먹는 새가 있어 새들의 노랫소리 저리 맑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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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흙밭에 호미질을 하다가

신동숙의 글밭(124)


단단한 흙밭에 호미질을 하다가


이웃에 두 평 남짓 화단이 있습니다. 시멘트와 벽돌로 담을 두르고 마사토를 쏟아 부워서 만든 작은 공간입니다. 로즈마리, 라벤더, 페퍼민트, 애플민트 등 각종 허브 모종을 한 뼘 남짓 간격을 두고 심은 곳입니다. 그리고 화단의 가장 먼 둘레에는 꽃을 볼 작은 묘목 대여섯 그루를 심었습니다. 이렇게 작년 여름에 만들어 두고는 하늘만 믿는 천수답처럼 알아서 크겠지 하고 무심히 겨울을 지났습니다.


문제는 애초에 쏟아 부은 마사토의 높이가 울타리보다 높다는 점입니다. 비가 뜸하다 싶은 날 호수로 마른 흙밭에 물을 주면, 흙으로 스며 드는 양보다 밖으로 흘러 내리는 양이 많아 보였습니다. 입이 짧은 딸아이를 볼 때면 애가 타는 마음 같습니다. 때때로 교만으로 높아지려는 제 마음에도 가운데가 움푹 낮아져 눈물이 고이는 자리를 내고 또 내려 합니다. 교만함은 이득보다는 손해를 보는 경우의 수가 더 많음을 이제는 경험으로 아는 나이가 됐는가 싶어 가슴께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갑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는데, 줄기는 말라 보이고 겨우 가지 끝에 피운 잎도 야위어 보입니다. 안되겠다 싶어서 점심밥을 먹고 난 후 호미와 모종삽과 고무장갑을 챙겨서 친정 엄마하고 일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밖으로 돌던 몸이 집 안에 머물게 되면서 보이기 시작하는 소소한 집안일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집니다. 다들 집에 머물면서 뭘하고 있을까 하고요.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들 그런 마음이신지 더러 전화가 걸려 오기도 하고, 전화를 걸고 싶은 얼굴들을 달처럼 별처럼 떠올려 보기도 하면서 하루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화단 중간에 쪼그리고 앉아서 허옇게 마른 흙을 호미로 푹푹 팠더니, 속에 부드러운 흙이 울컥 토하듯 숨을 쉽니다. 가운데 높은 흙을 퍼 담아 옮겨서 낮은 가장자리에 둑처럼 쌓았습니다. 새로운 울타리를 두르 듯 흙을 쌓아서 둑을 만들었습니다. 어릴 적 모래 놀이터에 앉아서 하염없이 쌓고 허물고 또 쌓던 모래 언덕처럼 모래 터널처럼 모래 물길처럼.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허무시는 손길을 따라서 한없이 낮아지려는 마음으로 낮은 숨을 쉽니다. 한 점까지 낮아진 숨에 고요함이 머물면 한 순간 세상은 맑고 평온하게 보입니다. 


이제는 물을 주면 밖으로 흘러 넘치지 않고 뿌리가 물을 머금도록 묘목을 중심으로 사이 사이 낮게 골을 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밭에 일꾼 지렁이가 하는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흙을 먹고서 흙을 길게 토해 내며 흙에 숨구멍을 내는 지렁이의 삶. 제가 쪼그리고 앉아서 호미질로 하고 있는 일이 지렁이가 하는 일들이 아닌가 하고요. 지렁이와 벌레 작은 생명들이 살지 않는 흙이란 이렇게 척박하고 단단해져 숨 조차 쉴 수 없구나.


봄비가 내린 후 강변에 아이들 새끼손가락 굵기만한 지렁이가 보이면 몇 마리 데려다가 풀어 놓자고 웃으며 얘기했습니다. 비가 그친 후 강변을 산책하다 보면 지렁이가 종종 눈에 띕니다. 징그럽기보다는 언젠가부터 지렁이가 고맙고 소중하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한결 넉넉해졌습니다. 우리집 마당에 저절로 자란 페퍼민트와 돌나물과 수국과 꽈리를 몇 뿌리 뽑아다가 한 뼘 간격을 두고 빈 곳에 옮겨 심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르고 단단한 가슴엔 스며들지 못하는 은혜를 생각하면서, 눈 앞에 보이고 만져지는 단단한 흙에 호미질을 하는 일은, 마음을 벼르는 일 못지 않게 개운한 일이 됩니다. 날이 갈수록 마음과 몸이 하는 일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 중에 마음을 지키라는 말씀이 해처럼 빛납니다.


더러 말씀을 들을 때면 양심에 폭폭 찔립니다. 단단한 가슴에 호미질을 하듯 진리의 말씀은 호미날 같습니다. 그렇게 폭폭 찔리고 움푹 패이고 부끄러운 듯 마침내 부드러워진 마음의 골마다 꽃씨를 심자고 했습니다. 온라인 동영상으로 듣는 주일 말씀이 또한 날이 선 호미날처럼 쟁기날처럼 그리고 뿌려지는 꽃씨 같습니다. 무심히 단단해지려는 제 마음밭을 일구시는 보이지 않는 손길을 떠올리며, 고마움에 그리움에 봄비처럼 눈물이 내립니다. 낮아진 마음밭에 눈물이 빗물처럼 고이다가 넘쳐 흘러 좁은 물길이 나면 세상으로 흘러가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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