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량할 수 없는 사랑 속으로

측량할 수 없는 사랑 속으로





“하나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시16:1-3)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한가위 명절을 잘 보내셨는지요? 고향을 찾은 분들도 계시고, 집에 머무시는 분들도 계시겠습니다.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찾아뵙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그 마음도 귀하고, 그리운 마음을 달래며 영상으로만 인사를 나누는 마음도 귀합니다. 구름이 걷혀 보름달을 볼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보름달 하나 둥덩실 떠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자동화된 이미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가위 보름달 하면 제게는 늘 시골집 초가지붕 위에 열렸던 둥근 박이 떠오릅니다. 보름달과 마주 보고 있는 희고 큰 둥근 박의 이미지는 아득한 그리움이 되어 제 마음을 적십니다. 그런 박을 바라보며 어른들이 들려주시던 흥부 놀부 이야기에 귀를 쫑긋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저는 지금, 마치 전쟁을 치른 것 같은 온 집안을 정리하고 서재에 앉아 있습니다. 손자 손녀들이 찾아와서 놀다 갔습니다. 집안 곳곳에 남은 아이들의 흔적이 사뭇 정겹습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재잘거리며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고 그것을 가위로 자르고 다른 곳에 이어 붙이던 시간이 떠오릅니다. 무한 체력인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님을 다 아시지요? 잠시라도 아이들 눈을 피해 쉬려 하면 ‘할아버지, 놀아줘야지!’ 하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또 놀이 현장으로 끌려나가곤 했습니다. 몸은 고단한데 마음은 흐뭇합니다. 놀다가 지치면 아이들은 제 무릎 위에 오도카니 앉아 제 얼굴을 살핍니다. 다섯 살배기 아이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얼굴에 있는 이 점은 누가 심어놓은 거예요?” 
“내가 기르는 거야.“ 
“뭐 하려구요?” 
“나중에 요리해 먹으려고.” 
“무슨 요리요?” 
“이게 버섯이거든. 나중에 할머니가 양념을 넣고 요리해 줄 거야.”
“아닌 것 같은데.”

낄낄 거리고 웃지만 아이는 따라 웃지 않습니다. 쇠락의 징조를 읽는 것일까요? 반칠환 시인의 <어머니5>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부제가 '검버섯'입니다. 

“산나물 캐고 버섯 따러다니던 산지기 아내허리 굽고, 눈물 괴는 노안이 흐려오자마루에 걸터앉아 먼산 바라보신다칠십 년 산그늘이 이마를 적신다버섯은 습생 음지 식물어머니, 온몸을 빌어 검버섯 재배하신다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주름진 핏줄마다 뿌리내린다아무도 따거나 훔칠 수 없는 검버섯어머니, 비로소 혼자만의 밭을 일구신다(반칠환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중에서, 시와시학사)

어떤 광경이 선하게 그려지지 않습니까? 시인은 산골짜기를 터전 삼아 일평생 노동하며 살아온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허리는 굽었고 눈도 약해져 자꾸 눈물이 굅니다. 마루에 걸터앉은 어머니는 하염없이 먼 산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무심한 눈길이 향하는 곳은 단순한 풍경이 아닐 겁니다. 어쩌면 회한조차 없이 자기 생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어머니의 얼굴에는 검버섯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가 어머니 얼굴을 밭 삼아 뿌리내린 겁니다. 시인은 담담하게 그 광경을 그리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애잔한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생의 엄중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머니는 주어진 자리에서 견뎌야 할 생의 몫을 잘 살아내셨습니다.

이 어머니와 저를 견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세대 간의 갈등이 깊어지는 이 시대이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돌아보면 우리는 모두 한 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둘은 갈등을 거듭합니다. 꾀쟁이 야곱은 붉은 콩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삽니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여 에서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채기도 합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에서는 아버지의 장례만 끝나면 야곱을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합니다. 야곱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에서는 에돔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늘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오바댜서는 이스라엘이 침략군을 맞아 고군분투할 때 에돔은 형제 국가를 돕기는커녕 침략자들과 한패가 되었다고 꾸짖습니다. 심지어는 피란길에 나선 이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버리기까지 했다고 말합니다. 불구대천의 원수란 말이 실감 납니다.

