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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41

물음과 물 얼마나 많은 물음에 기대어 나 여기까지 흘러왔던가 답을 구하려 불태우던 한마음을 물처럼 내려놓은 후 매 순간 일어나는 물음과 물음 겹겹이 출렁이는 물결을 이루어 흐르는 냇물처럼 강물처럼 흐르는 물음이 물이 되는 신비 순간의 물음에 마음을 씻기고 순간의 물음에 마음을 비추는 내 가슴의 샘에서 저절로 샘솟는 이 물음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물 씨앗을 품은 커다란 열매의 물음 같은 열매를 품은 작은 씨앗의 물음 같은 2021. 8. 19.
‘영혼의 수척함’에 대하여 폭증하는 코로나에 다시 반복되는 장마와 같은 날씨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계절의 변화를 그 누구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어느 누구도 태양을 바닷속으로 집어넣었다가 산 위로 꺼내 올릴 수 없다. 하늘의 별들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다가 다시 나오게 할 방법도 없다. 세상은 한없이 변하는 것 같지만 인간이 사는 본질은 그리 크게 다르지 않는 것같다. 요즘, 모름지기 자기 의에 사로잡혀 기준이 언제나 자기위주에 빠지는 일을 경계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착하지 않다. 다른 사람의 삶이 담고 있는 이런 저런 사연들을 헤아려주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과 진실 되게 만날 능력이 없다고나 할까. 늘 자기 입장만 내세운다. 자신의 입장이.. 2021. 8. 18.
단강까지의 거리 어렵게 한 주일을 보내고 맞은 부활절이다.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절, 연례행사 치르듯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절기. 글쎄, 뭘까. 부활란을 먹고, 특별헌금 드리고 부활에 대한 설교 듣고, 뭐 그렇게 끝나는 날은 아닐 텐데. ‘기대가 무너진 그 자리에서’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농촌의 현실을 인정하며, 오늘 이 농촌에서의 부활의 의미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부활 후 갈릴리에 나타나셨던 예수는 오늘 이곳 단강엔 어떤 모습으로 찾아와 어떤 말씀을 하실지. 설교가 끝나갈 즈음 조용히 문이 열렸고 생각지 못한 분이 들어오셨다. 이진영 집사님. 서울 미아중앙교회를 연으로 만나게 된 늘 형님같이 친근한 분, 그 우직한 성품으로 하여 동화 ‘엿장수 아저씨’의 이미지를 전해 주신 .. 2021. 8. 18.
잔정 오후에 작실 김천복 할머님 댁을 심방했다. 말씀을 참 재미있게 하시는 할머니신데, 몸이 안 좋으셨다. 단오를 맞아 방에서 떡을 빚고 계시던 할머니는 우리들이 들어서자 손을 잡으시며 무척이나 반가워하신다. 아침에 기도를 하셨다는 것이다. 오늘 꼭 전도사님이 오시게 해 달라고. 내 작은 행위가 누군가의 기도의 응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어깨가 무겁다. 부족하지만 이곳에서 내 할일은 이렇게 자명한 것이다. 돌아오는 우리에게 할머니는 참깨를 한 봉지 전해 주셨다. 이곳에 와 확인하는 깨알 같은 잔정들, 고맙습니다. 그 따뜻하고 훈훈한 손길. - 1987년 2021. 8. 17.
오늘을 맞이하는 기도 선선한 가을 바람, 익어가는 강아지풀 한여름 무더웠던 마음까지 적셔주는 빗소리 돌담 위로 대문 위로 목련나무 위로 밤하늘로 오르려는 새하얀 박꽃 어둔 밤하늘에 드문드문 하얀 별 숨어서 우는 귀뚜라미 소리 들숨날숨 아, 살아있음 그리고 하늘과 이 땅에 펼쳐 놓으신 무수한 아름다움 차고도 넘쳐 눈을 어디서부터 두어야 할 지 무엇부터 담아야 할 지 매번 알지 못하여 순간 길을 잃을 때면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눈을 감습니다 순간의 새로움으로 또다시 맞이하는 설레임과 흔들림으로 시작하는 오늘 새로운 오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새로운 마음 뿐임을 놓치지 않으려 오늘도 거져 주신 하루에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지 태초의 고민인 듯 거듭 새로이 생각하는 하루입니다 기뻐하는 오늘 감사하는 오늘 기도하는 오늘 제.. 2021. 8. 16.
