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께(5)


소슬한 가을바람 같은 청량감이 드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강렬한 햇빛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한여름 오후입니다. 멀리서 여름새가 청량한 울음소리를 가끔 낼 뿐 시골의 한 여름은 고요하기 그지없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편지를 읽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두루두루 편지를 보내셨고, 세상사 질곡 속에서도 희망을 묻곤 했던 저 또한 이 편지를 받았던 것입니다. 한여름 해바라기처럼 샛노란 표지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문득 목사님을 처음 만났던 기억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아스라한 청파동 거리의 추억


김삼웅 선생님이 쓰신 《김남주 평전》이 마침내 발간되고 난 뒤, 출판사에서는 북 콘서트를 기획했었지요. 김남주 시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광주에서 한 차례 열린 북 콘서트는 서울에서도 한 차례 열렸었지요. 서울에서의 북 콘서트는 목사님이 계시는 ‘청파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저나 김남주 시인 둘 다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기독교 관련 책을 많이 출간하는 출판사, 것도 목사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김남주 시인의 평전을 낸 데다가 교회에서 북 콘서트까지 하게 되니 저로선 이 일들이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어느덧 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이십여 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잊힌 인물이라 생각했고, 또 투쟁과 혁명을 이야기 하던 세태도 한물갔으니, 지금 시점에서 그에 관한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7, 80년대와 같은 저항과 혁명의 시대에나 읽히던 시인의 삶을 담은 평전을, 더구나 극단적으로 보수화되어가고 있는 사회 분위기상 그의 평전이 읽힐 것을 기대하는 출판사가 있을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꽃자리출판사의 한종호 목사님은 선뜻 책을 내 주셨고, 출간기념 북 콘서트까지 한다는 것은 저로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김남주 시인에게 이런 홍복이라니요! 그런데 북 콘서트가 열리는 장소가 청파동에 있는 교회라는 말을 듣고는 저는 잠깐 흥분했습니다. 청파(靑坡)! 지금은 고루하고 낡은 이름처럼 들리지만 빛나던 청춘의 한때, 저를 성장시키던 장소가 청파동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 북 콘서트뿐만 아니라 수십 년 만에 청파동을 찾아간다는 생각에 참 많이 설레었습니다.


목사님도 저처럼 젊은 날을 추억할만한 장소가 있으시겠지요. 백발을 머리에 인 지금 생각해보면 유년기와도 같았던 스무 살 적. 그때는 고뇌조차도 참 예뻤었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양 손에 책을 들고, 저는 미술관과 음악회를 찾아 털털거리는 버스를 탔더랬지요. 저의 무수한 발걸음이 찍혀 있을 긴 청파언덕…, 그 언덕을 더듬거리며 추억해 보면 여지없이 스무 살, 그 빛나던 청춘의 시절로 돌아갑니다.


가난한 여대생이라 눈요기로만 훑어보던 예쁜 옷을 팔던 옷가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맛으로 남아 있는 교문 앞에서 사 먹곤 했던 오무라이스…, 그땐 작은 일에도 참 만족해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의 젊은 날의 그 시절은 마냥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지요. 4년 내내 툭하면 계엄령이고, 여차하면 닫히던 교문 앞에서 터트리던 울분과 한숨의 나날도 빼곡히 기억 속에 스며있습니다. 닫힌 교문을 뒤로 하고 들어선 음악다방에서 전 무엇을 그리도 기다렸던가요? 그 기다림 속에서 툭툭 터져 나오던 속울음 같은 그 외로움은 또 무엇이었을까요? 그 청춘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전 북 콘서트가 열리는 ‘청파교회’ 거리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 거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더군요. 거리와 동네가 거대해지고 획일화된 아파트 단지로만 존재가 가능한 서울에서 아직 동(洞) 이름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청파동과 청파언덕 길은 크게 달라보이진 않았습니다. 예전보단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차 숨이 좀 막힌다는 것 외엔 그다지 낯설지도 않았어요.


갈월동 길도 여전했고요. 그 길에서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가면 서울역이었지요. 학교에서 쭉 걸어 내려오면 남영동 버스 정류장이 있고…, 아 그리고 극장이 있었지요. 남영동 금성극장이었던가!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오빠와 처음 같던 곳이 바로 그 극장이었습니다. 전 거기서 <마음의 행로>, <황태자의 첫사랑> 등의 영화를 봤었지요.


