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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나니 길 떠난 자를 만나고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6) 길을 떠나니 길 떠난 자를 만나고 명파는 또 하나의 땅 끝처럼 먼 곳에 있었다. 월요일 새벽, 아들 규민이와 함께 이른 시간 집을 나섰다. 전날 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떠나는 아침 6시 30분 속초행 고속버스를 예약해 둔 터였다. 창구에서 표를 끊고 버스에 타면서 표의 절반쯤을 잘라내던 것은 이젠 옛 시대의 유물, 이제는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예약한 내용을 핸드폰으로 보여 주기만 하면 되었다. 핸드폰에 있는 예약권을 단말기에 대니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앉을 좌석번호까지를 알려준다. 마치 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기계가, 그것도 친절한 목소리로! 이른 시간인데도 생각보다 승객이 많았다. 드디어 목적지를 향해 출발을 한다. 잠깐 눈을 붙였다 싶었는데, 눈.. 2017. 7. 6.
슬픔의 강, 생명의 강 슬픔의 강, 생명의 강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다. 교양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읽는다면 모를까, 그 속에서 진정한 삶의 길을 찾고자 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애써 가꿔온 삶의 토대와 자아 정체성을 사정없이 흔들거나 허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위안을 구하는 이들에게 성경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낯선 세계를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일이다. 삶의 방식을 바꿀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야 성경과 참으로 만날 수 있다. 성경은 매끈한 텍스트가 아니라 주름 잡힌 텍스트이다. 인류의 오랜 경험과 시간이 성경 이야기 속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름과 주름 사이의 갈피를 잘 살필 때 성경의 진미가 우러나온다. 이반 일리치는 이라는 책에서 수도사들의 .. 2017. 7. 5.
주의 영은 떠나고 악한 영이 그에게 오다 사울 이야기 3 주의 영은 떠나고 악한 영이 그에게 오다사무엘상 16:14-23 다윗이 등장한 후 사울의 생오늘 설교는 사울 왕 이야기 세 번째입니다. 사울의 생애는 다윗이 등장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누차 얘기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는 다윗 등장 이전까지 사울의 생에 대해 얘기했으니 오늘은 그 이후에 사울의 생이 어떻게 전개됐는지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사울은 내키지 않지만 떠밀려서 왕이 됐습니다. 백성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낼 지도자로서 왕을 원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백성들이 그에게 별 불만이 없었습니다. 전쟁에서 승승장구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사울과 사무엘, 그리고 사무엘이 대리한 하느님과의 관계는 그리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사울과 사무엘은 두 번 큰 갈등을 겪습니다. 블레셋과 전쟁했을 때 사무.. 2017. 7. 3.
챙기지 않은 것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5) 챙기지 않은 것 배낭에 이런저런 짐들을 챙기며 일부러 까지는 아니라도 굳이 따로 챙기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지도였다. 지도를 챙기지 않는 일은 누가 봐도 무모한 일이었다. DMZ을 따라 걷는 길은 짧지도 않고 단순한 길도 아닐 것이다. 거의 모든 길이 낯설 것이었다. 길과 지명과 하천과 산과 고개 등이 상세하게 적힌 지도가 어느 때보다도 필요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를 알아보지 않았고, 구하지 않았고, 챙기지 않았다. 성격이 꼼꼼하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생각지 않은 곳에서 느닷없이 다가오는 불확실성과 한계를 직접 경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미리 챙기지 않은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는데, 숙박 장소였다. 열하루의 일정이니 열흘은 어디선가 잠을 자.. 2017. 7. 3.