이 두 나라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한배에서 나온 형제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원으로 자꾸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갈등이 근원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일상을 살면서도 자꾸 우리 삶의 뿌리를 돌아보며 산다는 뜻일 겁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고백이 자연과학적 진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백 속에 머문다는 것은 삶이 신비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경외심을 품고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비와 경외심을 품고 사는 이들은 세상의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숨결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나라, 세대와 세대,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의 차이, 피부색과 종교의 차이는 근원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귀향의 계절에 우리가 떠올려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일치의 가능성이 아닐까요?

긴 연휴의 마지막 날이 마침 주일입니다. 매해 10월 첫 주는 전 세계의 교회가 ‘세계 성찬 주일’(World Communion Sunday)로 지키는 날입니다. 그 뿌리는 미국 장로교회가 1930년대에 제안한 것이지만,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은 1982년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열린 세계 교회 협의회 모임부터입니다. 대회 참가자들은 이념과 분쟁으로 찢긴 세상을 그리스도의 식탁 앞에 함께 앉아 치유하자는 뜻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사실 세상 분쟁의 많은 부분이 종교 분쟁임을 생각할 때 ‘세계 성찬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비대면으로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어떻게 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온라인으로라도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존 웨슬리가 말하는 ‘은혜의 수단’ 가운데 매우 중요한 의식인 성찬식 없이 한 해를 보낼 수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우려되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교우들의 성숙한 믿음과 태도를 신뢰합니다. 할 수 있으면 온 가족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들이 미리 이야기를 나누고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지 의논하십시오. 성찬상을 정갈하게 마련하고 빵과 포도주 혹은 포도즙을 그 위에 올리십시오. 예배 중에는 깨끗한 천으로 덮어놓으십시오. 의복은 가급적이면 단정하면 좋겠습니다.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가족들이 함께 성찬의 은총을 비는 기도를 올리십시오. 참고로 신학자 칼 라너의 성만찬 기도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이 성만찬을 통해 우리의 참 모습을 되찾게 하소서. 몸과 영혼이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 당신의 은혜가 참으로 존재함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는 사람,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과 우리가 섬겨야 하는 이들을 위해 그 은혜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마지막으로, 당신을 그저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여기는 우리, 우리의 삶과 죽음 속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 희생 제물로 드려지신 하나님으로만 바라보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되어 주소서. 진리의 생명, 무한한 자유의 생명, 빛의 생명, 그림자 없는 밝음의 생명,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음을 거룩하게 먹고 마시는 생명, 모든 피조물이 아버지께로, 모든 것 안에 계신 모든 것 되시는 아버지께로 넘어감을 끊임없이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생명, 바로 그 생명입니다.”(칼 라너, <칼 라너의 기도>, 손성현 옮김, 복 있는 사람, 2019, p.188-9)

아직 어리거나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에게 성찬의 소중함을 미리 일깨워주는 게 좋겠습니다. 이 성찬을 통해 가족의 일치는 물론이고, 각지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이 보이지 않는 손길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이제 추석 연휴가 끝나고 상황이 좋아지면 우리가 다시 예배당에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기대를 품습니다. 선물처럼 주어진 10월에 우리 믿음이 더욱더 깊어지면 좋겠습니다. 온 교우들이 몸 성히, 마음 성히 잘 지내시기를 좋으신 주님 앞에 기도 올립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여러분을 감싸시기를 빕니다.

2020년 10월 3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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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얘기마을(102)




하나 둘

벼가

고개를 숙인다.


고맙다고

하늘 향해

절을 한다.


절 

하나하나가

무겁다. 


-<얘기마을>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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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날엔

신동숙의 글밭(244)


비가 내리는 날엔




비가 내리는 날엔

다가오지 않은 미래보다는 


저 멀고도 아득한 

옛날이 가슴을 두드립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그리움이 밀물처럼 차오릅니다


빗방울이 떨어진 자리마다 

흙이 패이고 


흙탕물이 고이고

가슴은 질퍽해져 뒤죽박죽이지만


끊임없이 내려앉는 빗소리에

마음은 땅으로 낮아집니다


빗물이 처음 발길 닿은 곳에 

잠시 고였다가


이윽코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듯

가슴은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을 더듬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엔

빗방울처럼 연약해진 가슴이


잘게 부서져 내리는

연약하고 낮은 가슴을 지닌 이들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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