지금도 그 극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전철역이 들어섰고 남영전철역 곁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창문 없는’ 검은 건축물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거기, 한 줄기 빛조차 숨죽여 들어가게끔 설계된 창문과 완벽한 방음 시설을 갖춘 ‘검은 건축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거기서의 비명과 죽음이 대한민국의 역사를 어떻게 바꿔왔는지는 그 건축물 곁을 스치는 무심한 전동차도 다 아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제가 오빠들과 함께 자취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 청파동이었습니다. 여상 출신이 어쩌다 대학시험을 보게 되는 바람에 4년간 긴 청파언덕을 오르내리게 되었고, 질식할 것만 같은 70년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한 목소리를 보태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 끝에 도착한 곳도 청파동 아랫동네인 남영동 그 창문 없는 검은 건축물이었으니, 참 저에겐 인연이 깊은 ‘청파’고, 고유명사로 남아 있는 ‘남영동’입니다. ‘청파’교회 앞에 서니 만감이 회오리바람처럼 제 몸을 휘감더군요. 그 쓰라리던 기억을 또 떠올리게 하던 청파동이었습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기도


김 목사님, 저는 교회와는 무관하게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이나 시골이나 교회 혹은 절이 어디나 널려 있어 몇 발짝만 옮기면 기독교인도 불교인도 될 수 있는 게 현재 우리나라의 종교 형편이지요. 제가 시골생활을 한지가 20여 년인데 옆집 아주머니는 지금도 호시탐탐 저를 교회에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이십니다. 또 저의 집에서 차를 타면 십 분 거리에 절들이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부처님 오신 날에만 절에 가는 날라리 불교 신자이긴 하지만 큰 스님에게 수계를 받은 적이 있으니 저는 불교 신자에 가까운 편이지요. 아무튼 신앙을 갖는다는 건 엄청 부지런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전 게으르기 짝이 없으니 진정한 의미의 신앙인이 되기는 글렀다고 치부하며 제 자신을 합리화해 봅니다.


아무튼 《김남주 평전》 북 콘서트 덕분에 교회도 가고 목사님들도 만나고, 또 김 목사님과 손석춘 교수님이 주고받은 글을 책으로 엮은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도 받는 혜택도 받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저는 북 콘서트 공간이던 청파교회, 한 뼘도 안 되는 낮은 강단의 오래되고 작은 교회가 주는 감동을 가슴에 품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김 목사님과 손 교수님이 주고받은 서간집을 곧바로 읽어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열심히 생각하고 온 힘을 다해 세상을 바꾸려는 분들이 계시구나 하는 든든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거기에 동감하는 마음에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그랬기에 이번에 목사님이 펴내신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란 책을 받아 읽으니 왜 청파교회가 김남주 시인을 받아주었던가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김기석 목사님, 목사님이 보내주신 편지를 읽는 동안 소슬한 가을바람 같은 청량감이 드는 감동을 느꼈습니다. 목사님의 사유와 문학, 기독교적 실천을 통한 목회자로서의 고뇌가 오롯이 표현된 편지글들은 제게 그런 감동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한편으론 목사님의 문장도 제겐 충격이었습니다. 표준어로만 사고하고 글을 쓰는 세태 속에서 예스런 표현의 낱말을 곳곳에 품은 글을 읽으니 제 마음이 마치 무장해제 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더욱이 목회자의 사유를 통한 시적 언어와 간간이 스며있는 고유어들은 마치 중세 고음악을 듣는 듯한 고아함과 격조를 느끼게 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목회자의 글을 거의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이 책이 주는 감동은 조금 남달랐습니다. 마치 시를 조곤조곤 읽어주는 것 같기도 하고, 나뭇잎에 내리는 가랑비 같은 음성으로 성경을 읽어주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고, 또 안개가 잔뜩 낀 아득한 도로 위를 걷는 것 같기도 한 그런 느낌… 희망만을 얘기할 수 없어서인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기도 같다고나 할까. 목사님의 편지글을 읽는 동안 뜨거운 더위가 무색하게 서늘하고 쓸쓸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한편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린 것은 중학교 3년간 다닌 미션 스쿨의 기억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정신의 편력과 독서의 이력이 겹쳐져 반갑기도 했습니다. 함석헌, 돔 헬더 까마라, 본회퍼, 김수영, 테니슨의 시, 토카타와 푸가, 몰리에르… ‘청파교회’가 장소에 대한 기억이었다면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이 책은 저에게 문학과 종교, 학교와 사회,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추억을 담은 앨범 같은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정말 새카맣게 잊고 있었더군요. 제가 한때 밤을 새워 성경을 읽었다는 것을요. 빨간 줄을 쳐 가면서 말이죠. 그것도 열다섯 살 때 말입니다. 중학교 3학년이던 그때 저는 교과서보다, 아니 고교진학 공부는 안중에 없었고, 어떻게 하면 일 년 간 신약과 구약을 다 읽을 수 있을지 머리를 싸매곤 했던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없이 들어간 중학교가 기독교 학교라서 수업 시간에 성경을 배웠고, 수요일엔 교시에서 토요일엔 대강당에 모여 전교생이 예배를 보았습니다. 교회가 뭔지도 몰랐던 저는 ‘아멘!’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그냥 따라서 ‘아멘’하곤 했었지요. 성경을 배우는 시간은 좋지도 싫지도 않았지만 토요일 대강당에서 예배를 보는 것은 수업시간이 적어서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예배시간엔 큰 언니들이 앞에 나가 배에다 잔뜩 힘을 주고 노래를 부르는 시간 - 소프라노, 엘토 이런 것을 그때 알았지요. - 이 있었는데, 그 시간은 그냥 좋았습니다. 그때 노래를 참 잘했던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는 나중에 유명한 메조소프라노 가수가 되었고,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기도 했었지요.