배낭 챙기기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4) 배낭 챙기기 첫 출발지를 강원고 고성에 있는 명파초등학교로 정했던 것은 함 장로님의 제안이었는데, 나도 흔쾌히 동의를 했다. 의미 있는 일이다 싶었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인데다 우리나라 최북단에 있는 초등학교였기 때문이다. 생각 끝에 월요일 새벽에 출발을 하기로 했다. 명파초등학교 인근에서 점심을 먹고 첫 걸음을 떼려면 주일 밤에 속초로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버스 시간을 알아본 결과 월요일 아침 일찍 떠나도 가능할 것 같았다. 열흘 여 교회를 비우는 것이니 떠나기 전 마무리를 잘 하고 떠나는 것도 사소한 일일 수는 없었다. 덕분에 가방은 주일 밤에 싸도 되었다. 가져갈 짐들을 거실 바닥에 펼쳐 놓았다. 산티아고를 다녀온 정 장로님께 경험상 열흘 여 .. 2017. 7. 2.
더는 힘들지 않으려고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 더는 힘들지 않으려고 길을 떠나기 전 망설인 일이 있었다. 일정을 어머니께 말씀을 드려야 하나 마나, 고민이 되었다. 미수(米壽)를 맞은 어머니는 막 호주를 다녀온 뒤였는데, 내 일정을 알면 걱정을 하실 것 같았고, 그렇다고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이야기를 듣게 되면 서운해 하실 것 같았다. 생각 끝에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북에서 내려오실 때 어디로 해서 왔어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어머니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대답을 해 주었다. 고향이 강원도 통천군 벽양면인 아버지는 여름에 먼저 서울로, 어머니는 이듬해 봄에 각각 남으로 내려오셨다. 이번에 걷는 길 중에는 부모님이 내려올 때 걸었던 길이 포함되어 있을 것 같았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 2017. 6. 30.
떠날 준비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2) 떠날 준비 강원도 고성에서 출발하여 파주 임진각까지 DMZ를 따라 걷는 거리는 340km였다. 함 장로님이 적어주신 로드맵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열하루의 일정이니 하루 평균 30km씩을 걷는 셈이다. 하지만 한 가지 변수는 있다. 로드맵에 적은 거리가 내비게이션으로 계산한 것이라 했으니 막상 걷는 거리는 다를 것이다.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목회를 하면서 열하루라는 시간을 비우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일들을 있으면 불가능하고, 불가피한 일들이 없다면 다녀올 동안의 일들을 미리 해두어야 한다. 주일을 한 주 비워야 했지만, 다녀오는 동안의 모든 예배는 부목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두 곳 신우회 예배는 다녀온 다음날로 조정을 했다.. 2017. 6. 27.
아름다움과 부조리가 공존하는 세상 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3) 아름다움과 부조리가 공존하는 세상 인생은 아름다운가? 아름답다. 인생은 덧없는가? 덧없다. 허무하다. 부조리하다. 저마다의 인생은 역설과 모순투성이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의 인생도 세상사도 온통 아름다움과 부조리로 뒤엉켜있다. 그러하여 격한 희망에 감격하다가도 삶의 낙관은 여지없이 무너지곤 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 선생이며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은 이미 간파했으니, 그는 세상사의 양극적인 현실과 역설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그가 그토록 집요하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헤벨’(헛됨, 무익함, 덧없음, 허무, 부조리)과 생의 ‘즐거움’을 말한 이유다. 전도서는 ‘헤벨’의 책이지만, 동시에 삶의 즐거움을 촉구하는 “기쁨의 복음서”다. 저자 .. 2017. 6. 27.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 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1) 걷는 기도를 시작하며 필시 그럴 것이다. 불볕더위 아래 한 마리 벌레 같을 것이다. 지렁이나 굼벵이나 송충이가 길 위를 기어가는 것 같을 것이다. 한 마리 벌레 같은 모습으로, 한 마리 벌레 같은 심정으로 길을 걷기로 한다. 허리가 잘린 내 나라 강토, 그 아픔의 땅인 DMZ를 따라 걸어야지 했던 것은 오래 전부터 마음에 있던 생각이었다. 한 형제요 자매, 그럼에도 서로를 향해 불신과 증오의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곳, 그 아픔의 땅을 걷고 싶었다. 문득 더는 미룰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두 가지 이유가 마음을 재촉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걷고 싶어도 걷지 못할 것 같았다. 한두 살 나이를 더 먹으며 건강이 따르지 않으면, 그래서 마음뿐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하.. 2017. 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