엄한 숙제 학생부 토요모임, 초등학교 어린이까지 모두 열 명이 모였다. 백지 앞에 서서 감히 붓을 들지 못하고 마침내 울고 만다던, 그런 때가 종종 있다던 어느 노화가의 고백이 생각난다. 나도 지금은 백지 앞에 선 것이다. 맨 처음 시작한다는 것의 가슴 떨림, 성경을 공부한 후 탕자의 이야기를 들려준 뒤 ‘어서 돌아오오’ 찬송을 가르친다. ‘어서 돌아오오’ 몇 번을 반복하지만 자꾸만 그 부분이 틀린다. 그래, ‘어서 돌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지금은 비록 어린 나이에 이 노래를 배우지만 언젠가 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혹 잘못된 길 멀리 떠날 때 ‘확!’ 뜨겁게 이 노래가 되살아오기를. 잘못된 길로 가는 발목 와락 붙잡을 수 있기를. 예배를 마치고 부활절을 준비했다. 둘러앉아 삶은 계란에 ‘축 부활, 예수 .. 2021. 8. 16.
서로 다른 손길 훔쳐간 건 쌀 두 가마뿐이 아니었다. 이제껏 그런 일이 없었는데 반장님 댁 쌀이 없어졌다. 아침에 일하러 나간 사이, 그 잠깐 사이에 마루에 있던 쌀이 없어진 것이다. 일거리 쌓여있는 마당에는 봉고차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낮이나 밤이나 문 열어 놓고 살던, 서로가 서로를 믿으며 열린 마음으로 살던 마을에 전혀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쌀 두 가마의 값보다는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난 데서 더욱 당황해 하던 마을 사람들. 한두 사람의 나쁜 욕심이 던진 어두운 파장은 마을 사람들의 얼굴로 쉽게 번졌다. 어쩜 내일부턴 대문이 닫히는 건 아닐까. 닫힌 문마다엔 굵은 자물쇠가 걸리는 건 아닐까. 나즈막이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웃집들 사이엔 담이 높아지고 높아진 담 따라 마음도 갇혀 각자 타인이 되는 .. 2021. 8. 15.
아이들을 만나다 주일 오후에 아이들이 놀러왔다. 교회에 나오는 아이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과 중학교 학생들이었다. ‘너 먼저 들어가’ 하며 서로 뒤로 뺏지만, 모두들 들어왔다. 수원종로교회 청년이 보내준 들깨차를 타서 마시곤 둘러 앉아 게임을 했다. ‘밍맹몽’, 단순하면서도 틀리기 쉬운 게임이다. 조금씩 어색한 분위기가 지워진다. 그냥은 쑥스러워 하지 못했던 노래도 게임에 틀리자 자연스레 부른다. 게임을 마치고 ‘화전놀이’라는 동요를 가르쳐 주었다. ‘달님처럼 둥그런 진달래 꽃전은 송화가루 냄새보다 더 구수하다’ 노래 중 제일 어려운 그 부분을 배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기타반주에 맞춰 악보도 없는 노래를 잘 불렀다. ‘개밥’이란 단편소설도 들려줬다. 현진건인.. 2021. 8. 14.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노력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절망에서 출발하지 않고도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실패를 거듭한다 해도,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해도, 일이 애초에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해도, 다시 기운을 내고 용기를 내야 한다.”(빈센트 반 고흐, , 신성림 옮김, 예담, p.82)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입추가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 바람결이 달라졌습니다. 새벽이면 홑이불을 끌어당기게 됩니다. 그렇게 보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뭇잎도 그 무성하던 초록이 조금 풀이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매미소리도 조금 애잔해졌습니다. 참매미, 말매미, 쓰름매미, 유지매미 소리가 뒤섞여 숲을 가득 채우더니 이제는 제풀에 꺾인 듯 소리 크기가 줄어들었습니다. 계절은 이렇게 어김없이 순환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 2021. 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