그런데 미션스쿨에서 이러한 예배를 보는 것이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쯤 지날 무렵 저는 점차 회의가 들고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볼 때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쩌구 저쩌구…”하는 내용을 들으면 저같이 신앙심이 없는 애들은 “으악!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란다!”하면서 귓등으로 설교를 듣기 시작했지요. 목청을 높여 “우리 죄인들은…” “우리 원죄를…” “회개하고 회개하라…”며 부르짖던 부흥회는 소녀들의 가슴에 새겨지려던 신심을 외려 달아나게 만들곤 했습니다. 그러한 풍경은 저를 중 3학년이 되자 예배시간에 가지 않기 위해 꾀병을 부리는 짓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게 만들었지요.


저에게 있어 성경읽기란 순전히 오기로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서울의 학교로, 오빠들 곁으로 보내려고 했었는데, 저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서울로 안 가게 될 것이라 생각해 공부대신 성경읽기를 택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소설처럼 재밌지는 않았지만 공부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었습니다. 소설을 읽는 것 마냥 술술 진도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선 의심하지 말라고 하는데, 저는 글 행간마다 자꾸만 의문부호들이 떠올라 속도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자꾸 의문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왜 그렇게 화를 잘 내실까? 불의 심판은 왜? 예수님은 귀신을 왜 돼지에게? 우리나라 역사도 잘 모르는데 수업시간에 왜 이스라엘 역사를 배우는 거야? 그리고 목사들은 왜 우리에게 죄인이라고 하는 거지?…그런 질문들이 성경을 읽을수록 생겨났습니다.


구약을 삼분의 이쯤 읽었을 때 저의 중학생활은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서울의 상업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습니다. 구약읽기를 다 끝내지는 못했으나 성경을 읽으면서 생긴 의문들이 저를 놓아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입시공부를 하지 않는 상고생의 지루한 일상은 책으로도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기도 하고 가끔 교회를 찾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영화 속으로 빠져든 것만큼 교회에 빠져들지는 않더군요. 교회조차도 소심했던 저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지루하고 긴 저의 상고생의 3년이 흘러갔고, 선생님은 제게 왜 상고에 왔냐며, 대학진학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미션스쿨에 다녔던 3년간의 기억이 어쩌면 남다른 생각을 하게 한 계기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을 때 전 제가 받았던 초벌교육(중학교 교육)의 현장인 그 시골 중학교를 늘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사학 문제가 사회 이슈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 문득 수십 년 전의 그 미션스쿨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전교생이 다 들어가는 대강당이며 그랜드 피아노가 있던 음악실, (그 음악실에서 입학 후 첫 음악시간에 슈베르트의 <마왕>을 들었지요. 음악대학을 나온 선생님이 레코드를 틀며 설명해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일은 제게 서양음악을 좋아하게 하는 단초가 됐던 것 같습니다.)각각의 방에 따로 피아노가 있는 다섯 개의 레슨실, 큰 교실에 가득했던 책들, 전 거기서 하이네 아뽀르네에르 같은 시인을 알게 되었고, 《전쟁과 평화》같은 소설을 읽었습니다. 미술실에서는 미술반 언니들이 그림을 그렸고, 우린 때때로 학교 뒤편에 있는 향교로 야외 스케치를 나가곤 했었지요. 발레를 전공한 체육 선생님 덕분에 연말에 열리던 추수감사절과 성탄 행사에 무용반 언니들의 발레 공연도 볼 수 있었지요. 아 그리고 체육 행사 때에는 고등학생 언니들이 포크댄스 경연대회를 열었던 것도 기억납니다. 이처럼 저의 중학교 생활은 음악과 미술을, 역사와 문학에 흠씬 젖을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에 대한민국의 어떤 중고생들이 ‘백조의 호수’에 맞춰 무용을 하고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던가요? 훗날 들은 바에 의하면 그때 제가 다녔던 학교가 경기도내에서 최고의 시설을 갖춘 여학교라 근동의 여학생들이 선망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지방학생을 위한 기숙사와 여학생 예절을 위한 수련관을 따로 마련한 곳, 여학교에 맞게 발레 전공자를 체육 교사로 채용하는 세심함을 갖춘 곳이 어디 그 시절에 흔했을까요?


그런데 한편 당시 교장 선생님은 그 지역에서 욕을 많이 먹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욕은 주로 미국사람한테 잘 보여 목사가 되고 교장이 됐다는 것이고 교장이 되더니 너무 거들먹거린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채 안 되었을 때인데, 목사가 되고 교장이 된 그에게 돈 많은 미동북부 북 감리교 할머니들이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엔 늘 학교를 찾아왔습니다. 그분들은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고, 대강당에서 그 할머니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합창, 발레, 성극 등을 공연하고 시화전 그림전시를 하고는 했습니다. 당시 그 교장이 예수를 팔고 하나님을 팔아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서 돈을 끌어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명색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육 사업을 하는 현재의 사립학교 운영자들과는 비교조차 안 될 겁니다. 교회나 목회자들이 운영하는 사립학교들이 지금 어떤 프로그램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온갖 부패와 부정의 온상으로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 그때 그 학교 교장을 ‘코빨갱이’라고 욕하고 비난했던 그 읍내 사람들의 비난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울 것입니다.


햇살이 좋던 오월, 옛 성터에 올랐던 봄 소풍, 그 산정에서 듣던 교장선생님의 기도와 설교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그때 그 교장 선생님은 설교 중에 이 성서 구절을 들었지요. “저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아라. 심고 가꾸지 않아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고…” 이 구절은 제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언제 들어도 참 좋습니다.


그때 산정에서 보았던 그 풍경, 발아래는 저 멀리 근동의 온 들판이 펼쳐져 있었지요. 그때 저는 열세 살, 갓 피어난 새싹이었습니다. 어리고 여리던 그때 내 머리에 쏟아져 내린 예술의 축복, 교육의 세례는 지금의 저를 키워낸 원형질이 되었습니다.


읍내 한 가운데 우뚝 선 교회 첨탑에서 울려 퍼지던 <저 높은 곳을 향하여>란 찬송가는 제가 좋아하던 곡이었습니다. 그 찬송가는 저의 정신의 지향점을 위로 향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지금도 그 노래는 끝까지 따랄 부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인간에 들린 귀신을 돼지한테 쫓아낸 예수님을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때 든 그 의문들은 종교와 신앙, 세상살이의 다양한 모습을 들여다보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의문들은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그 의문들 때문에 숱한 밤을 지새우고, 책을 찾아 읽었었지요. 그리고 그를 통해 아픔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으리라던 그때 그 다짐이 제 생의 길목에 흔적으로 꽃피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김 목사님, 지면을 통해 이렇게 다시 불러봅니다. 목사님이 주신 편지 덕분에 추억의 한 자락을 펼쳐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끝인사를 드리려니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그 아쉬움은 반쯤 접어두겠습니다. 이 팍팍한 시절, 무심한 듯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이 세상에 아직도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을 찾아 다시 일으켜 세우시려는 목사님의 간절함이 들릴 듯합니다.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마당가로 나가 흙바닥에 주저앉아 풀을 뽑습니다. 어느새 웃자란 풀들을 하나씩 뽑으면서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무념무상無念無想. 나쁘지 않습니다. 오늘은 바람조차 없네요. 어느 새인가 마당가에 백합화가 소담스럽게 피었습니다. 백합화의 달콤한 향이 따가운 햇살 속에서도 살며시 전해집니다. 목사님께도 백합화의 은은한 향이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더운 여름에 지치지 마시고, 늘 건강하시길….


박광숙/고 김남주 시인 부인, 《빈 들에 나무를 심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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